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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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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집 (2016년 8월) 9

1.
2016.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살았던 시대는 조직적인 박해가 있던 시대는 아니 다. 지엽적이긴 하지만 지속적인 박해가 있었고 그 과정 가운데 초기 변증 가들은 기독교 공동체를 수호함과 동시에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올바로 알려야만 하는 중요한 의무가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현실적으로 로마의 정책을 수용 할 수 없는 기독교의 처지에 대해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로마 사회에서 기독교가 이질적인 종교가 아니며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는 종교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했다. ‘높은 윤리성’과 ‘황제를 위한 기도’는 유스티누스가 찾은 해답처럼 보인다. 하지 만 로마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연 이러한 주장이 수용 가능했을까 하는 의 문이 든다. 때문에 유스티누스도 로마가 수용 할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자 기 방어적 목적을 더 크게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동체의 결속을 공고히 하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해로 인해 기독교를 부정하 고 떠나는 배교자들이 생겨나는 것을 막고 확고한 신앙 가운데 기독교인들 이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유스티누스 때처럼 무력을 통한 박해는 오늘 우리 한국 사회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기독교의 위상이 그때보 다 사회 가운데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수많은 기독교인의 증가에도 ‘높 은 도덕성’을 당당히 내세울 만큼 오늘 우리는 사회 가운데 좋은 모습으로 보여 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나 평가를 위해 기독교 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도덕성도 지니지 못한 채 하나님 나 라의 실현을 위해 애쓴다는 것은 헛된 노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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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4세기 로마제국의 밀라 노에서 살았던 암브로시우스의 경제사상을 연구하고자 함이다. 현대사회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사상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이 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 양극화의 폐단은 가히 심각한 수준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재산을 잃고 쫓겨난 수천의 참혹한 탄식들을 유산계급의 냉담한 세상에 대변하는 선지자로서, 그 당시 거대한 로마제국의 권력 과 부를 거머쥐고 탐욕에 가득 찬 사람들을 향해 공의로운 삶을 살도록 도전했다. 그는 부와 빈곤 간의 인과관계를 알렸고, 토지와 천연자원을 독점함으로 인간을 노예화하는 그 당대의 불의한 경제체제를 공의로운 희년사 회로 개혁되도록 강단에서 외치며, 삶의 현장에서 모범을 보여 주었다. 암브로시우스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에 근거하여 판단했다. 그의 비판은 로 마법과 제도에 대해서 합법 여부가 아닌 하나님의 공의 여부였다. 특히 그는 토지와 천연자원에 대한 사적 소유는 토지 소유주와 토지를 빼앗긴 자들 모두를 노예로 만드는 우상숭배임을 지적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인간의 기본 평등권과 생득권을 환기시키면서, 토지소 유권의 독점에 대한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인류연대를 통한 코이노니아 실천을 강조하는 대안으로 희년사상을 제시했다. 그는 스스로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공동생활의 참된 풍요로움의 본을 보여 주었다. 공동체의 중심에 있었던 제도적 교회를 통해,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식량보급, 장례지 원, 응급구호 등을 제도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결국, 암브로시우스의 경제사상은 현대사회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토지 투기와 막대한 상속 등의 불로소득에 대한 불의를 지적해 주었다. 그는 또한 불로소득에 대한 반환과 부채탕감운동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공의로운 경제사상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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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루터가 가르친 인간의 죄에 대한 제어로서 하나님의 숨어계 심의 세 종류를 제시하고, 한국 개신교에 대한 적용점을 살펴보기 위한 것 이다. 루터에게서 하나님은 첫 번째로, 신자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지만, 불신자로부터 자신을 숨기신다. 참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길은 성령의 도 우심 가운데 율법과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영광의 신학자로부터는 자신을 감추시지만, 십자가의 신학자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신다. 신자는 탐욕을 추구하여 하나님을 우상화 하는 영광의 신학을 버리고,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극복하게 하는 십자가의 신학을 가질 때 참 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모든 신자로부터 숨어계신 다. 참된 신자는 숨어계신 하나님의 위엄을 알고,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을 붙드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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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이 표어는 종교개혁의 중심원리 가운데 하나로서 다른 모든 신학적 원리들의 가장 기초가 되는 원리(prima principium)이다. 그러나 종교개혁기에 있어 다양한 논쟁적 상황에서 볼 때,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이 표어가 가지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신학적, 실천적 의미들은 더욱 세분하여 정확하게 논구될 필요가 있다. “오직 성경만 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세부적인 교리로 구성됨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1) “성경의 충분성(sufficientia)” 교리와 (2) “성경의 명료성(claritas, or perspicuitas)” 교리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가운데 특히 두 번째인 “성경의 명료성” 교리가 가지는 실제적이고도 중요 한 의미들을 루터의 신학을 중심으로 연구 고찰한 것이며, 또한 이것이 그의 종교개혁신학의 정립 과정과 성경해석 원리 및 여타 다른 종교개혁 원리들에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작동되었는지 살펴 본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신학에 있어 특별히 ‘성경의 명료성’ 교리와 관련하여, (1) 인식적 원리(epistemological principle), (2) 신학적 원리(theological principle), (3) 해석학적 원리(hermeneutical principle), 그리고 마지막으로 (4)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로서의 그 실제적인 작용과 구체 적인 함의들을 구분하여 고찰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성경의 명료성’ 교리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과 그의 종교개혁운동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여러 신학적 논쟁 과 신앙적인 투쟁의 국면들에 있어 다양한 기능의 역할과 함의들을 함축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본 논문의 분석에 따르면, 루터에게 있어 그것은 먼저, (1) 신학적 인식과 실천을 위한 명확한 확실성을 담보하는 근원적인 “인식론 적 원리”(epistemological principle)로 작용하고 있으며, (2) ‘십자가의 신학’의 정립을 위한 ‘그리스도와 복음 중심’의 성경해석의 “신학적 원리”(theological principle)로서 기능함과 동시에, (3) 종교개혁신학의 체계화를 위한 구체적인 성경해석 방법론을 구축하는 “해석학적 원리”(hermeneutical principle)로 작 동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4) ‘말씀의 선포(설교)와 성례전의 개혁’, ‘전성도의 제사장직과 교회 직분의 개혁’,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소명론’과 일상의 삶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신학의 핵심적인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들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현대 성경해석학 적인 위기의 상황 속에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그들의 종교개혁신 학을 정립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원리(prima principium)로 삼았던 “성경 의 명료성”(claritas Scripturae) 교리와 그것이 함축하는 올바른 성경해석 원리 들을 창조적으로 복원하여 더욱 발전적이며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깊이 있는 연구가 더없이 중요하고 긴급하게 필요하다 할 것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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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근래까지 잊혀져 왔던 취리히 종교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 (1504-1575)가 1534년에 출간한 고린도전서 주석의 역사적 형성 배경과 그 의 주석적 방법론의 특성, 특히 자료 인용의 방법에 대한 것이다. 불링거의 성서 주석은 그가 츠빙글리의 사후 위기에 처한 취리히 종교개혁을 유지 발전시키는 과제를 수행해 나가는 과정의 산물로서, 간편하고 유용한 주석 자료를 동료 목회자들에게 제공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주석 출간의 계기는 불링거에게 주석 자료를 보내주고 출간해 주기를 끈질기게 요청했 던 베르히톨트 할러 등 여러 스위스와 독일어권 지역의 개혁자들이 제공했 으나, 불링거는 1532년부터 신약 성서 서신서의 주석들을 출간하여 선물하 고 헌정함으로써 취리히와 여러 지역의 교회, 정치 지도자들 간에 연대와 교류를 만들어가는 기회로 삼았다. 1534년 고린도전서 주석은 프랑크푸르 트 교회의 개혁파 목사인 디오니시우스 멜란더에게 헌정되었다. 불링거의 성서 주석은 멜랑히톤과 칼뱅 등 동시대 다른 주석가들과 비 교해 볼 때, 문헌학과 수사학에 기초한 인문주의적 주석 방법론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주석 자료 인용의 빈도와 태도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불링거는 적어도 42명의 고대, 중세, 근세 저자들로부터 거의 주석 한 페이지에 한 회 가까이 인용하고 있으며, 간접 인용과 의역이 주를 이루는 다른 저자들에 비해 직접 인용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보인다. 더군다나 그런 경우 비판적이고 독창적인 해석을 추구하기보다는 고대 교부들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인용하며 그 저자들의 목소리를 빌어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취리히 교회의 성서 해석이 교부적 권위를 담아 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또한 학문적 자료들을 직접 다룰 여력이 없는 평범한 목회자들에게 유용하고 간편한 성서 연구 방편을 제공해 주고 있 다. 불링거의 성서 주석은 취리히 교회와 다른 개혁 교회 공동체, 그리고 고대 교부와 당대 개혁 교회의 구성원들간에 진리의 네트워크와 연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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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적 평화교회’로 불리는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주의 전통에 대한 연구로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하였다. 첫째, 16세기 종 교개혁과 재세례파의 형성과정을 논구하고 이런 과정에서 메노나이트 교 회의 생성과 그 신학에 주목하였다. 둘째,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주의 전 통을 파악하기 위해 메노나이트교회의 시원이 되는 메노 사이먼스(Menno Simons, 1496-1561)의 생애와 저술을 통해 그의 평화주의 사상의 연원을 추적하였고, 그것이 성경과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에 근거하였음을 제시하 였다. 특히 메노 사이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를 ‘비폭 력 평화’에 찾았음을 지적하였다. 셋째, 이런 평화주의가 재세례파의 첫 신 앙고백서인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에서 표명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이 그 이후 어떻게 계승되어 왔던가를 지적하였다. 넷째, 이런 전통을 계승하는 메노나이트 교회의 양심에 근거한 병역거부 에 대해 기술하였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비폭력 평화주의의 단순한 적용이 라는 점을 지적하고,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는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있어왔 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이후 정당정쟁론의 대두,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 을 통한 탈 콘스탄틴주의와 병역거부에 대해 기술하였다. 또 16세기 이후 메노나이트교회에 의한 평화주의 전통이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가를 지적함으로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주의 전통을 제시하고자 시도하였다. 특히 메노나이트교회가 ‘제자도’로 고양해 왔던 비폭력(non-violence), 반전운동 (anti war movement),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 to Military Service), 화해(reconciliation), 앙갚지 않음(un-retaliation) 등과 같 은 고상한 가치들은 남북한의 군사적 대결과 위협 하에 있는 오늘의 한국 에 교훈과 자극을 주고 있음을 지적하고,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주의는 근 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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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서유럽의 근대 국가와 민족들의 형성 과정에서 종교개혁이 미친 영향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말에 한국인들, 특히 기독교인들 속에서 민족 개념과 민족됨의 의식 형성에 끼친 기독교의 초기 성경 번역 과 그 역할에 주목하였다. 근대 초 서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한 가지 의미는 성경의 재발견이었고, 이것은 각 국가들이 근대 민족국가로 이행하 기 위한 전단계로서 하나의 민족됨의 형성에 기여했다. 즉 영혼 구원을 의 도했던 종교개혁이 프로테스탄트 민족들과 국가들이 만들어지는데 일조했다. 이때 종교개혁을 겪었던 각 국가들은 성경으로부터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신념을 끌어냈다. 특히 성경에서 나오는 해방, 언약, 율법, 선민, 출애굽, 약속의 땅에 대한 꿈과 같은 서사들을 성경에서 끌어와 그들의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근대 초 독일지역, 네덜란드, 체코, 덴마크, 스위스,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와 같은 나라들이 외부적으로는 외세의 침략 과 간섭에서, 내부적으로 신분제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이를 성취했다. 이를 언약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 한말 한국인들에게 근대적인 서구식 사고방식을 깨우쳐주었고, 나아가 기독교민족주의를 고취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중심 매개체는 특히 성경으로 간주할 수 있다. 성경은 단순히 개인의 영혼구원이라는 종교적 정 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공동체로서 민족됨의 통일적인 서사와 담론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본고는 서양사와 비교사적 관점에서, 성경이 한말의 한국인들에게 민족됨의 의식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이 후에 실용적인 성경 민족주의로 어떻게 표출되며, 그 결과인 성경 민족주의 에 대한 개념정의를 시도했다. 초기 번역 성경의 보급은 외형상으로 사회적 이고 제도적인 하나의 민족됨의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또한 근대적인 시민 적 민족주의를 연상시키는 평등주의적인 측면들도 가지고 있다. 즉 모든 민족은 ‘정치적 주권’을 획득할 권리를 갖는다는 사상으로 정의되는 정치적 교의를 전개한다. 한말의 기독교는 사회개혁과 반외세의 저항의 서사를 성 경의 민족됨의 서사에서 상당부분 끌어와 그것을 민족주의 운동과 연결시 킨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한말 개신교의 성경 번역이 결과적으로 빚어 낸 것은 내부적으로는 사회개혁과 외부적으로는 반외세적 저항사상의 행동 프로그램인 성경 민족주의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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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기독교계엔 바르트에 대한 열풍에 가까운 관 심으로 다수의 바르트 신학 관련 번역서들이 출판되었다. 그와 비교할 때, 한국의 기독교 출판계는 선교사들의 통제 하에 기초적인 단계의 신학 및 신앙서적들의 번역소개에만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 비해 당시의 최 근 신학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중요 신학 서적들의 번역 소개는 충실히 이 루어지지 못했다.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칼 바르트에 대한 사상이 소개되는 것은 1930년대 초반부터이며, 주로 신문과 잡지에 바르트 신학의 기초 적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해방 전후 한국교회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신 학자들은 ‘바르티안’(Barthian)들이었으며, 대부분 1930-40년대에 유학한 일본의 여러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해방 직후 신진 학자들의 칼 바르트 대 표 저작의 번역출판 시도가 있었지만, 6.25전쟁의 발발로 지체되었고, 이후 1950년대까지는 바르트 등의 최근 신학 저술들이 번역 소개되어도 대부분 이미 출판된 일본어 번역서를 모본으로 삼아 한글 번역을 시도한 결과였 다. 그러나 1960년 전후부터는 일본어 번역문의 피동적 수용 자세를 탈피 하기 위해 독일어 원문과 영문 텍스트를 직접 한글로 옮기는 등의 주체적 수용 노력을 보인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와 기독교 출판은 일본의 신학계와 기독교 출판계의 성과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해방 이후부터는 구미의 신학을 직접 배우고 익혀, 한국인의 정신사와 종교문화에 걸 맞는 번역과 연구 성과들을 출판물로 산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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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이 성서 번역과 지식 전달의 도구로 한글을 사용함으로써 한글을 재인식시키고 더 나아가 한글 공동체를 형성 하는 데에 끼친 공헌을 다루었다. 한글은 창제 이래 “양층 언어”라는 독특 한 언어 상황 속에서 한문의 하위 언어로서의 지위를 한번도 벗어 보지 못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중화사상이 흔들림에 따라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 졌던 한문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여 한글은 국문 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게 된다. 하지만 한글은 현실적으로 국문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고 국한문 혼용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것이 19세기 말 조선의 언어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들은 성 서번역과 문서 출판의 도구로 한글을 과감하게 선택함으로써 한글이 하나 님의 말씀을 전하고 지식을 전달하는 상층 언어로서 인식되는 데에 큰 공 헌을 했다. 한글이 처음으로 유교 경전의 내용을 담던 한자와 대등한 지위 를 부여 받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공헌은 단순히 한글을 재인식 시키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같은 문자 로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공론에 함께 참여하는 한글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볼 때 선교사들은 19세기 말 한글이 국문으 로 탄생되는 시기에 한글의 가치를 재인식 시키는 데에 매우 영향력 있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