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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15.0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지금까지 도산의 교육사상에 관한 연구는 주로 겉으로 드러난 행적과 업적을 바탕으로 평면적인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도산의 모든 활동을 넓은 의미의 교육활동으로 보고 그러한 운동을 가능하게 한 내면의 교육사상, 즉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을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하여 20세기 이후 현대의 진보적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듀이의 교육관을 기본적인 틀로 사용하고자 한다. 듀이는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을 집대성했을 뿐 아니라 그 사상을 토대로 진보주의 교육운동을 주도했으며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 중 38세(1897년)에 작성한 ‘나의 교육신조(My Pedagogic Creed)’는 비교적 초기에 자신의 교육관을 5개 영역으로 나누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신념을 피력하는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그 5개의 질문은 ①교육이란 무엇인가? ②학교란 무엇인 가? ③교재란 무엇인가? ④교육방법이란 무엇인가? ⑤교육과 사회진보 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다. 그리고 1916년에 출판된 민주주의와 교육은 모두 26장(chapter)에 걸쳐 새로운 교육이 추구하는 방향과 과제를 전통적 교육과 대비하여 폭넓게 논술한 대표적 저작으로 그의 교육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도산의 교육관을 듀이가 제시한 5개 영역을 기본 틀로 하여 듀이가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는 새로운 교육 관에 비추어 분석해 봄으로써 도산 교육관의 본질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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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2015.0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도산 안창호(1878~1938)와 소앙 조용은(1887~1958)은 한국 근대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안창호가 글쓰기보다는 대중 연설과 대중의 조직을 결성하고 이끌었던 실천적 행동가 유형이었다고 한다면 조소앙은 운동의 이론적 체계 확립에 중점을 두었던 학자풍의 이론가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연배의 차이도 있고, 성장환경과 학문적 배경이 달랐다. 그리고 중국에서 함께 활동하기 이전에는 미국과 유럽의 문물을 경험했다는 점도 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20년대 이후 중국이라는 이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전개했다. 그들은 대한 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이라는 민족주의적 독립운동 조직 내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1920년대 후반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면서는 서로 뜻을 같이 하였다. 이때 두 사람은 좌우익의 이념적 대립을 해소하고 통일적인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념과 주의의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안창호는 대공주의를,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내세웠다. 필자는 이미 조소앙의 생애와 삼균주의에 대해 연구한 바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 자체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안창호의 대공주의나 다른 사상체계와 비교하는 작업에는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안창호의 대공주의와 조소앙의 삼균주의의 관련성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미처 참고하지 못했다. 따라서 1930년대 초 조소앙에 의해 체계화 된 삼균주의를 안창호는 대공주의라는 용어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사실만 지적했을 뿐, 대공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에 양자의 구체적 관련성을 조사하거나 양자를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안창호의 대공주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나 안창호의 대공주의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직접적인 자료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대공주의를 어떻게 기억하고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연구에서 안창호의 대공주의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를 밝힌다. 그리고 대공주의가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어떤 관련성이 있 다고 이해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대한 필자의 연구를 토대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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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9,200원
        24.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안창호와 사회주의’라는 이 글의 주제는 아주 작은 두 개의 단서에서 출발했다. 그 하나는 『주간조선』 1719호(2002년 9월 5일)에 실린 「[발굴 특종] 77년 만에 밝혀지는 ‘모함 투서’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마지막 독립 운동을 하던 1925년 당시 소련 공산당과 연계가 있다고 모함한 한 투서로 미 정부 당국의 감시 대상 속에서 심문과 가택 수색까지 당한 사실이 77년 만에 처음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이 기사는 특종이 아니다. 안창호가 ‘공산주의’ 관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 사실이 처음으로 등장한 자료는 《신한민보》1925년 6월 25일자의 「안창호씨도 쏘비에트주의자라고」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볼셰비키주의를 선전하므로 미국 법률에 범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김산(본명은 장지락)이라는, 당 시로서는 무명에 가까운 조선인 혁명가의 삶을 그린 책으로 유명한 『아리랑』에도 “1924년(1925년-발표자)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자택에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검거 되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음날 석방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따라서 1920년대 중반부터 이미 안창호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는 이야기는 민족 운동 전선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 안창호의 측근 인물도 한 좌담회에서 이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다른 하나의 단서는 김산이 제공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안창호는 “이 제까지 받은 영향 중 두 번째로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그런 안창호에 대해 김산은 “손문과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중국의 복잡다단한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맑스주의로 전향함과 동시에 안창호는 공산주의 이론과 전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창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한국 공산당을 반대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평가했다. 안창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산당’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 주목된다. 주지하듯이 김산은 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로, 그리고 다시 무정 부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 운동의 노선을 바꾸어 나가면서 일제와 투쟁한 인물이다. 민족 운동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두루 섭렵한 뒤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된 김산이 안창호를 ‘반(反)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별로 큰 의미가 없을 것도 같은 이 두 단서에서 출발해 안창호의 또 다른 측면 곧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과의 관련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안창호는 분명히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1920년대 이후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 로서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 운동 전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운동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안창호였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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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독립운동 시기에 도산 안창호(1878 - 1938)만큼 활동한 기간이나 범위가 넓었던 지도자는 드물다.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이래 1938년 서거할 때까지 일관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국내를 비롯하여 연해주와 미주지역·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민회와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등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한국근대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안창호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으로 선출된 이래, 국무총리 대리를 겸직하면서, 1921년 5월 노동국 총판을 사임할 때까지 2년여동안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는 임시정부 수립 초기로서, 임시정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물론이고, 사실상 행정수반이나 다름없었던 안창호의 역할과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안창호와 관련해서는 그의 활동과 사상을 비롯하여,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한 실 상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연구업적이 발표되었다. 이를 통해 안창호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체제를 정비하고 활동한 내용을 비롯하여, 통합정부를 수립한 과정들이 상당히 밝혀졌다. 이 글은 이러한 선학들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안창호와 임시정부의 관계, 그 중에서도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이해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내무총장으로 조직과 활동기반을 마련하여 임시정부를 출범시키고, 국내외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의 통합을 실현한 과정, 그리고 임시정부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원인과 그가 임시정부를 떠난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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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도산 안창호의 일생을 살펴볼 때 나타나는 큰 특징은 전 세계가 독립 운동의 무대였다는 점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그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이 세상 끝까지라도 방문하고 일을 성사시키고야 말았다. 도산은 전 세계를 遊歷하였지만 장기간에 걸쳐 머물면서 사업을 진행한 곳은 미국과 중국․러시아를 제외하고 멕시코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17년 10월부터 1918년 8월까지 10개월가량 멕시코 전역을 순행하면서 한인들을 위무하고 한인사회에 독립운동 활기를 불어 넣었다. 안창호는 도산 개인의 자격이 아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이라는 공적인 직함을 가지고 멕시코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10년 대 해외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단체는 대한인국민회였다. 1909년 2월 국민회가 창립되면서 미주 본토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 방총회를 설치하였으며, 시베리아와 만주지방에도 지방총회가 조직되어 대한인국민회는 무형의 정부로서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멕시코에도 1909년 4월 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조직되면서 한인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기관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지역의 한인들은 국민회를 중심으로 상호단결하여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나가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멕시코지역 한인사회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단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한인들 의 경제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지 못했다는 점이며, 멕시코 국민회에는 절대적인 지도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멕시코 이민자들 가운데 지도적인 지식층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한인사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력이 빈곤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미주의 국민회에 지도자를 갈구하였지만, 중앙총회에서도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주지 못하였다. 이같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한인들은 국민회 중앙총회에 의무금․가옥채․기계채 등을 보냈고, 동맹저축, 애국동맹금 등한 각종 특별 의연을 거두었다. 3․1운동 기간에는 메리다지방회 소속의 한인들이 1919년 12월 1일까지 중앙총회에 ‘21례’와 인구세 등을 합쳐 약 1천 달러가 넘게 보냈다. 이같이 멕시코의 한인들이 미주의 국민회와 각종 독립운동 사업을 후원할 수 있었던 데는 안창호의 순행이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요컨대, 멕시코 한인사회가 단결되고 독립운동을 후원할 수 있는 배경에는 국민회의 실제적인 지도자인 안창호가 짧은 기간이지만 순행을 통해 한인사회를 단결시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창호의 방문을 통해 멕시코 한인들은 국민회를 중심으로 단결되었으며 한인사회를 안정시키고, 나아가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는 점에서 멕시코 한인사 및 독립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안창호의 멕시코 순행에 대해서는 별다른 연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크게 평가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안창호의 멕시코 순행에 대한 자료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그 성과와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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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호형호제’(呼兄呼弟) 관계를 유지하며 일제하 민족 독립운동 현장에서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하였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9)와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1882-1931) 사이에 이루어진 구체적인 만남과 협력, 동역의 역사를 살펴보고 두 사람의 우정과 동역 관계를 가능케 하였던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공유가치(common value)가 무엇인지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두 사람의 관계사를 살펴봄에, 해석의 생애를 중심으로 도산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방법을 취할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에서 도산에 대한 것은 자료 발굴이나 연구에서 상당한 수준을 이루었으나 상대적으로 해석에 관한 연구는 초보적인 단계임으로 어느 정도 일반적인 상식처럼 이해되고 있는 도산의 생애와 활동을 염두에 두고 해석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도산과 해석 두 사람은 나이에서 4년 차이가 나지만 출신 배경과 살았던 시대 환경이 같았고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쳐 기독교 신앙을 습득한 후 항일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던 관계로 공통되는 부분이 많다.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사와 교회사, 세계사 맥락에서 두 사람의 생애를 비교하여 살펴보면(<부록> 참조) 도산과 해석은 평남 강서지역의 선비 집안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기독교를 통해 신학문을 접하고 근대화 흐름에 동참하였다는 점, 일제의 침략과 지배 현실에서 현실에 순응하기보다는 저항의 논리로 항일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점, 삼일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 동참하여 독립운동 진영내의 갈등과 분열 요인을 치유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임시정부활동을 포기한 후 생애 후반을 흥사단 활동과 독립운동 기반으로서 이상촌 건설을 위해 노력한 점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결국 도산과 해석은 종교적으로는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기독교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변절하지 않은 ‘동지’(同志)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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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도산 안창호(1878~1938)와 남강 이승훈(1864~1930)은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대표할 만한 거목들이다. 이들은 모두 평안도 출신이지만 그 명성과 영향은 전국적인 것이었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표(師表)로 기억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남강이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도산이라 알려져 있다. 신민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같이 활동했으니 도산과 남강이 ‘친밀’ 한 관계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어떻게 ‘친밀’했는가를 따지자면 조금 막연해진다. 물론 그에 대한 전기나 연구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지만 구체적 자료를 통해 이 점을 밝혀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것은 도산에 대한 연구에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는 두 사람이 모두 관련된 인물과 단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두 사람의 직접적인 접촉을 보여주는 믿을 만한 사료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도산과 남강의 첫 대면 시기를 짐작해본 뒤 이어 오희원․오치은 두 사람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이야말로 도산․남강과 함께 여러 단체에서 이들을 도우며 적극 활동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단체인 서우학회․서북학회, 대성학교․오산학교, 신민회 등을 검토하겠다. 이들 각각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이 글에서 새롭게 밝혀낼 부분은 거의 없다. 대신 이 글의 초점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입증하는 데 맞춰져 있으므로, 다소 장황하고 번거럽더라도 이런저런 자료들을 많이 인용․제시하려 한다. 이 점에 대해 독자의 이해를 바란다. 부디 이 글을 통해 그 동안 도산․남강에 대해 작은 부분이라도 새롭게 드러난다면 더없는 다행이겠다.
        6,400원
        30.
        200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도산 안창호는 한민족의 근대화를 지도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한 선구자이며,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한민족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투쟁방략을 세워 조직적으로 지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리고 근대 민족 국가 수립의 그 날을 목표로 대립과 갈등을 통합의 논리로 풀고 조직을 활성화한 정치가였으며 민주주의 국민의식을 고취시켜 독립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구성분자로서의 중견의 인물 배양에 힘쓴 교육자였다. 이처럼 다양한 삶 중에는 경제적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했으며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존재를 알려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 임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며 신문, 잡지 발간과 언론 홍보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소식을 공유하고자 했다. 도산 안창호 그는 한마디로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대계를 한 몸에 짊어진 인물이다. 수난의 시대에 고단한 삶을 살았던 그 무게만큼 오늘날 도산은 한국사의 큰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도산의 활동을 시대 구분해 보면 제1기는 1896년 독립협회 활동, 제2기 1903~1906년까지 의 미주에서의 민족운동기, 제3기는 1907년 신민회 결성과 구국운동기, 제4기 망명한 이후 재러한인사회에서의 활동기, 제5기 미주 대한인국 민회, 흥사단활동, 제6기 1919~1932년 중국에서의독립운동기, 제7기 일제에 피체된 후 국내에서의 활동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도산의 활동은 지역 및 시기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어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도산을 평가할 수 없다. 도산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산활동의 주요점은 독립운동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궁극적으로 근대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준비운동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추진하였던 도산의 활동과 운동을 혁명운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도산을 개조론자로 명칭하고 특히나 일부 도산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에게 ‘개량주의자’로까지 폄하되어 있 는 실정에서 도산과 혁명운동을 연관 짓는다는 것은 다소 낯선 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도산은 자신을 혁명가로 자처하였고 끊임없이 변혁을 추구했던 자신의 활동을 혁명운동으로 규정한 바 있다. 본 연구는 도산의 독립운동을 그의 혁명관과 연관하여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초반으로나누어 살펴보고자 있다. 이 시기는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면서 미주에서의 문화운동에서 전환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상해에서의 도산의 활동은 이제까지 독립운동사상에서 볼 수 없었던 혁명적 활동이었으며 이러한 도산의 혁명운동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나 살펴보고자 한다.
        10,400원
        31.
        200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島山安昌浩(1878~1938) 선생은 교육자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 섰으며,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 독립의 방략을 다양화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민족운동가로서, 그 운동의 기반으로서 도덕적 가치를 우선했으며, 운동의 방략도 급진적이거나 과격한 것을 피하고 점진적인 것을 중요시했다. 그는 각종 운동을 주도하면서 개인적인 인격의 성숙을 전제로 조직력을 중시했으며 따라서 그의 운동은 개인의 인격 연마와 함께 동맹수련을 강조하여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민족을 중시한 민족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를 세계 평화 에 기여토록 해야 한다는, 말하자면 세계화를 지향한 지도자이기도 하 다. 2005년 8월,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도산 선생을 지목 했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이 달에 도산 안창호 선생을 이달의 독립 운동가로 지목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지금까지 지내온 한국 민족의 진로를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데는 도산 선생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미래의 진로와 관련, 앞으로 한국 민족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도덕적인 수준을 높이고, 민족적으로는 통일을 이룩해야 하며, 세계사적으로는 세계평화를 지향하면서 한국 민족이 바로 그 세계사적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의 진로를 이런 관점에서 풀이할 수 있다면, 거기에 부합되는 지도자를 독립운동사에서 찾는다면, 바로 도산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선정했을 것으로 본다.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선학들의 연구와 저술이 있다. 이 시기에 ‘도산 선생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다소 진부한 제목으로 그를 되돌아보는 것은 광복 60주년이라는 환경에서 그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변화될 수 있겠지만,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지 않는 한 그 인물에 대한 평가는 기존의 연구를 크게 뛰어넘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이 글도 새로 정리한다는 것 외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 선생의 생애는 그 활동 지역이 넓고 그 활동 영역 또한 매우 다양하 다. 때문에 그의 생애와 활동을 단순화시켜서 언급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이 글은 도산 선생의 생애를 그 시기를 따라 평면적으로 언급 할 것이기 때문에 다소 연보적인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좋은 충고를 기대한다.
        6,900원
        32.
        200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000원
        33.
        200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5,700원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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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호에 대한 연구는 과거 자료의 한계 등으로 인해 교육자, 조직 운동가, 준비론자 등의 단면적인 접근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다량의 해외소장자료의 국내입수 및 자료에 대한 해석으로 인해 일제 식민지하 독립운동의 지도급 인사로 어떠한 사상을 견지하고 활동을 벌였는지에 대하여 총체적인 분석을 하는 상황으로 연구경향이 발전되었다. 안창호의 대표적인 활동은 국내외에서의 정치 조직결성과 운용,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으며, 민족내적으로는 지속적인 조직활동을 통해 단결을 도모했고, 대일전선에서는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의미에서 광의의 ‘政治’ 를 차용하여 안창호의 정치가로서의 면모와 정치관의 분석을 통하여 그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안창호의 사상 형성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견해를 일거에 버리지 않고 기존의 것을 기반으로 새로이 체득한 내용을 반영하고 보완하는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상황, 장소, 대상에 따라 발언의 수위와 내용도 다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발언과 행동을 전체적으로 평가해 보면 굴절을 보이기보 다는 오히려 일관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과연 안창호는 어떠한 사상을 견지하면서 정치활동을 해 나갔는지, 또 현재의 안창호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짚어보고 향후 그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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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 안창호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당일 상해에서 피체 되어 국내에 압송된 이래 1938년 3월 10일 숨을 거둘 때까지 6년 가까운 기간을 국내에서 보냈다. 그런데 신민회운동기나 미주활동기, 상해시기와 달리 그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인 일화로만 전해질 뿐이다. 물론 투옥과 일제의 감시 속에서 뚜렷한 활동을 벌일 수 없었지만, 도산의 말년은 60평생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되짚어 보고 민족운동 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구상을 가다듬는 시기였다. 또한 지역감정과 같이 도산의 활동을 둘러싸고 제기된 해묵은 문제들이 다시금 부각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에 여기서는 도산 말년의 국내 행적과 관련된 단편적 자료들을 하나로 정리하는 가운데, 민족운동에 대한 그의 마지막 구상이 무엇이었는지, 어떠한 문제들을 놓고 힘겨운 씨름을 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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