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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7

        1.
        2017.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역사적 관점에서 7세기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주요 논쟁점을 살펴본다. 본 연구의 주된 내용은 무슬림들은 기독교인 들이 하나님, 예수, 마리아의 삼신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이슬람을 기독교의 한 분파나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테오도어 바르 코니는 다마스커스의 요한처럼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무함마드를 이단의 두목으로 보았다. 가경자 피터, 루터, 칼뱅도 이슬람 을 이단으로 단정하였다. 무슬림들은 예수의 하나님 되심과 구세주이심 을 부인한다. 루터와 칼뱅은 무슬림들이 예수를 구원자, 중재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다고 보았다. 루터와 칼뱅은 이슬람을 하나님이 범죄한 자기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 사용하시 는 진노의 막대기로 보았다. 루터는 무슬림을 기독교의 대적자로 보았 고, 칼뱅은 이슬람은 거짓 종교(우상숭배)이며, 무함마드는 배교자, 협잡꾼, 악마의 하수인, 그리고 적그리스도로 간주하였다. 새로운 무슬림 전도방안을 제시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대 이슬람 변증의 주요 논쟁점이 무엇인지 우선 인식해야 한다. 이슬람에 대한 공격적인 선교 를 지양하고, 이슬람 선교의 장애물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성경과 유사한 꾸란의 내용을 활용하여 무슬림 전도의 연결고리(bridge)로 활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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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6.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살았던 시대는 조직적인 박해가 있던 시대는 아니 다. 지엽적이긴 하지만 지속적인 박해가 있었고 그 과정 가운데 초기 변증 가들은 기독교 공동체를 수호함과 동시에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올바로 알려야만 하는 중요한 의무가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현실적으로 로마의 정책을 수용 할 수 없는 기독교의 처지에 대해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로마 사회에서 기독교가 이질적인 종교가 아니며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는 종교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했다. ‘높은 윤리성’과 ‘황제를 위한 기도’는 유스티누스가 찾은 해답처럼 보인다. 하지 만 로마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연 이러한 주장이 수용 가능했을까 하는 의 문이 든다. 때문에 유스티누스도 로마가 수용 할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자 기 방어적 목적을 더 크게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동체의 결속을 공고히 하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해로 인해 기독교를 부정하 고 떠나는 배교자들이 생겨나는 것을 막고 확고한 신앙 가운데 기독교인들 이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유스티누스 때처럼 무력을 통한 박해는 오늘 우리 한국 사회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기독교의 위상이 그때보 다 사회 가운데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수많은 기독교인의 증가에도 ‘높 은 도덕성’을 당당히 내세울 만큼 오늘 우리는 사회 가운데 좋은 모습으로 보여 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나 평가를 위해 기독교 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도덕성도 지니지 못한 채 하나님 나 라의 실현을 위해 애쓴다는 것은 헛된 노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7.
        2000.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本稿は南冥曺植の鄕里である嘉縣の板峴洞と南冥の「遊頭流錄」の末尾に出てくる獐項洞及び龍遊洞の位置についての近來の主張を批判的に檢討し,それを考證しようとするものである. 南冥一家の先瑩のある下板里の枝洞を板峴洞とする主張がうらが,當時の板峴洞は特に枝洞を指すというよりは,むしろ今日下板里とよ ばれる地域をあまねく稱したものである.松齋曺繼明は南冥の弟である桓の嫡孫であり,嫡子のなかった南冥は還曆を過ぎてから智異山の德山洞へ移り住もうとした時,承重卽ち祖先の祭祀を奉る責任とそれにまつわる先代の財産を桓に讓ったのであるが,その孫の松齋は壬辰 倭亂の時武功を立てて桓の後孫の中でもっと秀でた人物の一人である.彼は馬藏山の麓に住んだといわれるが,馬藏山は今日の下板村の向こう側にある小谷の終わりに位置する野山である.松齋は南冥の卒する四年前に生まれたので, 彼が幼年の頃馬藏山の麓に住んだとすれば,板峴洞の中心は今の下板村であったと見るべきである 下板村を除いて枝洞を含めた下板理の他の村はみな道路沿いに形成されている.從って, 我 はこれらの村がみな新しい道路の開設とともにできたのであり,完來の板峴洞はその上の方に上板村ができるにしたがって下板村とよばれるようになり,その故にもと板峴洞の中心であった村の名前にちなんでこの一帶がすべて下板里と名稱が變わるようになった,と推定することができる 龍遊洞は智理山のいろんな谷の中でも南冥がしばしば尋ねた所の一つであるが,これについては『晉陽誌』山川條に田頭西, 靑巖山にあると記されている.靑巖山は「大東輿地圖」に見えるが,それは今日の河東郡靑岩面と山淸郡矢川面との境をなしている主山あたりを指すものである. 田頭理とは今の河東郡橫川面の北側にある田垈理がその名前に由來するもので,『晉陽誌』が書かれた光海君ㆍ仁祖の頃にはこのあたりを含めた今日の靑岩面全體が田頭里と五臺里に屬していたようである.『晉陽誌』各里條の說明によれば田頭里は五臺里の南に位置し,五臺里よりその嶺域がはるかに狹かったことがわかる. 龍遊洞は田頭里の西にあるそうだが,問題は 「大東輿地圖」にみえる靑巖山がかえって五大里の北側に屬することである.この點については河受一の『松亭集』に收錄された「遊靑巖西岳記」を見るに,靑巖山とはある特定の山を指すのでなく,靑岩面の範圍に入る山全體に對する通稱であることがわかる.實はその中でも西岳, 卽ち七星峰の稜線がもっとも高く險しいので,その故に『晉陽誌』ではこれを靑巖山と呼んでいたのである.從って龍遊洞は大體靑巖山の麓であり田頭里の西側にあたる現在の明湖里ないしはその北側の坪村里ㆍ中梨里あたりの橫川江一帶を指するのといえる 獐項洞は『晉陽誌』の中のいろんな記述がら見て今日の大源寺溪谷にあり,その溪谷の途中,上流庵の下側より塔洞までにいたる長い谷を指すことがわかる.ここでいう塔洞とは山淸郡三壯面坪村里に今も殘る三壯寺址三層石塔に由來する地名であり,上流庵は今の大源寺あたりにあった寺刹である.だとすれば,當時一般的にいわれた獐項洞とは大源寺の下の方から塔洞にいたる峽谷地帶を意味するのであるが,河松亭は般石のある大源寺の上の方までを南冥の遊んだ獐項洞だと說明しており,溪谷の長さが三十餘里という場合の獐項洞はもっと廣く今日の大源寺溪谷全體を地稱したもの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