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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필담과 창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자를 공통 언어로 사용하는 동아시아의 국가들 사이에는 다른 문화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양식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음성언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때 문자언어인 ‘漢字’로 서로의 의사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바로 筆談과 唱和이다. 이 둘은 국가 간의 교류, 사 신들과 문사들, 여행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역관을 통하지 않은 채 커뮤니케 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서툰 역관보다 정확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리 고 필담과 창화는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안에서 이루어진 문학행위로 漢文을 수 단으로 한 문명의식, 유대의식의 표출이라는 점과 상호교류의 역할을 한다는 동질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한정된 시간과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므로 뛰어 난 문필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도 동일하다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필담과 창화는 쓰이는 경우가 다르다. 우선 筆談은 문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의사 교환 수단으로 散文형식이 일반 적이나, 唱和는 운율을 가지는 시의 화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대화 형식으로 韻文형식이 일반적이다. 필담은 문장도 ‘問’,‘答’의 형식으로 나누어져 궁금증을 묻 고 답하는 형식이지만, 창화는 次韻의 형식을 빌려 대화가 이루어지며 시문창작 이라는 결과물까지 나오게 된다. 그리고 필담은 상대에 대한 정보탐색과 전달의 기능을 한다. 통신사의 주된 임무가 적정탐색이었고, 임무 수행에 필연적으로 필 담이 主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국가와 관련된 것은 절대 엄금이었으므로, 필담에 남아있는 내용은 대체로 私的인 주제가 많았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물이 나 지식을 교환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그리고 필담은 외국인끼리 외교와 교류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며, 누구와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통의 경우는 조선의 사신(특히 三使중 製述官, 書記등이 主)이 일본의 문사나 관리와 주고받는 것이 일반적이나, 行中과도 가능하며 多者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이기도 했다. 그러나 쌍방이 대면한 현장에서 즉석에서 써야 하므로 일반적 문장 과는 다르게 요점만 기록할 수밖에 없고, 일정한 시간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행위 이므로 심도 깊은 논의는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唱和는 국가 간의 문학적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국가의 위신을 높이는 기능이 큰 몫을 차지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일본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교제를 목적으로 하면서도 밑바닥에는 묘한 경쟁심리가 깔려 있게 마련이었다. 일본 사행에서는 일본 문사나 행인들의 시문 요청이 많았으므로, 통신사의 제술관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 선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창화는 작품창작 활동의 일환으로 詩를 창작하는 행위이므로, 無用한 잡담과 청풍명월 따위는 인용하지 않았고, 依韻, 用韻, 次韻등을 지켜야 하는 제약이 있다. 이렇듯 필담과 창화는 ‘붓을 통한 대화’라는 동질성 속에서 이질성 또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필담과 창화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목적과 내용 등에 의 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질성은 동질성을 기본으로 하여 생각되어야 할 것 이며, 동질성 또한 이질성을 배제하고서 거론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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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병자호란 이후의 대청 사절 파견은 굴욕적 사대관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청의 선진 문물올 받아들이는 긍정적 역할도 담당하였다. 특히 서적과 회화의 유입은 조선후기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기에 소흘히 다룰 수 없다. 청으로부터 서적이 유입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중국 조정에서 직접 하사하거나 흑은 조선 조정에서 하사를 요청하는 공식적인 경우와 둘째, 연행한 사신들이 중국 현지에서 직접 구입해 오는 사적인 경우가 그것이다. 연행한 사신들에 의해 서적이 유입되는 경로는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유리창 서사에서 직접 구입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역관-서반을 통해 구입하는 경우이고, 넷째는 청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기증 받는 경우이다. 이러한 다양한 경로를 거쳐 유입된 중국의 서적들이 조선의 문단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행한 조전 문사들이 서적만큼이나 관심을 보인 것은 서화였다. 청의 문사들에게 그림을 요구하거나, 조선의 그림을 가지고 가서 품평을 요구하는 밀들은 의례 있는 일이었으며. 문사간의 교유를 통해 직접 그림을 주고받거나 선물로 기증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청의 화풍이 조선의 화단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심지어는 서양화의 화풍이 간접적으로나마 조선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교류에 필담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 문사들과 청 문사들의 대화는 역관의 통역이나 필담으로 이루어졌는데, 역관의 통역이 간접적이며 상업적 목적을 위주로 한 반면에, 필담은 직접 대면을 통한 대화이며, 인간적 교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역관의 통역보다 그 의미가 깊다. 또한 필담은 의사전달이 정확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심층적인 의사 교류를 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므로 은밀하고 심도있는 사사로운 대화는 대개 필담으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필담은 붓으로 한자를 하나하나 써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고, 말이 틀리면 그 자리에서 찢어도 되고 墨으로 지울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귀를 피할 수 있어서 비교적 安全性을 보장할 수 있었다. 특히 文字獄이 성행한 청나라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서로의 의사 교환을 위한 수단으로 필담보다 더 적절한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선후기에 중국 문화의 유입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후기의 학계와 화단의 발전은 국내적 상황과 함께 청과의 긴밀한 문화적 상호관계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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