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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3.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석성에서 토성으로 개축 시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며, 행주산성을 대 상으로 하였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테뫼식 석축산성-석성 1-으로 축조된 이후 다양한 부 속시설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토성-토성 1-으로 개축되었으며,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석성-석성 3-으로 개축되었음이 밝혀졌다. 행주산성의 석성 1은 덕양산과 서쪽 사면의 8~9부 능선을 두르는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축성되었다. 외벽에는 1~2차례의 수축이 이루어졌으나 적극적인 생활면의 변화는 확인되 지 않는다. 이후 북서벽에 치 1이 가축되었다. 서벽 북쪽의 트렌치 토층을 분석하면 석성 1 외부를 단상으로 굴착한 부분과 외황이 매몰되고 일정 부분 대지가 조성되었다. 보축성벽과 치 2가 가축되면서 북동쪽 성우과 서벽 외부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조성 된다. 성 내부는 구지표를 절개한 후 1열의 내벽이 축조되었다. 이와 연동하여 생활면은 2차 례 정도 높아졌고, 각각의 상면에는 기와와 점토를 혼합하여 다졌다. 이후 남서벽에 석성 2 와 치 3이 축조되었으나 성 내부의 생활면 변화는 알 수 없다. 석성이 폐기된 이후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된 포곡식의 토성이 축조되었다. 북동쪽 성우 의 성벽은 석성 1의 붕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마감된다. 이 부분의 남쪽은 토성벽이 보이지 않다가 동벽에서 토성 1이 확인되는데, 토성으로 개축된 이후에도 석성을 활용하였 음을 알 수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북동쪽 성우와 남동벽에 치가 가축된다. 기저부의 양 상으로 보아 토성 1과 공정상의 차이로 보기 어렵고, 당연히 생활면의 변화가 감지된다. 토 성 2가 축조되는 시점에는 생활면이 상당히 높아졌으며, 성 외부의 지형은 굴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에는 토성이 폐기된 이후 퇴적층 상부에 석성 3이 축조됨으로써 생활면의 변화 를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행주산성은 테뫼식 석성으로 축조된 이후 포곡식 토성, 마지막으로 석성으로 개 축되었다. 이에 연동하여 생활면은 지속해서 높아짐을 알 수 있다. 한편, 토성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성벽을 축조한 이후 유지가 어려우므로 내ㆍ외피 토루 를 설치해야만 붕괴를 방지할 수 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토성 1의 성벽은 초축 당시 최 소 300㎝ 이상이었다. 내ㆍ외피 토루 없이 유지되었음이 밝혀졌으므로 토성에 대한 개념을 재검토해야 하는 자료를 확보하였다. 이 글의 대상인 행주산성 성벽의 구조와 구지표의 변 화는 다른 성곽 조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곽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경 우 성벽의 구조와 더불어 경관의 변천(성벽의 수·개축과 구지표의 변화 등)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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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3.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파주 덕진산성은 임진강 북안에 위치하는 산성이다. 현재까지 6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벽 및 시설의 축조양상을 파악하여 경관의 변화과 정에 대해 살펴보고, 수축에 대한 특징들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덕진1기는 고구려가 처음 덕진산성을 점유한 시기로 북상하는 신라군을 방어하기 위해 임진강유역의 성곽들과 함께 축조하였다. 덕진2기는 고구려 멸망 신라가 덕진산성을 확보 하고, 나·당전쟁 중 전쟁에 이용하기 위해 성벽과 부대시설 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를 실시하였다. 덕진3기는 신라가 북쪽의 방어선을 강화하고, 지방행정을 정비하면서 덕진 산성을 지방행정에도 이용하기 위해 성벽과 시설물을 정비하였다. 덕진4기는 조선시대에 다시 고쳐 쌓아 이용하였다. 덕진산성은 고구려-신라-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성곽이 이용되는 과정이 명확하게 확인되고 있어, 다른 성곽과 비교를 통해 성곽의 축성법과 운영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용 한 자료이다. 분석 결과, 수축을 통해 확인된 특징점들은 ①성벽을 덧대어 그대로 이용하였 다. ②좁은 성 내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노력들이 확인된다. ③성의 운영목적에 따른 구조적 변화가 확인되었다. 시기별로 목적에 따른 변화가 확인되고, 조선시대에는 외 성의 축조를 통해 삼국시대와는 다른 공간활용이 주목되었다. 덕진산성의 시간변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덕진산성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 지 지속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성곽의 운영에 대한 기초자료가 확보되어 다른 성곽과의 비교·검토에 앞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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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23.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Chinese as a foreign language education is one of China's crucial national and governmental strategy. Over the past 70 years of development, Chinese as a foreign language education has made remarkable achievements, but it faces great challenges. In China, the term Chinese as a Foreign Language Education is the last in a series of terms from Teaching Chinese as a Foreign Language to Teaching Chinese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and then to International Chinese Language Education, and in its development has passed from the 1.0 era to the 4.0 era. This article aims to present new goals by examining the achievements and characteristics of Chinese as a foreign language education step by step from the perspective of governance and drawing out their implications, identifying the causes of its development, and forecasting future tasks
        6,000원
        7.
        2023.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챕터는 과거 50년 연구개발정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한국 산업과 경제의 성장과정에서 연구개발정책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조명한다. 1960년 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1970년 대 말까지 연구기반 구축기, 1981년부터 2000년까지 연구역량 축적기, 2001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연구개발 도약기 등 3단계로 나눠서 살펴본다. 연구기반 구축기간 중에는 연구개발 투자의 증가와 함께 본격적인 연구와 우수 연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여러 국책연구기관을 설립하였으며 연구 단지를 조성하는 등 연구기반을 구축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 연구기관의 설립 필요성이 제기되자 주요 분야 연구조직을 KIST 부설 형태로 발족한 후 독립 연구기관으로 분리하는 것이 주요 정책이었다. 연구역량 축적기에는 정부가 연구개발 사업을 기획하여 추진하였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학의 연구 잠재력을 조직화함으로써 연구역량을 축적하였다. 수출 고도화와 수출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향상해야 하는 기업들의 절박한 기술혁신의 필요성에 기인하여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 연구개발투자가 절대규모에서도 세계 5위국으로 부상했고, GDP대비 연구개발투자 비중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이렇듯 연구기반 구축기, 연구역량 축적기, 연구개발 도약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매 20여년의 주기로 연구개발 시스템을 시대 상황에 맞도록 정책을 혁신하여 추진함으로써 오늘에 이르렀다. 과학기술의 혁신은 산업과 기업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정부의 도전적인 연구개발 투자는 정밀한 정책 기획과 추진이 병행되면서 그 효과가 발휘되었고 산업과 기업의 성장을 견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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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2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대륙이동설로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고지자기 및 해저퇴적물 등의 증거들에 의한 해저확장설을 통하여 정립된 판 구조론은, 지각의 운동을 몇 개의 강체 판들이 비록 느리지만 수억 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일어나는 움직임으로 서 설명하였다. 초기에는 지각판의 속도를 주로 수백만 년 동안의 고지자기 역전의 잔류 기록에 의거하여 판들 간의 상 대적 운동으로 추산하였는데, 1980년대 이후에는 우주측지 기법들을 이용하여 현재 시점의 판운동을 직접적으로 조사할 수 있게 되었고, 일부 지역에서 판의 변형이 일어나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다. 본 해설에서는 (1) 초기의 상대적인 판운동 을 나타내는 모델들을 돌아보고, (2) 무회전 좌표계의 이론과 절대판운동 모델들을 요약-기술하며, (3) 판내부의 변형을 포함하는 최근의 모델을 소개하는 한편, (4) 국제 지구 기준계에 채택된 판운동 모델을 간략히 기술하였고, 끝으로 (5) 근 래에 보고된 남미, 남극, 유럽 등 몇 지역과 (6) 한반도 및 동북아의 지각판 움직임 연구를 각각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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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22.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사람들의 도시 이해와 도시의 변화 발전이 교회의 사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왔고 또 교회가 변화하는 도시에 대한 이해와 적응 여부가 교회의 시대적 사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 다. 본 논문은 시대별로 사람들이 관념 속에 있던 도시에 대한 이해와 관점을 사회학적 이론으로 정리하였다. 나아가 그 합의된 도시 이해가 당시 교회들의 사역 방향과 범위에 어떤 식으로 표현 되었는지를 살펴보 았다. 도시 이해에 관한 이론 연구로는 근대 서구 사회학 중에서 도시학 (urbanology)의 변천과 발전 과정 가운데 탄생한 이론들을 주요 해석 적 방법으로 다루었다. 그 결과 근대의 도시 학은 당시 사회와 교회들의 도시에 관한 인식을 적어도 네 가지 단계-공간적, 그룹들의 집합체, 변화의 과정중, 글로벌 네트워크의 일원- 에 걸쳐 변화 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찰스 벤엥겐(Charles Van Engen)의 이론에 기초하여 본 논문은 선교 학의 주요 구성 영역인, 말씀, 교회, 현장 중에서 현장의 이해에 중점을 둔 글이다. 이 논문을 통해 교회들은 자신의 사역 철학이 이 네 가지 관점 중의 어디에 멈춰 있는지를 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5,200원
        12.
        2022.05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 전통민가는 함경도와 평안도, 그리고 만주 지방형을 토대로 다양한 평면구성형태를 구성하고 있 다. 특히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내륙지역과 중-러 국경지역에 산재된 조선족 민가는 두만강, 압록강 등 집중거주지역에 분포된 조선족 전통 민가와는 달리 이문화의 갈등과 동화 속에서 지역특성에 알맞은 공간형태의 변형을 돋보이고 있다. 그 중 띠캉 공간의 출현이 가장 대표적이다. 바닥을 원형으로 조성된 한족, 만주족 전통민가의 단순공간변형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족 전통민가의 띠캉은 마루방을 원형으로 주생활 행위의 계절성 변용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띠캉(地炕) 공간을 중심으로 조선족전통민가의 공간변형과 주생활 양식의 변천에 대한 고찰을 통해 주문화의 전통지속과 농촌주거의 진흥에 도모하고자 한다.
        13.
        2022.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원형점토대토기에서 삼각형점토대토기로의 변천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화는 단연 구연부의 형 태와 제작기법이다. 지금까지 단면형태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지만, 점토대토기 변천 의 요인에 주목한 연구는 많지 않다. 본고에서는 점토대토기의 구연부에 내포된 제작규범과 상징적 의미에 주목하여 구연부의 변천이 일어나게 된 요인을 추론하고자 하였다. 연구 대상은 사천 방지리유적에서 출토된 점토대토기로, 구연부의 제작기법을 분석하여 점토대토 기 제작패턴의 개념을 설정하고 단면형태와 내면형태, 지두흔과 정면흔의 조합을 통해 제작패턴을 분류하였다. 제작패턴은 점토대토기 구연부가 어떠한 의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는지를 보 여주는 것으로, 점토대토기 구연부의 성격을 파악하고 점토대토기의 변화를 이해하는 토대가 된다. 이를 통해 도출된 제작의도에 범형의 개념을 적용하여 분석한 결과, 원형점토대토기와 삼각형점토대 토기의 제작은 유기적이며, 점토대토기의 변화는 구연부 제작방식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점토대토기의 구연부는 제작자, 나아가 집단의 정체성이 표현되는 부분으로,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 가 부여되어 있다. 원형점토대토기는 점토대의 형태를 원형으로 유지하려는 제작규범 하에서 제작되 었으며, 삼각형점토대토기로의 변화 요인은 이러한 제작규범의 약화로, 제작규범의 약화는 점토대토 기 구연부에 대한 제작집단의 관념과 구연부 제작의 편의성에 대한 인식이 맞물려 일어난 것이다. 결 국 원형에서 삼각형으로의 변화는 외래계 요소의 영향이나 이주민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동일 집단 내에서의 변화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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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021.12 KCI 등재후보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5세기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이후 이를 통한 한국어 표 기는 그 명칭을 비롯하여 음운과 형태 등의 여러 부문에서 다양 하면서도 역동적인 변화 과정을 거쳐 왔다. 이러한 표기의 변화는 어떤 일정한 방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한국어 표기법(또는 표기 규범)의 역사적 흐름에 관한 연구는 이러한 변화의 원리를 찾는 데 집중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훈민정음 모음자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자인 아래아(‘ㆍ’)의 표기상의 변화 과정을 기술한다. 이를 위해 한국어 표기법의 역사적 흐름을 문자의 명칭을 따라 훈민정음 표 기법과 국문 표기법, 언문 철자법, 한글 맞춤법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경우에서 문자로서의 ‘ㆍ’가 표기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에 대해 당시 의 표기 자료와 규범 등의 문헌을 통해 분석한다. 특히 문자는 음성언 어를 반영하지만 표기법의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보수성을 지닌다는 점을 고려하여, ‘ㆍ’ 표기의 변화 과정을 문자의 보수성의 측면에서 해 석한다.
        6,600원
        16.
        202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篆刻의 역사는 문자의 형태가 온전하게 갖춰지기 전부터 도기에 문양과 부호를 찍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印材에 새겨지는 주된 문자는 초기 신석기 시대의 부호표기에서 문자 표기로의 이행기를 거쳐 한자의 서체변천 과정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며 형태가 변하여 왔고, 전각의 시대적 요구와 용도의 특징에 따라 내용 또한 변천하여 왔다. 전각이라는 명칭은 印文에 사용되었던 서체가 주로 전서였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붙여진 것이다. 인문의 서체는 당대에 유행하던 전서 서체를 중심으로 갑골문, 금문, 대전, 소전 순으로 변하였고, 이후에는 예서와 해서도 사용되었다. 이는 전각의 용도가 실용에서 신표의 상징, 장식용 및 주술용, 예술적 영역의 표현으로 바뀌면서 인문에 새겨지는 내용 또한 달라졌고, 지역적인 특색의 영향으로 서체형태의 변화와 변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전각의 서체변천은 실용적으로 사용되었던 관인과 사인, 봉니와 건축물의 와당문에서 후대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간략화시키고 쉽게 쓰려는 형태로 변천해 왔음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이는 하대에 이미 인문도의 紋飾에서 도기상의 부호를 새기는 과정에 갑골문이 탄생하였으며, 금문의 자형 또한 은대 청동기문식에서 1.2자가 새겨짐과 동시에 <은새삼과> 에서 서체변천을 주도하였고, 대전 또한 주대의 새인에서 변련과 인장의 형식을 갖추어 방정함을 띠게 되었다. 이후 중국이 통일을 이룬 진대에는 이러한 서체변천과정에서 소전으로 문자 통일을 이룸과 동시에 전각의 제도적 관리가 이루어지며, 인문의 자형이 소전체로 변해갔으나 사인에 있어서는 전 시대의 서체들이 동시에 새겨졌다. 이러한 제도를 계승한 한 대에는 백화만방한 인문서체의 시대를 열게 하여 전서와 예서,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성행하였던 조충서, 수전, 무전 등의 다양한 서체가 사인에서 새겨져 예술적 표현 영역을 확대해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전각이 서예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영역을 차지 하고 있으며, 印工에 의해 금ㆍ은ㆍ동ㆍ옥에 새기었던 시대와 문인들에 의해 석인재에 스스로 각을 하던 시대의 풍격은 매우 차이가 났으나 전각의 인문과 측관, 봉니, 와당문에서 새겨지는 서체의 변천은 한자의 字體연변을 주도했으며, 또한 유행서체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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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02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전각이란 다양한 印材의 인장(印章) 위에 文字를 새기는 예술이며, 이러한 전각의 역사는 먼저 인(印.도장)의 역사와 같이 하였다. 刻(새김)은 인류역사상 의사 표현의 첫째 수단으로 그리거나 쓰기 이전에 인간의 원초적 사고 표현의 흔적이다. 중국의 경우 상공업이 급속히 발달한 전국시대 초기부터는 인의 새김이 유통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인장(印章)의 출현은 고대사회의 경제, 정치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인장은 본래 예술품보다는 신용의 상징물로서 물건을 봉하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점차 시대의 변화에 따라 권력과 지위, 신분을 상징하는 법물(法物)로도 사용되어 지위와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새김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이미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빗살토기, 울주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 등에서 보인 새김은 원시 조형예술의 일단이다. 전각은 단순한 문자의 조합이나 새김의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철학적 사유가 내재한 예술로 미학적 이론체계 를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예술성에서 보면 전각은 새기는 자의 정신과 감정 등이 표출 되는 독특한 미감을 지닌 시각예술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서예 (書), 그림(畵)과 같이 순수한 조형성을 가진 전각을 동양 예술의 꽃이요, 정수라고 한다. 문인 사대부들이 행하는 문인전각의 중요한 점은 서화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성정(性情)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전각은 많은 서화가와 문인들이 인고(印稿) 를 그리고 자각(自刻)을 하면서 문자학적(文字學的) 지식과 문학성(文學性), 즉 전각예술가의 학문(역사, 문학, 회화)적 수양 이 겸비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아울러 기법(字法, 書法, 刀法, 章法)상의 필의(筆意)와 도미(刀味)의 조형 감각이 함께하는 예19-43술체계를 갖추게 된 종합적인 예술이다. 사회문화적 가치로 볼 때 사회생활의 실용적 목적으로 인장을 소지하였던 전각은 문인이 직접 새기고 감상하면서 신표의 기능에서 예술의 기능으로 변화된 시각예술에 속하는 문화예술 콘텐츠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전각예술의 기술성은 특수한 작업방식의 하나로 손과 칼로 파고 뚫고 두드리는 등의 수단을 통해 작가의 주관적 정 취를 미의식과 정감을 담아내어 표출시키는 최상의 예술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인장만을 새기는 공인(工人)과는 다른 차별이 있으며, 방촌(方寸)의 공간에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조형적 시각효과의 예술성이 있다. 첫째, 고대의 새김의 문화적 관점에서 순수예술적 지위로 감성과 창의를 발휘한 사의(寫意) 전각이라고 본다. 둘째, 전각예술은 서예 문인화뿐만 아니라 디자인과 건축양식 분야까지 그 영역이 확대된 종합예술이라 본다. 셋째, 가치 창출을 위한 예술계와 대중이 공유되는 조형적 시각예술의 콘텐츠이다. 전각은 방촌의 공간에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사회구조, 의식과 사상들을 조명할 수 있다. 표현 형식의 다양성과 예술성을 통해 독자적이고 심미적인 예술 장르를 담아내며 공예성이 매우 강한 하나의 종합예술로 자리매김하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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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021.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각형토기(角形土器)는 동체가 팽만하고 좁은 저부를 가진 기형을 중심으로 팽이와 흡사한 형태적 특징을 보인다.‘각형(角形)’이란 토기 명칭은 기형적 특징을 반영한 것으로 남한 내 무문토기의 명칭이 대표 출토지를 중심으로 부여된 점과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명칭 차이는 남한 내 주요 토기가 아니란 인식에 따라 통일된 명칭을 부여할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본다. 본고는 최근 경기 서북부지역에서 각형토기의 출토에 주목하면서 이 지역의 무문토기 출토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 하에 기존 각형토기를 남한의 토기문화유형과 같이 대표적 출토지를 바탕으로‘신흥동식 토기’라 명명한다. 지역 내 전반적인 문화유형 양상을 규명하고자 경기 서북부지역 중 강화, 김포, 검단의 무문토기시 대 취락 현황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김포와 검단은 역삼동문화유형권이며, 김포에서 흔암리식토기의 출토는 부재(不在)에 가까운 점을 확인하였다. 나아가 지역 내 각 토기의 출토 현황, 각 형식별 토기가 단독으로 출토된 주거지 사례 등을 살펴본 결과 지역마다 출토양상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문화유형을 기반으로 이 지역에서 출토된 이중구연토기의 계통성을 확인하고자 토기의 명목형·연속형 속성을 구분하여 검토하였다. 명목형 속성은 토기 구연부 문양을 중심으로 Ⅰ식 토기문 양(이중구연+사선 조합)과 Ⅱ식 토기문양(흔암리식토기)으로 구분된다. Ⅰ식 토기문양은 대동강유역 에서 출토된 신흥동식 토기문양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세분하고, Ⅱ식 토기문양은 이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 문양을 중심으로 세분하였다. 연속형 속성은 이중구연의 길이, 이중구연 두께, 사선길이, 이중 구연 접합부 두께를 중심으로 계측이 가능한 토기 71점을 검토하였다. 경기 서북부지역은 남한 내 북쪽에 위치하며 서해안을 따라 다양한 유입 경로를 갖기에 북한과의 관계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당시 무문토기문화가 단순하지 않으며 다양한 경로의 이주 및 유입으로 인한 혼재된 문화양상을 지녔을 것으로 본다.
        7,800원
        19.
        2021.02 KCI 등재후보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동서교역에 종사하며 문화전달자 역할을 하였던 소그드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주종교로 삼았다. 소그드인들이 숭배했던 나나는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여신이 아니었지만 후대에 소그드인들의 만신전에 포함되어 널리 숭배되었다. 나나여신은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탄생한 여신으로 긴 역사동안 풍요와 다산, 미의 여신이자 도시의 수호여신, 왕권의 수여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나나여신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널리 신앙되었던 인안나-이슈타르와 동일신 혹은 그 후신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본 논고에서는 별개로 발생한 여신으로 보았다. 나나의 가족관계가 인안나-이슈타르와 다른 점, 중기 바빌로니아시대 쿠두루에서 금성의 신 이슈타르와 별도의 신격으로 표현된 점, 그리고 나나의 찬가가 별도로 존재한 점 등이 그 이유이다. 소그드의 여신 나나로서 도상이 정립되기 시작한 시기는 쿠샨왕조시기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헬레니즘 문화가 중앙아시아에 이식되면서 나나는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시벨레, 레아 등의 여신들과 동일시되며 그들의 모습을 차용하여 변모하였다. 쿠샨왕조 시기의 나나도상에는 초생달관을 머리에 쓴 아르테미스형의 나나, 사자 위에 앉은 나나 등이 존재한다. 이후 소그드인이 숭배했던 나나는 쿠샨왕조의 나나와 달리 네 팔이 있으며 성벽관을 쓰고 갑옷을 갖춰 입은 채 사자에 앉은 형상으로 변화한다. 나나는 소그드인의 도시국가인 소무구성 내에서 왕국의 수호신 혹은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 같다. 특히 초라스미아나 펜지켄트 등에서 중요한 신격으로 숭배되었다. 펜지켄트에서 나나는 심판장면, 지옥장면 등과 함께 표현되어 있어 조로아스터교의 신들의 판테온에 유입되면서 내세와 관련된 정체성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네팔을 가진 나나의 형상은 6세기 이후 소그드인들이 인도의 힌두문화를 적극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개념화되고 추상화된 조로아스터교의 신들은 신상으로 제작되지 않았었는데 소그드인들은 인도의 힌두신 도상을 차용하여 새로운 신들의 모습을 창출하였다. 소그드인들은 동서교역의 주역으로 개방적이고 실리를 추구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성향은 그들의 문화 속에도 반영되어 타 지역의 문화적 자극을 적극 수용하여 자신들의 전통과 결합시켜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었다. 나나는 이러한 소그드인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경향을 보여주는 특별한 여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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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누룩이 변하면 양조법은 대부분 변화한다. 누룩은 천연종의 미생물을 증식하기 때문에 제조법에 따라 미생물의 전체상뿐 아니라 그들 사이의 당화·발효력 그리고 산생성능의 조성이 변한다. 그래서 누룩의 긍정적인 변화는 다양한 양조법의 구현으로 나타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제 한받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조선시대 누룩의 변화를 통해 양조법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누룩은 늦어도 13세기에는 크게 만들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매달 거나 마루 위에서 띄웠는데(개방형 병국), 이는 이전의 온돌방에서 밀폐하여 띄운 누룩(밀폐형 누룩)에 비해 (내산성)당화력과 발효력이 증 가하여 사계절 술빚기가 가능해지고 다양한 주품이 만들어져서 화려한 가양주 문화를 꽃피우는 토대가 되었다. 17세기 이후 자본주의 맹아(가 내수공업)가 싹트면서 누룩은 점차 생산성을 위해 온돌방의 시렁에서 만들기 시작한다. 특히 금주령을 거치며 주도적인 제법으로 자리잡게 되고, 제한적인 온·습도 조절이 가능해지면서, 이전 보다 누룩 품질의 균일화와 질적 향상을 이룰 수도 있었지만 실제 누룩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신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누룩의 종류는 축소되고, 지역· 시기·제조자 등에 따라 질적 격차가 커져, 급수율을 높인 시장용(주막 등) 양조를 위해서는 누룩 사용량이 증가하고, 양조법은 갈수록 단순화 되었다. 누룩 제조는 사회·경제적 요인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17세기 상품· 화폐경제의 확대과정(금주법 시대 포함)과 20세기 초 일제의 누룩과 양조법의 변화가 이를 반증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전통주의 추락은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누룩의 후퇴가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므로 누룩의 기초연구와 다양성 회복 그리고 질적 향상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전통주 부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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