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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로마제국 2~3세기에 발생한 대규모 전염병을 겪는 초대교회와 한국전쟁이라는 위기를 겪은 한국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전도의 방향과 목적을 정립해갔는지 살펴본다. 각각 사회적 질서의 아노미 현상이 발생하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그들은 불신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전파 그리고 교회의 성장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전도의 차원에서 조명한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한국사회의 위기 속에서 한국교회가 마주하는 어려움을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봄으로써, 전도의 기회를 모색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위기가 아닌, 복음전파의 기회로 인식해야 한다. 교회 내부의 결속과 회복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여 교회가 사회에서도 유익함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 중심의 전도가 아닌 삶 중심의 전도를 모색해야 한다. 더 나아가 변화된 코로나 이후의 환경에서 전도의 새로운 영역과 방법에 대하여 도전해야 한다. 폐쇄적인 종교모임이 아닌, 개방적인 네트워크 중심의 신앙공동체로 성장하여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의 형편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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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프랑스 헌법상 정교분리는 1789년 인권선언, 1802년 화친조약을 거쳐 1905년 법률의 제정으로 전개되었으며, 1905년 법률의 제정을 통해 전투적 정교분리 원칙의 정점에 다다른다. 즉, 17세기 및 18세기의 계몽 주의자들은 관용의 정신을 기반으로 종교적 영역에서의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며, 이와 같은 주장은 1789년 인권선언 제10조로 규범화된 이래 헌정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었다. 한편, 그 당시의 종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02년 나폴레옹과 교황이 체결한 화친조약은 ⅰ) 가톨릭을 사실상 국교로 인정한 점, ⅱ) 프랑스 교회가 국가교회 로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 ⅲ) 가톨릭 신앙이 공역무로서의 성격을 가진 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1802년의 화친조약체제는 현대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종교의 자유 및 정교분리의 원칙의 측면에서 비판을 받았으며, 더구나 가톨릭의 교회구조와도 일치하지 않는 모순점이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법적 모순과 상황적 요청 으로 인하여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규정하는 1905년 법률이 제정되게 된다. 1905년 법률은 양심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정교분리의 원칙을 규정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였으며, 교구결사를 통해 종교단체를 조직하고, 교회재산의 이전, 교회건물의 유지 및 보존, 종교에 대한 질서유지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투적 정교분리의 원칙의 정점에 해당하는 1905년 법률에 대해 교황청은 강하게 항의를 하였고, 이에 따라 프랑스의 입법자와 법원은 1905년 법률의 효력을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변경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였다. 즉, 입법자는 1907년 1월 2일 법률, 1907년 3월 28일 법 률, 1908년 4월 13일 법률을 통해 1905년 법률을 종교의 자유를 보다 강화하는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개정하였으며, 국사원의 또한 동일한 방향으로 판례를 형성해 나갔다. 이에 따라 1920년에는 교황청과 외교적 관계가 회복되게 되고, 그 뒤에 교황은 새롭게 교회를 조직하는 교구결 사제도를 허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정착된 평화적 개념의 정교분리의 원칙은 프랑스 제 4공화국 헌법의 제정과정에서 특별한 반대의견이 없이 헌법에 규정되게 되며, 이와 같은 태도는 현재의 제5공화국 헌법에 계승되게 된다.
        4.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기독교의 경우, 교회와 국가(Church and State)의 관계는 기독교의 탄생 이후 계속해서 연구되어 온 주제이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각 시대, 국가, 현실에 따라 매우 다양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면 대개 4가지 타입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회와 국가의 일치, 교회 우선 혹은 국가 우선,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그것이다. 이 논문에선 이런 이론적 틀을 토대로 조선 후기에 천주교가 조선에 재 래되면서 국가와 천주교가 부딪히며 일어난 핍박과 박해 가운데 당시 천주교인들의 대응을 통해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 대표적 인물인 황사영과 정하상의 대응(백서(帛書)와 상재상서(上宰相書)) 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이 연구를 통해 이들이 각각 교회우선주의와 국가 우선주의의 유형에 속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의 대응이 향후 천주교의 전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한 이런 차이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검토하였다. 조선에 재래된 천주교는 하나였지만 교회와 국가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박해 시에 천주교 안에는 하나 이상의 입장이 존재했고, 이런 입장은 시간의 흐름과 폭넓은 경험 그리고 교육에 의해 극단적인 입장에서 이해와 대화를 시도하는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되어갔음을 알 수 있다.
        5.
        2019.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잔 달브레는 16세기 프랑스 종교전쟁 시기에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나바라 왕국의 통치자이자 베아른 종교개혁을 이끈 위그노 지도자이다. 로마가톨릭을 신봉하던 프랑스 왕실에서 어머니 마르가리타 당굴렘에 의해 프로테스탄트로 자란 잔 달브레는 다른 왕족 여성들과 달리 공개적으로 프로테스탄트임을 드러낸 보기 드문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가정교사에게 교육 받은 잔은 10대 시절 두 번의 정략결혼이라는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20대에 꾸준히 프로테스탄트들을 도우며 종교개혁자들과 교류하다가 32세에 테오도르 드베즈로 대표되는 칼뱅주의자들의 영향으로 공개 개종을 했다. 이후 자신의 영지 베아른에서 입법과 제도 개혁을 통해 종교개혁을 단행하며 프랑스 위그노 중 가장 높은 위치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이끌던 잔 달브레는 오르테즈 아카데미 설립, 성서 번역, 앙리 4세 등 많은 영적 유산을 남겼다. 본 논문은 종교개혁사가 기억해야 할 잔 달브레의 생애와 활동을 프로 테스탄트 통치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앙인이라는 두 측면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잔이 어떻게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는지를 기술할 것이다. 이후 프로테스탄트 통치자 잔을 조명하기 위해 ‘베아른 교회법령’에 나타난 베아른 종교개혁과 잔의 국가관을 분석할 것이다. 프로 테스탄트 신앙인 잔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563년 잔과 다르마냑 추기경이 주고받은 편지, 1568년 작성한 『충분한 설명』 속 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 일 것이다. 이를 통해 여성종교개혁자이자 프로테스탄트 통치자인 잔 달브 레를 개혁사에 각인시킬 뿐 아니라 프랑스 종교개혁에 미친 잔의 영향력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6.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속에서 태극기에 대한 국기 경례 방식으 로 인해 발생한 교회와 국가 간의 첨예한 갈등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해방을 맞이한 직후인 미군정기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행된 국기 경례 방식 은 세이케이레이, 번역하여 최경례, 흔히 배례라고 불리우는 일본식 경례 방식이었다. 한국 기독교는 이와 같은 국기 배례에 대하여 민족적으로는 일제의 잔재라는 측면, 신앙적으로는 우상 숭배라는 측면, 종교적으로는 미신적이라는 측면 등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거부하였다. 이러한 국기 배례 거부 움직임은 해방 직후부터 손양원 목사를 필두로 해서 장로교회가 주도 하였다. 그렇지만 국기 배례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국가 지 상주의 혹은 민족 지상주의의 일환으로 한국 사회에서 더욱 강력하게 시행 되었다. 다시 말해 대종교인으로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던 안호상이 종교의 식이 아닌 국가의식이란 명분하에 더욱 강력하게 시행한 것이다. 이렇게 국기 배례가 자리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시행된 공간은 일선 학 교들이었다. 이로 인해 특히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유년 주일학교 학생들이 국민학교에서 시행하는 국기 배례를 거부함으로 인하 여 수난을 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장로교를 넘어서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도 국기 배례에 대 한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동일한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 닌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던 감리교는 일제 강점기의 신학과 신앙 전통을 계승하여 국기 경례에 대해서도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의식으로 간주하였 다. 그리하여 국기 배례든, 혹은 국기 주목례든 간에 어느 것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직후, 1950년 4월 25일에 국기 배례 폐지 건이 국무 회의에 상정되었다. 국무회의에서는 국기에 대한 배례를 국기에 대한 주목 례로 변경하였다. 이와 같은 국기 경례 방식 변경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 이 결정적이었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이 지원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알 려진 바와 같이 한국 기독교의 지속적인 국기 배례 거부 운동도 한몫했지 만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두 수난 사건들이, 제 각각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개연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 하나는 국 기 배례 거부로 인하여 감옥에 수감되었던 안중섭 전도사의 수난과 또 다 른 하나는 국기 배례 거부로 인하여 위천교회 주일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겪은 대환난이다. 이 두 가지 수난 사건 모두 이승만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수난 해결을 위한 인적 연결 고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 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국기 경례 방식에 대한 변경은 국 기 배례 거부로 인한 수난 속에서 그 해결 방안의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7.
        2015.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의 논점은 동방 로마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를 통해 과연 동방 로마제국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이야기 되는 것처럼 caesaro-papism 으로 정의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슈멤만의 항변이 옳은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방 로마제국은 교회가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동방 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 황제-교황주의” ‘Byzantine caesaro-papism’로 국가가 교회를 조정한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있다. 동방정교회 학자인 알렉산더 슈멤만은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면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어떤 조약 혹은 법률상의 제한에 의해서 연결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나 교회 신앙에 의해 말해진 진리(truth)에 의해서 연결되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신앙은 먼저 황제가 그리고 나서 그를 통해 제국 그 자체가 교회 신앙의 진리로서 그리고 황제나 제국의 우위에 있는 진리로서 인정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일단 슈멤만의 주장을 전제하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가 그렇다면 종교와 정치 사이에 언제나 연결되어 있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황제는 과연 진정으로 교회 분쟁의 중재자인가 혹은 결정자인가를 검토하려고 한다. 필자는 네스토리오스 논쟁(428-431), 즉,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재임했던 428-431년, 특별히 테오토코스 논쟁에 휘말리면서 그의 실각까지의 역사적인 재구성을 통해 이러한 쟁점을 분석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입장을 논의하지만, 방법상 교리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2세가 전체 역사적 정황 속에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자 한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로마제국을 최초로 기독교제국으로 명명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손자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 이후 장남인 아르카디우스(395-408)는 콘스탄티노플을 통치하였고 차남인 호노리우스(395-)는 이태리 지역을 통치하였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408-450) 아르카디우스의 장남으로 40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르카디우스는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그는 408년부터 450년까지 42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전 생애동안 통치한 최초의 왕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가 네스토리오스의 논쟁에 관여하게 된 때는 그의 아버지 알카디우스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토모스를 실각시킨 지 불과 사반세기가 겨우 지난 때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 즉 동방 로마 제국이 지향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입장이 크게 변화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소스토모스와 네스토리오스의 실각 사건은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기에, 두 사건을 함께 고찰하는 것은 동방 로마제국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얻을 것이다.
        8.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필리핀에서 기독교는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교황청이 하사한 ‘선교보호권’ 아래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은 1565년에 필리핀의 일부 지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어거스틴 수도회를 비롯한 수도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일찍이 17세기가 시작될 때까지는 산간 및 남부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을 개종시키기에 이른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한 3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양편이 가지고 있는 목표 즉 기독교선교와 식민통치의 확장을 위하여 서로 유착관계를 추구한 것으로 드러난다. 식민지배 초기에 스페인은 식민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토착민의 자발적 동의’를 추구하였으나, 통치의 현장에서 수행된 수도회 선교사들의 관찰은 스페인 식민세력에 의한 강제적인 통치를 입증할 뿐이었다. 마닐라 종교회의 (1582)는 스페인이 필리핀에서 정치적 권리를 본질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한편, 기독교 선교의 환경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단적으로 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아, 식민통치를 용인하고 ‘교회의 도구로서의 국가’ 개념을 표방하였다. 한편 스페인 식민당국은 수도회 선교사들을 중앙과 지방에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특별히 지방에서 그들의 공무대행은 식민통치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으며, ‘국가의 도구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현상이었다. 나아가, 식민당국과 교회는 큰 맥락의 인종-정치적 차별주의로부터 필리핀 토착 사제들에 대하여 차별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식민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수단이었다. 결국, 스페인 통치시기 가톨릭 교회, 특히 수도회 선교사들은 부동산 축적, 소작농의 억압, 인종차별 등의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며 사회로부터 신망을 크게 잃게 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봇물처럼 터진 필리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성직자의 식민통치에의 참여를 비판하는 ‘반교권주의’ (Anti-clericalism)는 가장 강력한 투쟁의 목표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