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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호서지역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미사리ㆍ가락동ㆍ역삼동유형이 일정 기간 병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세 유형 간 접촉 형태를 분류하고 시간에 따른 문화접촉의 변천 및 전개 양 상을 살펴보았다. 유형 간 접촉 형태는 크게 A, B, C, D의 4가지 타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A 타입은 서로 다른 유형의 요소가 유물 단위에서 결합되어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와 달리 B타입은 특 정 유형의 취락 내 타 유형의 유물이 개별 기종으로 유입되는 경우이며, C타입은 타 유형의 주거 양 식이 유입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A+B, A+C, B+C와 같이 복수의 접촉 타입이 조합되어 나타 나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이를 D타입으로 설정하였다. 문화접촉의 종류로는 교환, 이주, 전파가 있으며 호서지역 청동기시대 전기 세 유형 간 접촉 타입 도 이러한 틀에서 해석할 수 있다. B타입의 경우 도구의 교환, AㆍC타입은 타 유형 주민의 이주까지 도 상정 가능하다. 각 타입이 복수로 나타나는 D타입의 경우에 대해서는 보다 지속적인 접촉 또는 직 접적인 이주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단계별 호서지역 청동기시대 전기 유형 간 문화접촉의 전 개상을 살펴보면, 우선 세 유형이 호서지역 내 유입되는 1단계부터 상호 간 교환ㆍ이주 등의 접촉이 나타난다. 2단계에는 가락동-역삼동유형 간 접촉이 증가하는 한편, 미사리유형은 쇠퇴하면서 주변 가락동유형 취락으로 유입되는 양상이 일부 관찰된다. 이후 3단계에는 미사리유형이 소멸하고 가락동 ㆍ역삼동유형도 쇠퇴하면서 전기 유형 간 접촉 흔적이 급격히 감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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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은 지석묘이다. 그런데, 남해안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으로는 매장 주체부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의 묘역(식)지석묘가 상당수 확인된다. 그리고 묘역지석묘의 평 면형태가 방형과 원형으로 양분되는데 그 선후는 명확치 않다. 이 중 원형의 묘역지석묘 중 성토를 하 여 중심부를 가장 높게 올린 후 그곳에 무덤을 만든 ‘분구묘’가 여럿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분 구묘는 그동안 묘역지석묘의 영역내에서 이해되고 있었으나 분구묘 자체의 지역권, 축조방식 등에서 고유의 양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무엇보다 청동기시대 무덤이 큰 돌(상석)을 올려 주변에 그 존재를 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와 다른 방식으로 수직적인 규모를 확대한 원형 분구묘의 출현은 청 동기시대 사회를 이해하는 또 다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분구묘는 청동기시대 후기 송국리문화 단계의 묘역지석묘의 시작과 확장속에서 같이 공반되는 데, 다만 그 분포권이 남해안과 남강유역이 중심지라는 점에서 송국리문화의 또 다른 문화속성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다만, 이러한 형태의 무덤이 자체발생보다는 북방지역으로부터의 유입 가능성 이 있다는 점에서 상호 관련성을 추가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 분구묘는 원삼국시대 마한이라는 정치체의 주요 무덤양식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청동기시대 의 분구묘 역시 기본적인 개념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동안 원삼국시대 분구묘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기도 하였는데, 청동기시대 분구묘의 인식을 계기로 이에 대한 시각 변화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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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3.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필자는 교차편년으로 설정된 기존의 남한 원형점토대토기문화의 연대와 출현 과정에 오류가 있음 을 발견하였다. 이에 방사성탄소연대를 이용해 기존의 견해와 다른 새로운 연대 안과 출현과정을 제 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현재 학계에 뚜렷한 견해가 없는 원형점토대토기문화의 성격에 대하여도 새로 운 시각으로 접근하여 원형점토대토기문화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남한 원형점토대토기는 BC 12세기 무렵, 비파형동검과 동시에 출현하였으며, 이후 후기 청동기시 대 송국리문화, 역삼동후기문화, 검단리문화 등과 기원전 2세기 무렵까지 장기간에 걸쳐 공존하였다. 남한 원형점토대토기문화 집단은 요동지역‘정치집단’의 이주민이 아니라 청동기시대 조기부터 형성 되어 있던‘요동-서북한-남한’의 네트워크를 통해 남한에 들어온‘청동장인집단’이다. 이들이 남겨 놓은 유적 중‘수석리유적’,‘교성리유적’등은 당시 청동의 원광석을 채광·선광했던 장소로 추정 되며,‘동학산유적’,‘방동리유적’등은 청동을 제련·주조 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이‘청동장인집단’은 재지 사회의 지배층에게 비파형동검 등의 청동기를 제작·공급해서 생계를 유지하던 기술장인들이었으나 점차 정치력을 갖게 되면서 세형동검단계에 이르러서는 당시 사회의 지 배층인‘제사장’이되고, 결국 삼한 사회의 최상위 지배층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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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3.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동기시대 계층사회 연구의 쟁점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과연 청동기시대 계층사 회가 불평등사회인가 아니면 평등사회인가의 문제이다. 두 번째는 과연 지석묘가 청동기시대 지배자 의 권력을 표상하는 상징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청동기시대 계층사 회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검토하였다. 특히, 개인화한 수장사회의 특징으로 알려진 유력개인 대형 단독묘, 귀속지위, 전문 공인, 경제적 재화의 분배 네트워크가 청동기시대에서 확인되는지를 살 펴보았다. 청동기시대 분묘는 군집할 뿐 독립적인 배치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독묘로 인정되지 않 았지만 지석묘, 특히 대형급 묘역지석묘는 대부분 분묘로 조성된 점, 대형 묘역이 1인을 위하여 조성 된 점으로 볼 때 단독묘로 볼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귀속지위는 유아 인골이 출토된 분묘와 연접으로 축조된 묘역지석묘가 유력개인 뿐 아니라 유력집단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청동기시대에 도 귀속지위가 출현한 것으로 제시하였다. 전문 공인과 경제적 재화의 분배 네트워크는 옥·석기·적 색마연토기의 생산과 교역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전문 공인과 경제적 재화의 분배 네트워크 역시 청 동기시대에서도 확인되었지만 전문 공인은 반 전업형의 형태로 파악되었고, 경제적 재화의 분배 네트 워크는 분배가 아닌 교역 수준에 머무른 것으로 파악하였다. 검토 결과 청동기시대 계층사회는 정 치·사회적 측면은 개인화한 수장사회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경제적인 측면은 개인화한 수 장사회로 나아가지 못한 과도기적 양상이라고 생각된다. 지석묘의 공동체적 의미는 비일상적 행위의 반복적 시행에 따른 결과로 보았다. 대형급 묘역지석묘는 수장의 단독묘로서 계층성을 상징하는 분명 한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지석묘의 축조와 의례가 반복적으로 시행되면서 지석묘는‘특별한 것’이 되어 분묘뿐 아니라 묘표석, 제단, 공공 기념물 등 다양한 의미로 확장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지석묘에서 확인되는 공동체적 의미는 분묘로서 수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과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지석묘가 분묘로서 수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인식되었고 그것이 발전하여 다 양한 의미를 갖는 다중적인 개념을 형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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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3.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동기시대 의례 연구는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심도 있는 연구를 해왔고, 학문적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맞기도 하였다.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나 종교적ㆍ신앙적 관점에 기반했 던 의례로부터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절차적ㆍ의식적 관점을 중시하는 의례로 그 비중이 바뀌어 가는 것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고고학에서 의례로 분류된 사례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러나 의례가 갖는 무형적 특징과 유형적 한계 때문에 명제화와 유형화 작업은 수월하지 않다. 그래서 의례 연구에서 유형화는 더욱 중요한 것 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구성요소의 파악과 객관화가 필요하다. 의례 연구의 방법론으로서 무형과 유형으로 대별하고, 장소·설비와 기물·절차적 콘텐츠·구성 원·신념(神, 상징 등)으로 구분하는 시도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앞으로 의 례 연구가 당시 사회현상들과 결부되어 취락사회나 복합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축으로 발전해 가 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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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23.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남강 유역에 위치한 진주 대평리, 평거동, 초장동 등 대규모 유적의 분묘 경관을 통해 취락 안팎의 구조와 상호작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분묘의 가시 경관과 취락 영역 간의 관계를 추론하였다. 이 는 분묘에서 바라본 시각적 체험 경관은 사회구성원들이 일상에서 인식하고 있었던 영역이며, 취락의 정치적·경제적·이념적 영역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가시권분석 결과, 대규모 취락의 가시권은 대체로 반경 5km에 해당하며, 서로 가시권을 공유하지 않는 배타적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통해 국지적 단위공동체는 각기 독립적인 영역을 유지하며 상호작용하는 등질적인 구조 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취락 내부의 경관은 분묘군을 중심으로 차별적이고 역동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분묘의 군집 유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Ⅰ유형은 대형 묘역지석묘 주변에 분묘군이 조영된 것으로, 선대 권력을 상징하는 지석묘 주변에 분묘를 환상이나 열상으로 배치하여 전통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경관 조성 전략이 작용한 결과로 이해된다. 특히 이 분묘군은 취락 안팎에서 상시 체험 가능한 현저한 곳에 축조되어 있어 구성원들의 시선과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는 지배적 경관을 구성하고 있 었다. Ⅱ-1유형은 생활 공간에 분묘를 열상으로 배치하여 이를 매개로 공동체성을 강화하려는 의도 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Ⅱ-2유형은 농경지 경계면에 분묘를 축조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Ⅲ유형은 분묘들의 장축이 상호 교차하는 군집으로, 무덤의 공간 순서 변 경을 통해 사회 질서의 변화를 추구하였던 행위자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군집 유형은 모든 대규모 취락에서 일률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취락 내부의 공간적 맥 락을 통해 볼 때, 분묘는 단순히 매장시설이 아니라, 유력자들이 권력 관계를 합리화하거나 재조정하 고 구조화하는 사회적 행위 공간이었다. 이러한 공간 조성은 각 취락의 물리적 환경과 구성원들의 경 관 해석에 영향을 받았으며, 분묘 축조를 주도하였던 주체들의 공간 구현 전략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 로 나타났다. 남강 유역 대규모 취락의 분묘는 각 사회-공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차별적 경관 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권력과 공동체성을 대표하는 의미화된 장소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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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23.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에서는 방사성탄소연대와 부트스트랩 리샘플링을 활용하여 북한강 유역 청동기 시대의 취 락 규모 및 분포의 변화, 그리고 인구 재조직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3200-2800bp에는 취 락들이 산발적으로 분포해 있다가 2800-2600bp 시기에는 특정 취락들의 규모가 커짐과 동시에 일 부 중소형 취락들의 규모가 감소하는 현상을 파악하였다. 2600-2400bp 시기에는 춘천 중도 유적이 다른 유적의 규모를 압도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이처럼 소수의 취락들이 거대해짐에 따라 중소형의 취락들의 규모가 축소되거나 소멸하는 현상은 북한강 유역의 대형 취락들의 존재가 단순히 자연적인 인구 증가의 결과물이 아니라 당시 지역 범위 내에서 오랜 시간 누적된 인구의 이합집산의 결과물이 라는 점을 방증한다. 그중에서도 춘천 중도 유적은 2600bp이후 북한강 유역에서 가장 거대한 인구 집결지로서 기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춘천 중도 유적의 공간 점유 양상뿐만 아니라, 유구 및 유물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분석을 시행하였다. 각 구역별 점유 기간을 살펴본 결과 취락 규모의 변화와 인구 유입에 조응하여 공간적인 점유 양상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춘천 중도 유적의 경우 인구 규모가 증가함에 따라 주거 구역의 밀집도가 높아지는 한 편, 새로운 중심지가 형성되면서 취락이 공간적으로 팽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유물상에서 가구 간 분화가 선명하게 확인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그간 전제해 온 청동기 시대 사회복합화 양상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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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22.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동기시대 전기의 방형계 주거지는 당시 사회의 가족 구성의 결과물이며, 그 형태적 변이는 가족 의 발달과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세)장방형 주거는 복수의 방형(단위)주거가 병렬적으로 연결된 형태이며, 그 단위주거는 핵가족의 주거공간이라는 추정 또한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이 장단비가 시간성을 반영한다는 관행적 판단에 기초하여, 한 유적에서 공존 하는 장방형 주거지와 방형 주거지의 관계를 단지 시기적 차이로 해석함에 따라 주거의 변이에 대한 여러 요인―가족의 발달에 따른 주거 규모의 변화, 주거의 사용(신축과 증ㆍ개축)과 폐기 등―의 이 해를 저해하는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 극복을 위해, 한강 하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 유적들의 양상을 분석한 기 초자료를 바탕으로 가족 형태와 가구 양상 변화를 연결할 수 있는 고고학적 설명모형을 통해 가구발 달주기에 대한 인식이 한강 하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 양상의 역동적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주거지 간 중복양상이나 절대연대가 모호한 상황에서 주거지 평면 형태에 주목하는 기존의 편년관 안에서는 한강 하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 양상을 역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결합주거지를 고정된 문화적 실체로 파악하고 주거의 형태 차이를 양식적 차이로 이해하기보다는 가 족의 성장에 따른 주거 규모의 변이라는 기능적 측면을 상정해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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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22.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생계경제의 변화에 따라 취락 점유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생 계경제의 전환 과정에서 사용된 도구 중 석기는 다양한 활동에 사용되고, 잔존율이 높아 당시 생계경 제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데 효과적이다. 따라서 경기지역 청동기시대 취락의 생계경제를 살펴보기 위 해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석기도구에 주목하여 지역별, 시기별 조성비의 변화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별, 지역별 생계경제의 차이가 취락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하였다. 경기지역의 취락은 생계경제 전략에 적합한 방식으로 점유 양상이 변화한다. 생계경제의 변화를 검 토한 결과 경기지역은 전기 전반에 복합 생계 활동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세부 지역별로 차이가 있 으나 전기 전반에는 수렵·채집에 사용되는 도구의 비율이 높아 이동 생활의 비중이 높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로 인해 장기 점유의 필요성이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중기에는 생계경제에서 농경의 비중이 증가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기 후반부터 전체 석기 도구 중 농경구의 비중이 증가하기 시작하는데, 중기 단계가 되면 농경구의 비율이 최대로 확인되며 채집 활동과 같은 이동이 필요한 생계 활동은 감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농업 생산물을 증대하기 위해 당시 인구는 장기 점유를 하며 관개시설과 같은 생산 설비와 농지를 관리할 필요성이 증가했을 것이다. 따 라서 농업 생산량 증대에 적합한 점유 방식을 채택해 점유를 이어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가 되면 농경구의 수량이 전체적으로 감소하고 수렵, 채집, 어로 활동에 필요한 도구의 비율이 증가한다. 따라서 농경 중심의 생계경제에서 복합 생계경제로 변화하면서 장기 점유의 필요성이 감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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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22.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단경식동검문화는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를 아우르는 말로 공병식동검문화와 같은 다른 문화권에 대비시켜 한국 청동기문화권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단경식동검문화의 청동기는 동검, 동부, 동경 등이 대표 기종인데, 특히 요서계통 동검 및 다뉴동경 등이 조합되는 유물 구성은 고조선문화권 정치체의 권력 기반과도 관련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고조선문화권의 청동기는 십이대영자문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상호작용의 네트워크가 북방계통 에서 중원계통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조합 관계 역시 일정하게 변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요서계통의 비파형동검문화는‘단순무기(동검)+의기(동경)+공구(동부)’중심 체계이며, 차마구가 중시된다. 세 형동검문화는‘복합무기(동검ㆍ동모ㆍ동과)+의기(동경)+공구(동부)’중심 체계이며, 차마구는 의기 화되거나 감소한다. 이는 정치체의 권력 기반이 변화하면서도 전사와 제장의 상징성을 겸비하는 수장 권의 기본 이념 등은 일정하게 유지되었음을 반영하는 양상으로 이해된다. 단경식동검문화는 청동기의 전개와 수장묘의 변천 양상으로 보아 기원전 9~8세기경, 기원전 6~5 세기경, 기원전 4세기경 등의 시점에서 획기적인 문화변동이 확인된다. 특히 문헌사료와의 비교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고조선이 규모있는 정치체로 인지되는 기원전 4세기경 및 이와 연동되는 기원전 6~5세기경의 정가와자유형 관련 문화변동이다. 최근‘고조선시대론’이 여러 관점에서 제기되었는데, 비파형동검문화의 후기(정가와자유형) 또는 세형동검문화 개시 단계부터 설정하는 것이 고조선사의 보 편성과 특수성은 물론 개설서의 편의성을 모두 고려하는 합리적인 방안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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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21.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영산강유역 청동기시대 분묘는 지석묘로 대표되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그 외 청동기시대 분묘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지상에 노출되어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지석묘의 표지적 특성에 따른 것으로 다른 형태의 분묘는 지하에 위치하여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인지도의 차이가 발생한다. 영산강유역 지석묘는 전기부터 축조되며, 주로 석곽형 구조를 보이지만 최근 석관묘와 유사한 석관형 구조가 많이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영산강유역에서 지석묘 하부구조로 석관형 구조가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송국리문화가 유입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영산강유역은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여러 지역으로부터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는데 중기에는 금강ㆍ 만경강유역의 송국리문화가 호남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영산강유역도 송국리문화의 중심분포권에 포함된다. 분묘 또한 송국리형묘제인 석관묘, 석개토광묘, 옹관묘가 축조되기 시작하지만 지석묘에 비해 활발하게 축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영산강유역 청동기시대 중기의 문화상은 주거지는 송국리문화, 분묘는 지석묘문화를 특징으로 한다. 지석묘의 경우 상징성이 강한 上石은 큰 변화없이 유지되면서 하부구조는 송국리문화의 영향으로 石棺이 적극적으로 채용되기 시작한다. 영산강유역은 지석묘라는 전통 묘제를 기반으로 상당한 결속력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강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영산강유역 지석묘사회라는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점토대토기문화가 유입된 이후까지도 한동안 지속되는데 이후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전통적 지석묘사회는 쇠퇴하고 옹관묘라는 새로운 매장관습을 받아 들여 영산강유역만의 독특한 옹관고분사회로 발전하는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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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21.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동기시대 논 경작지에 대한 연구는 입지와 구조, 그리고 수리 관개시설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다. 논의 구조와 수리관개 시설의 관계를 통한 변화의 모습을 파악하기도 하지만, 입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 논의는 없다. 본고는 논 경작지의 구체적 입지환경을 분석하여 이를 유형화하고 수리관개시설의 변화와 함께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른 시기부터 논 입지는 저습한 지역을 선택하였고, 이의 변화 과정에서 수리관개시설의 설치와 함께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청동기시대 논 경작지는 다양한 조건과 환경을 갖춘 곳을 선택하지만 주로 저습한 지형 모두를 이 용하였다. 특히 충적지형에서는 미세한 지형 조건에 맞추어 입지 선택을 달리하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입지 변화는 논의 구조와 형태, 기술의 진보와도 연관된다. 현재 논의가 분분한 구상과 반구상 경작유구는 전형의 논 등장 이전에 나타난 밭에서 논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경작지로 파악되는데, 그 형태와 구조, 관개의 방식이 초기 경작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후 과도기를 거치고 논 경작지는 점차 완성되는 모습이다. 당연 그 과정에서는 입지환경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입지는 처음에는 완만한 충적지형의 미곡저지를 선택하였는데, 용수의 취득을 우선한 결정이었다. 이후 저습한 환경의 입지를 고루 선택하면서 본격적인 논 경작의 과정을 진행해 간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완전한 형태의 논 경작지 조성보다는 천수에 의존한 경작지 조성을 주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입지 환경을 극복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수리 관개 시설의 등장과 함께 하고 결국에는 논 경작지와 수리관개시설은 완성된 조합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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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020.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국고고학에서 선사시대는 물질문화의 변동을 기준으로, 역사시대는 왕조의 변천을 중심으로 시대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초기철기시대는 선사시대에서 원사시대로 전환되는 시기여서 한 가지 기준만으로 시기구분 하기는 어렵다. 한국 청동기-초기철기시대의 공간적 범위는 무문토기문화의 분포권이면서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가 분포하는 한반도와 요동·요서지역까지이다. 필자는 이를 한국고대문화권으로 설정하였다. 한국 청동기-초기철기시대의 시기구분은 한국고대문화권을 포괄할 수 있는 안이어야 한다. 한국고대문화권에서 청동기-초기철기시대는 기원전 20세기경부터 기원전후경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초기청동기문화, 비파형동검문화, 세형동검문화, 초기철기문화가 차례로 등장한다. 또한 고조선을 비롯한 초기국가들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물질문화의 변동을 기준으로 시기구분하면, 청동기시대 전기는 초기청동기문화가 등장·발전하는 기원전 20~10세기경까지이며, 청동기시대 중기는 비파형동 검문화가 등장·발전하는 기원전 9~8세기부터 기원전 6~5세기(요서), 또는 기원전 4세기(요동과 한반도)까지이다. 청동기시대 후기는 전국시대의 중원계 물질문화가 대거 들어오면서 요서의 십이대영 자문화가 크게 변화되고(기원전 5~4세기), 이어서 요동과 한반도에 세형동검문화가 등장하는 때(기원전 3세기 초)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기원전 3~2세기에는 전국시대 중원계의 초기철기문화(세죽리 -연화보유형)가 들어온다. 고조선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중국 사서에 그 존재를 뚜렷하게 드러낸 것은 청동기시대 후기인 기원전 4세기경부터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는 고조선을 시대 명칭으로 병기 해도 좋을 것이다. 초기철기문화가 들어오는 기원전 3~2세기에는 고조선은 물론 부여와 삼한 등의 초기국가들이 대거 등장하는 시기이므로 초기국가들을 대표하는 고조선을 시대명칭으로 사용하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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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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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구분은 사실상 해당 시기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차이에 대한 이해를 망라한다. 우리 청동기시대 전기와 중기의 구분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수)량의 변이로부터 확보되는 고고학의 시간성과 사회경제적 변화가 일치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종종 편년작업을 진퇴유곡의 상황에 빠뜨리기도 한다. 사회경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춰 기존 분기의 결함을 극복하려는 시도에는 그런 곤란한 상황이 반영된 듯하다. 본고는 그러한 곤란을 유발시킨 우리 연구관행의 문제, 사회경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춰 분기를 조 정하려는 최근의 시도가 배태할 문제 등을 지적한다. 아울러, 그간 축적된 청동기시대 전-중기 전이 과정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생산적인 후속연구로 이어갈 방안을 모색해본다. 그러한 모색의 일환으로 청동기시대 전-중기 전이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방면의 변화가 지역적으로 얼마나 상이하게 나타났는지를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 청동기시대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이론적 탐색의 기초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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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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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은 피장자의 사회적 위치를 함축하고 있어 취락연구와 함께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에 따 라 부장유물의 형식편년이 아닌 양식편년을 통해 무덤 편년 체계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부장유물의 형식편년을 통해 무덤의 편년을 했다면, 본고에서는 양식의 편년방법인 석촉과 석검의 순서배열보충법을 통해 동일문화권으로 평가하고 있는 대구지역 무덤 유구의 시간성을 검토하였다. 대구지역 청동기시대 무덤은 석촉·석검의 새로운 형식이 많이 출현하는 단계를 기점으로 하여 총 Ⅰ·Ⅱ·Ⅲ·Ⅳ기로 구분되어진다. 이를 통해 무덤의 변천을 살펴 획기에 따른 양상을 살폈다. 그 결과 Ⅰ기는 무경식석촉과 유구식석검, 유절식석검이 공반하며 재지계 계통 무덤이 축조되었다. Ⅱ기는 무덤에 송국리문화가 유입되는 시기로 송국리형묘제와 함께 무경식석촉과 유구식석검의 부장 은 소멸되고 평근이단경식석촉, 첨근이단경식석촉, 일단병식석검의 부장이 확인된다. 또한 혼축조평 수적식 석관묘와 구획묘가 등장하면서 후기의 사회로 진입한다. Ⅲ기에는 첨근일단경식석촉의 부장이 확인되기 시작하고 판석조평수적식 석관묘가 축조되기 시작한다. 또한 연접된 구획묘의 축조가 증가 하면서 피장자 간의 위계 차이가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Ⅳ기에는 이전시기 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무덤의 축조가 대폭 증가한다. 특히 혼축조평수적식 석관묘의 증가와 함께 석촉 제작의 단순화가 극대화된 능형식석촉이 공반하고 석검은 석검이 가지는 위신재로서의 성격이 가장 잘 반영된 석검 일단병식 Ⅳ식이 공반된다. 따라서 대구지역의 청동기시대 무덤 사회는 Ⅱ기에 송국리문화가 유입되지만, 재지계 무덤의 강한 전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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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2020.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신석기시대부터 통시적 관점에서 청동기시대 조기의 사회형태를 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신석기시대 조기~전기의 복합수렵채집사회에 대한 논의, 신석기시대 후·말기 양상, 청동기시대 조기의 취락·농경·석기·청동기 양상, 돌대문토기문화의 기원지로 여겨지는 마성자문화의 양상을 살 펴보았다. 그 결과, 신석기시대 사회는 수렵채집어로를 바탕으로 기후 및 자연환경에 따라 사회규모와 형태를 변형시키는 유연성을 갖춘 사회였음을 확인하였다. 신석기시대 조기~전기는 복합수렵채집사회의 특 징을 보이나, 말기에는 기후악화에 따른 생업환경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생존 전략을 구사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말기는 평등사회의 범주에 포함되나 취락이 가족단위로 이루어진 소규모 분절사회의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청동기시대는 농경사회를 바탕으로 사회복합화가 가속화되는 한 방향의 길을 걷게 된다. 조기 사회는 완만하지만 서열사회를 경험한 이주 농경민에 의해 형성되었고, 정착 및 잉여가 발생할 수 있는 토대가 갖추어진 사회였다. 그리고 가족단위와 친족단위의 분절사회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리더(리더를 포함한 집단)는 권위 표출이 제한되거나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이 제도화되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전기이후 농경사회의 생업과 제도가 확산되면서 비혈연을 기반으로 한 지역집단이 형성되고, 지역집단 통할과 공동체 통합을 위해 취락 내와 취락간의 서열 발생이 가속화된다. 점차적으로 청동기, 지석묘 등의 장치를 통해 집단 내 서열은 더욱 공고해지고 제도화되면서 수직적 사회 분화가 심화된다. 이상으로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사회는 연속적으로 점진적으로 한 방향으로 변화·발전하는 과 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석기시대 사회형태는 수렵채집이라는 획득경제 하에서 각 집단의 선택의 결과로 다양하게 나타나며, 청동기시대 사회는 도작농경이라는 생산경제 하에서 집단 통할과 공동체 통합을 위해 사회복합화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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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019.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국의 청동기시대 연구에 있어서‘이주’는 피해 갈 수 없는 주제이다.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전환기 이후 한반도 남쪽에서 새로운 문화요소가 등장하게 된 과정에는 주민의 이주가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며, 이주민의 실체나 기원지에 대한 고찰이 없이는 당시의 문화변동에 대한 설명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청동기시대의 이주가 이렇듯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연구에서 이주 현상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다소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고, 연구의 틀이나 대상 자료가 적절 하지 않게 사용되었던 측면도 분명히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청동기시대 연구자들이‘이주’라는 현상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서구 학계에서 그동안 진행되어 온 이주 관련 논의 및 사례연구를 기반으로 고고학 자료상에서 이주의 과정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특정 문화요소가 아닌 문화(유형) 그 자체를 이주 집단과 연결시키는 접근방법의 문제점을 확인하였다. 또한 주거지, 무덤, 토기가 거주자의 정체성과 어떠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지를 검토하고, 이러한 고고학 자료를 통해 이주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할 경우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전환기 이후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났던 주민 이주 과정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자‘2열 기둥 주거지’의 건축양식 및 공간구성에 주목하고, 그것이 왜 이주를‘실증’하기에 좋은 문화요소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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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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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락고고학에서 주거지의 동시성을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유물 과 유구를 총망라한 양식 편년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기존의 토기의 문양이나 주거지의 형식을 통하여 청동기시대의 시기와 단계를 설정하였던 관습에서 벗어나 문양, 무문토기 壺, 淺鉢, 적색마연토기의 壺ㆍ甕ㆍ鉢, 內彎口緣甕, 底部의 두께, 胴 下半部 의 傾斜度 등의 器形과 또 석촉과 有溝石斧, 반월형석도, 방추차 등의 형태적 차이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주거지와 수혈에서의 공반상을 통하여 순서배열보충법으로 양식을 편년하였다. 그 결과 110개의 유구에서 51단계의 시간적 차이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단계는 너무 세분된 편년이라 취락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각 단계에서 새로운 형식이 출현하는 경향을 살펴 9단계의 획기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점토대토기 단계에 발견할 수 있는 유물들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점토대토기 단계 직전의 재지계 유물의 변형으로서 先粘土帶土器文化(청동기시대 晩 期)를 설정할 수 있었다. 이 획기를 통하여 지좌리유적의 취락상은 협곡에 입지한 주변 취락으로 타 공동체와의 교류가 적어 전통문화의 존속기간이 긴 다소 폐쇄적인 성격을 밝힐 수 있었고, 청동기시대 전기ㆍ후기ㆍ만기의 문화가 혼재함을 알 수 있었다. 지면 관계상 차후에는 이 편년을 이용하여 지좌리유적 Ⅰ~Ⅸ기(기원전 1100년~550년 전후)의 취락 변천 과정을 살펴서 그 시대상을 복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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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1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에서는 대구·경북지역 청동기시대 무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지역 내 전개과정을 검토해보고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 사회의 변화상에 대해 유추해보고자 하였다. 선행작업으로 우선 통·공시적 범위를 설정할 필요성이 있으므로 무덤 내 부장유물 가운데 가장 보편화 된 적색마연호·마제석검·마제석촉에 대한 형식분류와 이들의 조합관계를 통해 일정한 시간대(청동기시대 전기 후반 / 중기 전반 / 중기 후반 / 후기)를 구성하였으며, 또한 산·수계와 같은 자연 지리적 요소와 지역 내 무덤의 분포양상을 함께 검토하여 모두 5개의 소지역권을 설정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지역 내 무덤의 구조적인 변화양상과 함께 단계별 전개과정을 통해 청동기시대 사회발전에 따른 지역사회 변화의 일면을 관찰해보고자 하였다. 검토결과, 지역 내 무덤(군)은 자연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군집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는 가운데 내부적으로는 중심무덤과 주변무덤의 배치 및 구조에 따라 차별화 현상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각 속성들 중 묘역의 규모(대형→소형>중형>대형), 매장주체부의 위치(지하→지하·지상), 개석 의 형태(단차개석→다중개석), 관·곽의 축조방식(단일석재사용→석재혼용), 시상의 형태(단판석→다판·할 석), 유물의 부장(다종→일종부장, 적색마연호 : 관내 모두→관내 단벽 / 석검 : 관내 모두→관내 중앙, 관내 부장多→관외부장多)에 있어서 일정한 변화의 흐름을 확인하였다. 다만 변화의 방향이 시간성을 바탕으로한 일률적인 모습이 아니라 지역 내 사회 발전에 따라 집단(지역) 나름의 다양한 수용 및 정착과정으로 인해 각기 다른 형태로 표출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송국리 문화를 매개로 한 집단과 울산·경주·포항을 중심으로 한 검단리 문화를 경험한 집단의 지역 내 정착 과정은 이들 서로 간의 문화가 다양한 환경 및 사회적 요인을 바탕으로 한 선별적 필요성에 따라 수 용되면서 경주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송국리형 묘역+검단리형 장법과 같은 형태의 결합형 구조가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각 집단 상호간의 노력이 다양하게 유지·발전하면서 보다 점진적인 형태로 사회통합의 과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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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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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지역 청동기시대 종말기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검단리유형의 마지막 단계 유적과 초기철기시대 유적을 검토하여 울산지역의 양상이 한반도 다른 지역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검단리유형은 새롭게 유입된 점토대토기문화와 함께 와질토기 등장시점까지 존속한다. 울산지역은 지역적인 특성상 한반도 점토대토기의 종착지이다. 달천철장에서 알 수 있듯이 철광상을 발견하여 이용하였으며, 그 철을 매개로 낙랑, 일본 등과 활발한 대외교류 활동을 하였다. 점토대토기인의 생활터전이 이미 무문토기인들의 점유지였던 것으로 볼 때 양 집단의 갈등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다고 할 수 있다. 무문토기인들이 와질토기 등장시점까지 원래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점토대토기문화를 자연스 럽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청동기시대의 유구라고 인식하였는데 실제 초기철기시대에 존속하였던 것이 많 을 것이다. 초기철기시대의 청동기시대적 요소는 목관묘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완전히 소멸한다. 이때야말로 청동기 시대 종언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이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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