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권호리스트/논문검색
이 간행물 논문 검색

권호

제53집 (2019년 8월) 10

1.
2019.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에 등장했던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그 의도와 지향점에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점을 구명해 보려는 시도였다. 종교개혁이후 도그마 중심의 교조적인 정통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막 대두되고 있던 초기 계몽주의에 내재된 이성절대주의의 한계성(혹은 위험성)을 경계하면서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에서 신앙(영성)의 고 유한 영역을 확보하고자 했던 당시의 경건주의자들에게서 계몽주의 이후 이성적 합리성과 객관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영성을 형성하고 자 했던 종교적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 하면, 종교적 인식론과 새로운 영성의 관점에서 경건주의와 오늘날의 포스 트모던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음을 구명했다. 더욱이 낯선 타자와 사회적인 약자와 주변인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과 환대를 강조하는 데리다나 레비 나스 같은 포스트모던주의자들과 회심한 이후 필연적으로 ‘이웃사랑’을 성화의 핵심 내용으로 삼았던 A. H. 프랑케와 같은 경건주의자들 사이에는 그 의도와 지향성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경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 상황에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이후 교파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던 서구 기독교 사회에 총체적인 위기와 파국을 가져온 30년 전쟁에 대한 신앙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19세기 말엽 서구 문명의 총체적 위기와 몰락을 예감한 니체 같은 예언자적 인물에서 시작하여, 세계 1, 2차 세계 대전과 전체주의의 야만적 폭력과 폐해를 통해 이성 절대주의와 낙관적인 역사관에 대한 절망과 회의 속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항 문화적 성격으로 대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기독교 세계의 사회적 위기와 사상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안적 시도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
2019.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전쟁 직후부터 우리나라의 반공주의는 곧 친정부 및 친미주의를 고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정부와 미국에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반정부, 친공 행위로 오해되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고영근은 독특 한 행보를 보였다. 그는 출옥 성도들의 보수적인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핍박당한 경험과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민군대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강경한 반공의식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70 년-1980년대에 고영근은 정부와 미국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정치체제가 공산 독재 국가들과 유사하고 미국이 우리나 라의 군벌 정권을 방조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고영근이 이와 같이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한국전쟁을 통해 경험한 미국 이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전쟁 당시, 특히 포로수용소에서 경험했던 미국의 부정적인 모습들이었다.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목격한 미군의 반공포로들에 대한 무분별한 조치들이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물론 미국에 대한 고영근의 태도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한 그의 혜안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2016년-2017년 일단의 기독교인들이 성조기와 십자가를 들고 행진한 모습은 그동안 주류 한국교회가 친정부 및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를 견지하는 것을 기독교 신앙과 동일한 가치로 이해되어 왔음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고영근은 친정부 및 반공주의 그리고 친미주의를 견지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과 동일한 가치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고영근의 행적은 한국교회가 신앙과 이념에 대해 견지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라고 본다.
3.
2019.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4-5세기 니케아적 영성신학의 은사론을 통해 나운몽의 용문 산 운동에 나타난 은사들을 평가해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동안 나운 몽 연구는 한국교회사의 지평 안에서만 논의 되었는데, 필자의 새로운 방 법론을 통해 나운몽에 대한 이해를 보다 넓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니케아적 영성신학을 구성하기 위해서 사용된 텍스트는 주로 아타나시오스, 바실리오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이며 이 외에도 사막 영성을 증 언하는 작품들도 사용되었다. 나운몽의 용문산 운동에 대해서는 『아실 나 운몽목사전집』만을 사용하였다. 전반적으로 니케아적 영성신학의 은사론은 섬세하게 신학적 사유를 전개한 반면, 나운몽의 경우는 체계적인 은사론이 아니라 단편적인 사건 중심으로 나열하는 경우가 많다. 비교의 범주는 고린도전서 12장 8절 이하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에서 치유와 기적의 은사, 악령을 쫓아내는 은사, 예언의 은사 등 세 가지로만 한정했다. 이 세 가지 은사는 나운몽의 용문산 성령운동에서 두드러지는 요소였기 때문에 니케아적 은사론의 틀을 통해 검증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아실의 은사론은 전체적으로 니케아적 영성신학 안에 머무르며, 특히 치유와 기적의 은사는 니케아적 은사론에 근접한다. 그런데, 축사(逐邪)의 경우 아실은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지만 니케아적 영성신학은 사 회와 역사와 정치구조의 축귀 등 거대한 지평을 갖고 있다. 예언의 경우 니케아적 은사론은 신학적으로 정교하지만, 아실의 경우 사건만 설명할 뿐 신학적 차원의 관심은 결여되어 있다.
4.
2019.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광주라는 지역사회에서 현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연구는 특히 20세기 초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광주에 세워진 미션 스테이션을 중심으로 성장한 인물들의 활동을 밝히고, 그들이 광주지역의 현대화 과정에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연구의 시기는 한일병합을 전후한 시기부터 1980년대까지의 시기에 확장하되, 해방 후 광주의 현대화 과정에서 특히 조아라의 활동에 강조점을 두어 살펴본다. 일제강점기에 광주에서 활동했던 유화례, 서서평 선교사, 그리고 최흥종, 김필례 등의 지역 기독교인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활동가로 성장한 조아라라는 한 인물을 통해, 교육, 여성활동, 청년활동 그리고 더 나아가 민주화운동에서의 역할을 추적하고자 한다. 특히 현대화과정에서 민주화라는 개념은 지역사회 광주를 이해하는 주제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연구의 기본적 전제이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광주 스테이션을 통해 성장한 기독교인들의 활동은 지역사회 광주의 도시화와 현대화를 이끌었다는 점을 밝혀낸다. 특히 서양 의료시설을 찾아 광주로 몰려온 한센병환자들과 결핵환자들, 한국전쟁(시민전쟁)으로 인해 홀로 남겨진 고아들,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이농소녀들, 익명의 도시사회에서 나타난 윤락여성들과도 시빈민들, 그리고 산업화시기에 외면했던 민주화요구 등은 도시 광주가 확장되면서 당면한 사회적인 문제였고, 이러한 문제를 마주하는 곳곳에서 광 주 스테이션에서 성장한 기독교 활동가들의 활동은 너무나 분명했고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5.
2019.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외국 교회의 지원에 의해 개척된 최초의 재일 한인교회 미카 와시마(三河島)교회의 역사를 재구성하되 특히 동 교회의 설립과 발전, 교회적 특성, 타교단 한인교회들과의 협력과 교류에 주목하였다. 미카와시마 교회는 미국 그리스도의교회와 연계된 재일 요츠야선교회 소속 제5교회의 한국인 교인에 의해 1926년 개척되어 한국인 전문사역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성장하였다. 동 교회는 1940년대 초반 ‘일본기독교단’ 산하에 편입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탈퇴하고 종전의 미카와시마교회로 재건 되었다. 동 교회는 1960년대 초 요츠야선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치, 자립 하는 지역교회가 되었다. 미카와시마교회는 개척 후 3년만인 1929년부터 교인 100명 이상이 출석하는 한인교회로 성장하였고, 한국교회와 미국 그리스도의교회(유악기)의 특징을 부분적으로 공유하였다. 동 교회는 한국인 사역자(목사 혹은 전도사 혹은 장로) 혹은 친 한국적 일본인 사역자(오다)의 치리로 한국교회의 특징인 ‘전도(부흥)집회’ ‘새벽기도회’를 정착시켰다. 반면 요츠야선교회와 재정과 인적 유대를 유지하며 그리스도의교회의 특징인 개교회의 자치권 을 계승받아 교단체제에 반대하고, 재일 한인교단교회들의 연합체인 ‘재일 본조선기독교’나 ‘재일본조선기독교연합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또 성경을 신앙과 실천의 기준으로 중시하는 교회가 되었다. 동 교회는 재일한인교회 연합기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사역을 위해 타교단 한인교회(특히 연합공의회계 한인교회)와 복음사역에 협력하고 교류하였다.
6.
2019.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잔 달브레는 16세기 프랑스 종교전쟁 시기에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나바라 왕국의 통치자이자 베아른 종교개혁을 이끈 위그노 지도자이다. 로마가톨릭을 신봉하던 프랑스 왕실에서 어머니 마르가리타 당굴렘에 의해 프로테스탄트로 자란 잔 달브레는 다른 왕족 여성들과 달리 공개적으로 프로테스탄트임을 드러낸 보기 드문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가정교사에게 교육 받은 잔은 10대 시절 두 번의 정략결혼이라는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20대에 꾸준히 프로테스탄트들을 도우며 종교개혁자들과 교류하다가 32세에 테오도르 드베즈로 대표되는 칼뱅주의자들의 영향으로 공개 개종을 했다. 이후 자신의 영지 베아른에서 입법과 제도 개혁을 통해 종교개혁을 단행하며 프랑스 위그노 중 가장 높은 위치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이끌던 잔 달브레는 오르테즈 아카데미 설립, 성서 번역, 앙리 4세 등 많은 영적 유산을 남겼다. 본 논문은 종교개혁사가 기억해야 할 잔 달브레의 생애와 활동을 프로 테스탄트 통치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앙인이라는 두 측면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잔이 어떻게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는지를 기술할 것이다. 이후 프로테스탄트 통치자 잔을 조명하기 위해 ‘베아른 교회법령’에 나타난 베아른 종교개혁과 잔의 국가관을 분석할 것이다. 프로 테스탄트 신앙인 잔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563년 잔과 다르마냑 추기경이 주고받은 편지, 1568년 작성한 『충분한 설명』 속 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 일 것이다. 이를 통해 여성종교개혁자이자 프로테스탄트 통치자인 잔 달브 레를 개혁사에 각인시킬 뿐 아니라 프랑스 종교개혁에 미친 잔의 영향력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7.
2019.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변혁기마다 여성들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가장 앞장서서 창조적인 사역의 길을 개척하고 여성공동체를 형성하여 교회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성장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안정화되면, 여성들만의 특수성을 가졌던 여성공동체는 전체공동체에 흡수 혹은 통합됨으로써 여성들이 다시 소외되는 역사를 반복하였다. 본 글은 여성공동체가 ‘창의적 사역 개척 – 여성공동체 형성 – 통합위원회로 변화 – 여성의 특수성 약화’라는 역사의 순환을 반복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여성의 참여가 안정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 현상은 오늘날 교회에서 여성, 청년, 장애인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초 교회론의 변화에 따라 여성의 입지가 약화 되는 상황에서, 여성 에큐메니칼 선구자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의 성찰과 에큐메니칼 대화를 통해 여성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을 동시에 전개 하면서 세계교회협의회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결과, 교회에서 여성의 활동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평신도 신학을 정립하여 20세 교회론의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지도자는 사라 차코, 캐슬린 블리스, 마들렌 바롯, 그리고 수잔 드 디트리히가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평가는 미미하다. 그 이유는 이들 역시 여성위원회를 평신도분과로 변경하여 남성과 여성이 함께 하는 통합공동체를 기대했으나, 다시 부서가 남성 위주의 조직으로 변경되어 오히려 여성의 입지가 축소되고, 여성 사역의 토대마저 다시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권위가 신장된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여성위원회의 존립은 매우 중요하다. 본 글은 세계교회협의회 임시위원회(1938)부터 에반스톤 중앙위원회 (1955)에 이르기까지 여성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에큐메니컬 운동을 연대순으로 분석하였다. 여기에는 세계교회협의회 집행위원회 또는 중앙위원회의 회의록, 세계교회협의회 문서보관소 및 세계 YWCA 문서보관소에 있는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본 글의 결론으로 교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완전하고 동등한 참여를 위해서는, 여성공동체는 전체 공동체의 일치를 보호하고, 전체공동체는 여성 공동체의 특수성을 배려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성숙한 관계 형성과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사역 참여는 진정한 교회 개혁의 가시적인 표현이며 다가오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8.
2019.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18세기에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는 경건한 삶과 ‘거룩함’을 강조함으로써 ‘경건의 방향전환’(Frömmigkeitswende)을 시도한 운동이었다. 경건의 방향을 교리보다는 개인의 내면적 삶에 둔 경건주의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경건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다만 거 룩한 삶의 윤리적 완전성(Vollkommenheit)을 지향한 사람들이었을까? 그 들은 이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도덕주의자 혹은 율법주 의자였을까?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은 경건주의를 율법주의적인 도덕주 의와 비슷하게 생각하곤 한다. 경건주의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경건주의자들이 구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건주의자들은 루터처럼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만이 다른 모든 교리가 흘러나오는 근원이라고 말하면서도 소위 ‘거짓 믿음, 죽은 믿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 더불어 생명력 있는 믿음 생활, 거룩한 경건 생활을 강조하면서 능동적 선행만이 오직 참된 믿음의 표지라고 이해하였고,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법정적 ‘칭의’ 보다는 ‘중생’(Wiedergeburt)을 더 즐겨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자 중에서 이러한 경건주의의 중생 개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를 새롭게 해석한 사람이 위르겐 몰트만이다. 몰트만 신학에 대한 경건주의의 영향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령에 대한 신학적 전개를 함에 있어서 진젠도르프의 기독론으로 부터 중요한 통찰력을 얻었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외팅어의 사상과 유사하다. 또한 몰트만은 종말론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슈페너, 벵엘, 외팅어의 종말론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새롭게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칭의와 성화, 중생과 같은 구원론적 사상과 관련해서도 몰트만은 루터교 정통주의의 법정적 칭의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경건 주의적인 중생 개념으로 보충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몰트만의 구원론에 대한 경건주의의 영향은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슈페너와 몰트만의 중생 개념을 비교·분석하여 경건주의 적인 중생 이해를 몰트만이 어떻게 수용·변화시켰는지, 양자 사이에는 어 떤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본 논문은 이 과정을 통해 몰트만 신학에 대한 경건주의 영향사 연구에 중요한 학문적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경건주의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9.
2019.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해방공간에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하다. 이들은 큰 틀에서 우익진영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기독교인이었다. 이 세 사람은 귀국하면서 다같이 기독교인으로서 활동했고, 기독교를 중요한 정치적인 배경으로 생각했다. 이런 우익 3영수의 대열에서 제일 처음 이탈한 사람은 김규식이었다. 원래 중도파였던 김규식은 제 1차 미소공위 이후 미국의 좌우합작 정책에 따라 중도파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김규식를 우익의 지도 자라고 따르던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는 김규식의 노선을 이탈하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독립촉성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48년 김구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반대하자 기독교인들은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1948년 3월 이북인대회에서 김구는 강력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익 기독교세력은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이승만을 지지하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우익 3영수가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반공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들을 지지하였다. 특별히 공산주의의 학정을 체험한 월남 기독교인들의 발언권이 센 기독교에서 김규식의 좌우합작 주장이나, 김구의 통일지상주의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결국 이승만은 1948년 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이 되었다.
10.
2019.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김창준(金昌俊) 목사의 설교 “最大의 模範”을 통해 ‘모범자 로서의 예수상’을 분석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는 베드로전서 2장 21절 말씀을 본문으로 설정하여 이 글을 작성했다. 본 연구에서는 김창준의 ‘모범자로서의 예수상’을 분석하기 위하여 1922년 『宗敎界 諸名士 講演集』 에 수록된 “最大의 模範”을 고찰했다. 첫째, ‘겸손’에 대해: 김창준이 생각한 그리스도인의 지고의 과업으로서 겸손의 기초적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폈으며, 그 원리들로서 예수 그 리스도의 비하(卑下), 비하의 실제적 체험과 실천, 그리스도인의 공평무사 (公平無私)한 태도 등에 대해 논했다. 둘째, ‘책임감’에 대해: 책임감과 관련된 의미심장한 교훈들을 다루었으며, 그 예로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헌신, 믿음과 행위의 일치 (信行一致), 자기성찰, 대소사 모든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신자의 삶 등을 고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열정적 사명감의 조화에 큰 비중을 두었다. 셋째, ‘이타적 사랑’에 대해: 김창준의 논리적 논증에 따라 이타적 사랑에 대해 살폈다. 그는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도들과 초기 교회 성도들의 이웃을 위한 헌신적인 삶,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이타적 사랑을 피력했다. 부연하여, 본 연구자는 향후 김창준과 관련된 연구가 확장되어 이 주제 외에도 ‘그의 신앙과 삼일독립운동’, ‘그의 신앙과 사회주의 사상’, ‘그의 목회사역’ 등 다방면의 연구로 진척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