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해방 후 남한의 정치·경제·사회적인 시대상황에 따라, 다양한 통일론에 대한 조사와 개관 그리고 평가를 그 내용으로 하며, 그 가운데서 기독교인들의 참여를 추적한다. 특히 죽산 조봉암을 중심으로 한 평화통일론의 배경과 의의를 살피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대체로 38선 철폐운동, 미군철수반대운동,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휴전반대운동과 북진통일론을 전개하여 왔다. 이러한 통일론은 한국사회의 전쟁경험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이로 인해 이승만의 독재를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기독교에는 또 다른 통일담론 즉 평화통일론의 흐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봉암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시기적으로 너무 앞서고,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섣부름도 있었지만, 그가 간첩으로 오인 받고,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소리높인 평화통일이라는 구호는 이후 진보적인 기독교인들과 정치인들의 목소리로 발전하였다.
해방 후 기독교가 남한에서의 통일담론 발전에 있어서 다양한 구조와 논의를 전개하였고, 그 결과 일정한 사회 통합의 역할을 하였음을 밝히기 위하여 본 논문은 각 종 신문과 전기 및 선언서 등을 참조할 것이다. 아울러 신학적인 입장이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인 활동을 중심으로 살피는 종교사회학의 방법을 차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현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특별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은 남·북한의 평화노력에 대한 그 근원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을 찾는 과정이다. 아무쪼록 "서로를 이해하는 노력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잘못되었을 때의 폐해는 무엇인지? 아울러 어떻게 그 노력을 성취할지?"를 묻는 첫 걸음이 되었으면 한다.
이 논문은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의 관계란 관점에서 유대교의 한 종파 인 예수 운동이 이방인 선교를 통해 세계 종교로 발전하는 제1차 유다이아 전쟁까지의 원시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규명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관계를 팔레스티나와 디아스포라를 나누 어 간략하게 고찰하였고(II), 그 다음에는 언어, 유대계 그리스도교와 이방 계 그리스도교의 구분, 유대교 율법과 이방인 선교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III). 결론적으로 이 연구는 첫째, 예수와 그 제자들은 아람어를 사용하고 헬 레니즘을 수용하는데 소극적이었지만, 헬레니즘 유대계 그리스도인(“헬라 파”)들은 예수 전승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리스 세 계에 맞게 변용시키고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교가 그리스 문화를 매개로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는데 핵심적인 역 할을 수행했으며, 둘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 인 선교를 주도하고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지만, 후기에는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확신하고 다른 형제자매를 위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하여 율법 이해에서 변화를 보여주었고, 셋째,바울은 주체와 인격의 구별, 개인의 결단과 보편적인 사회의 전망을 강조 했다는 점에서 헬레니즘 정신에 부합되는 새로운 종교를 제시했으며, 마지 막으로 가정 교회가 이러한 새로운 현실을 실현하고 경험하는 모판이 되었 다는 것을 밝혔다. 예수 운동이 이방인 선교를 통해 세계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추적함 으로써, 본고는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의 관계를 규명하며, 유대교와 그리 스 문화 사이에서 원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 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앞으로 역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신학적 차원에서 이 주제를 다룬 연구가 진척되기를 촉구했다.
본 논문은 해방 후 전재민에 대한 한국 사회의 구호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당시 인구의 1/10-1/6에 해당하는 전재민이 남한에 유입되면서, 한국 사회는 커다란 변동을 경험했는데, 경제적 위기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 에 전재민들의 성향에 대해서는 사회학적인 방법을 그리고 전재민 구호활 동에 대해서는 사회복지의 측면에서 살피고자 한다. 미군정청에서 활동한 주요 한국인들이 해외 유학파 기독교인이며, 교회는 민간구호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전재민 교회는 자신 스스로가 자력갱생 을 이루는 모범적인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통해 기독교가 전재민구호활동을 통하여 한국현대사회에 기여하였음을 보이려고 한다.
해방 후 미군정기간에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였던 전재민에 대한 구호활 동은 종교인들의 당연한 관심의 영역이었을 것이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없었 다. 또한 당시에 대한 연구가 지나치게 정치역학의 관점에서만 조명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논문은 기독교인들의 인도주의적 활동을 설명하면서, 전재민 구호활동이 민간인 주도에서, 미군정청중심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전재민 스스로 자력갱생의 과정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독촉국민회는 이승만과 김구가 연합하여 1946년 2월에 지방우익세력을 조직하려고 만들었던 연합조직이었다. 초기에는 오하영과 김구가 중심이 되어 조직을 이끌었으나, 이승만은 지방 조직을 확산시킨 남부지방 순회여 행 후 1946년 6월에 열린 2차 전국대회에서 중앙조직을 장악하였다. 이 조 직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신익회의 정치공작대 세력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 요한 요인이었다. 그는 6월 29일에 민족통일총본부를 조직하였고, 7월에 이 조직에 애국단체 총연합회를 통합시켰다. 이러한 세력 확장을 이룬 후 에 독립촉성국민회의 운영에서 드러난 난맥상을 해결하기 위해 1946년 9 월 7일에 제3차 전국대회를 열었는데, 임원진에 임정세력이 상당히 참여했으나, 중앙위원조직은 이승만이 확실하게 장악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말에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미국방문에 나섰다. 그의 미국방문기간 동안 임정세력은 비 상국민회의, 민족통일총본부, 독촉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임정봉대론에 입 각한 임시정부수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을 지지하는 배은희와 이윤영등의 반대로 임정세력의 이러한 통합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김구 중심의 임정세력은 임정봉대론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은 1947년 4월에 열린 제4차 전국대회에서 임정세 력을 정리하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독촉국민회를 재편하였다. 그 이후에 점차로 단독선거를 지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임원진을 개편한 후 에, 이 조직을 바탕으로 1948년 5월 총선거에 임하였다. 그 결과 제헌국회 의원 가운데 가장 많은 55명이 독촉국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이러한 독촉국민회 중앙조직에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초기에는 오하영이 이승만과 김구 사이의 중간역할을 하면서 부위원장을 하 였다. 중앙에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로는 배은희목사와 이관 운목사 그리고 이승만의 직계였던 송필만, 임영신, 북한에서 월남한 이종 현 등이었다. 특히 월남기독교인들로 주목되는 그룹이 이윤영과 이종현, 변성옥이었다. 그리고 최태용은 반공과 국민운동을 통한 건국운동이란 점 에서 독촉국민회의 지지자가 되었다. 독립촉성회 중앙조직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0%에서 40% 정도 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비율은 해방공간에서 기독교인들이 우파 세력의 중 심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이 조직의 임원진에 참여한 기 독교인들은 대부분 일제 강제기 동안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지지 기반이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18세기에 성령론과 삼위일체적 세대론의 해석법으로 존 웨슬리의 신학을 체계화시킨 존 플레쳐에게서 부분적으로 발견되고, 18세 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종말론에 관한 가열찬 담론 가운데 발전되었으며, 성경예언연구를 통해 사도행전적 오순절 현상의 분출을 경험한 어빙의 알버리써클에서, 그리고 19세기 후반 영국, 이 어 북미에서 개최된 일련의 성경예언대회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확립된 종말론이다. “세대주의의 아버지”라 칭해진 존 다비가 신학적 독창성으로 세 대주의 이론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상기한 영국의 세대이론과 역사 주의 전천년설 및 오순절운동의 교차로 위에서 발전한 신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구체화된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동시대 교회지도 자들의 종말론과 일치하지 않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의 마찰을 야기하 기도 하였지만, 복음주의 신앙을 관철한 성서적 교회회복운동이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북미의 세대주의 전천년설 확산의 결정적 견인차는 일련의 성경예언대회였다. 이는 개혁교회의 피어 선과 브룩스, 침례교회의 고든과 무디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더 나아가 급진적 성결운동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에큐메니컬 연합전선을 펼쳤 다. 한국에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한 교단의 신학으로 자리 잡았을지라도 그를 산출한 19세기 영미성경예언대회는 장로교와 침례교, 감리교와 성결 운동지도자들을 총망라하는 초교파적 협력을 창출해내었다. 이러한 협력으 로 기독교의 중심축을 성경과 성령 및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게로 옮기는 19세기의 에큐메니칼 교회개혁운동이었다. 교회연합의 정신 가운데 추진 된 북미의 성경예언대회는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며, 성령의 현재적 이고 초자연적인 활동을 확신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지상 대명령인 세계 선교에 주력하였는데, 이러한 결합이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전세계로 확산 시킨 모판으로 작용하였다. 세계를 교구로 삼은 메소디스트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를 촉진시킨 19세 기 선교동원가들이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성경예언대회의 중심인물이었기 에,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학생자원운동의 수로를 따라 남반구로 확산되었 고 세계기독교의 형성에 주요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오늘날 남반구의 주류가 된 오순절운동의 신학적 기초를 마련한 선교와 성령 중심의 종말론 이었다. 기독교기관의 재화축적과 과학기술의 진흥에 어깨를 맞추고자 질 주하던 19세기 교회의 행로에 브레이크를 밟고 다시 인간의 거룩 및 영혼 의 구원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종의 영성운동이라 볼 수 있다. 생명 과 진리의 분여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령의 초자연적 개입을 긍정하므로 인간의 근본적 성품변화를 유도하고 거룩한 성품으로부터 깨 끗한 사회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종교관과 세계관을 강화하였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세속화되고 교권화된 교회의 성서적 본질을 회복하려는 19세 기의 초교파적 교회개혁운동이었다.
이 글의 목적은 이슬람의 등장(622년) 이후 비잔티움의 멸망(1453년)까 지 이슬람 세계, 비잔티움,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의 세 권역에서 이슬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응을 개관・비교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글 은 이슬람 세계와 종교, 특히 꾸란과 무함마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변 증과 논박서를 개관하고 그 논점과 성격을 권역별로 비교한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이슬람 세계 안에서 꾸란과 이슬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이슬람의 도전에 대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증했던 동방 그리스도교의 이 슬람 대응 문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이슬람 세계와 적대적인 관계 에 있었으며, 언어의 차이와 왕래와 교역의 제한으로 무슬림과 이슬람의 종교적 가르침과 관행을 접하기 어려웠던 비잔티움과 라틴 그리스도교의 이슬람 대응과는 대조된다. 대체로 비잔티움이나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의 지성인은 이슬람의 종교적 가르침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그리 스도교 세계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될 때에야 이슬람의 지적인 도전을 인정하고 이슬람에 대한 학문적이고 개관적인 연구를 발전시켰다. 이 연구 는 무슬림 이주민 사역과 국내외 무슬림 선교를 위해 한국 교회에 보다 객 관적이고 진지한 이슬람 연구를 요청하며 끝맺는다.
193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기독교계엔 바르트에 대한 열풍에 가까운 관 심으로 다수의 바르트 신학 관련 번역서들이 출판되었다. 그와 비교할 때, 한국의 기독교 출판계는 선교사들의 통제 하에 기초적인 단계의 신학 및 신앙서적들의 번역소개에만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 비해 당시의 최 근 신학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중요 신학 서적들의 번역 소개는 충실히 이 루어지지 못했다.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칼 바르트에 대한 사상이 소개되는 것은 1930년대 초반부터이며, 주로 신문과 잡지에 바르트 신학의 기초 적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해방 전후 한국교회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신 학자들은 ‘바르티안’(Barthian)들이었으며, 대부분 1930-40년대에 유학한 일본의 여러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해방 직후 신진 학자들의 칼 바르트 대 표 저작의 번역출판 시도가 있었지만, 6.25전쟁의 발발로 지체되었고, 이후 1950년대까지는 바르트 등의 최근 신학 저술들이 번역 소개되어도 대부분 이미 출판된 일본어 번역서를 모본으로 삼아 한글 번역을 시도한 결과였 다. 그러나 1960년 전후부터는 일본어 번역문의 피동적 수용 자세를 탈피 하기 위해 독일어 원문과 영문 텍스트를 직접 한글로 옮기는 등의 주체적 수용 노력을 보인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와 기독교 출판은 일본의 신학계와 기독교 출판계의 성과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해방 이후부터는 구미의 신학을 직접 배우고 익혀, 한국인의 정신사와 종교문화에 걸 맞는 번역과 연구 성과들을 출판물로 산출하기 시작했다.
퇴계 이황과 엘리엇에게는 시간과 공간적 배경에서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혹은 초월적 사변과 가치에 경도되었 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둘은 모두 현상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 제를 갖고 있는 열등하고 타락한 상태로 인식하며 그 상태로부터 초월적 구원의 방법을 모색한다. 퇴계는 성(性), 즉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우주의 근본원리로서의 리(理)의 존재를 확립하고 리가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노력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고봉 기대승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이 다. 20세기 초의 엘리엇은 자유주의자 그리고 인본주의자들의 인간 중심 혹은 이성 중심의 경향에 맞서 교회와 그 가치를 굳건히 지킬 것을 주창한다. 엘리엇이 말하는 초자연성(the supernatural) 혹은 신성(the divine)은 퇴계가 우주원리로서 받아들인 리처럼 초월적 혹은 형이상학적 도덕론을 통한 문제해결 모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엘리엇이 현실계 에 대한 품은 부정적 인식과 형이상학적 해결을 모색해가는 과정은 황 무지 에서 출발하여 재의 수요일 을 거쳐 네 사중주 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성리학과 엘리엇의 초월적 사유가 가진 자위성 과 위계적 세계관이 어떻게 실체적 근거와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인가는 특별히 현대적 상황에서 유용한 질문으로 보인다.
이글은 개종 후 종교적 색채가 짙어진 엘리엇의 후기시에 나타난 종교적 경험의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이다. 종교적 경험은 특정 종교의 도그마나 교리가 규정하는 대로가 아닌 인간이 압도적 권위나 힘을 가진 초월적 존재에 대한 관계에서 느끼는 정서적 경험으로 이 글에서는 오토와 제임스의 설명을 기초로 삼았다. 이 경험에서 인간은 대상인 절대자 앞에 나약한 피조물로 스스로를 인식하며 세계관과 태도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융은 이 경험을 심리적 공식으로 이해하여 인간의 의식이 그 근원인 무의식의 중심, 즉 ‘자기’에 노출되면 절대자 앞에선 ‘피조물 느낌’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엘리엇에게 이 같은 종교적 경험이 실재했는가 하는 문제는 정확하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그는 이 경험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심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종교시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도 시인의 종교적 경험의 개연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그의 시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는 스스로의 경험을 그리고 있다는 인상을 자주 불러일으킨다. 특히 「동방박사의 여행」과 재의 수요일에서 이 같은 특징이 두드러지며 동시에 그의 시는 산문과 달리 종교적 가르침에 대해 회의하는 모습이 자주 드러내기도 한다.
이 논문은 젠더이슈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1920-30년대 기독교가 젠더담론 형성과정에 어떻게 관여했는지에 관한 연구이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근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신여성의 등장과 ‘여성해방’의 전위를 자처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과의 경쟁에 직면하여 기독교가 선점해왔던 ‘남녀평등의 종교’라는 이데올로기적 ‘진지’를 어떻게 지켜나가고자 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더불어 「신학세계」, 「신학지남」, 「기독신보」 등 대표적인 기독교 정기간행물들에 실린 글들을 분석하여 일제 식민치하에서 형성된 기독교의 근대담론이 저항담론이 아닌 서구적 근대이념에 종속된 또 하나의 식민담론이었음을 밝힌다.
기독교계는 선교를 위협하는 ‘신사상들’로부터 기독교 대중들을 지키고 기독교의 외연을 확장해나가기 위해 새로운 담론전략이 필요했다. 대중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전기장르를 통해 ‘남녀평등’과 ‘인류애’가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임을 설파하고 이를 실현한 역사적 모범으로 영미권 여성들을 소개했다. 다음으로 성서와 기독교 전통 안에서 두각들 드러냈던 여성들의 역사를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소개하면서 기독교야말로 남녀평등의 종교임을 재차 확인시켰다. 또한 개인의 도덕성 계발의 강조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사회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대중교육을 지속할 수 있는 기독교가 취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덕분에 기독교는 ‘남녀평등’이 근대사회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임을 주지시키고 젠더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불을 지피는데 공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드러난 기독교계의 담론전략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 또 다른 방식의 식민화를 초래하는 종속구조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자신들의 역사로부터 단절을 강요받고 있던 조선의 대중들이 영미권 역사와 영미권 여성들의 업적을 근대의 이상적인 모델로 동경하게 만들었다. 또한 일제의 억압정치와 제국주의적 야만성을 외면한 채 ‘자발적 헌신’과 ‘이타적 희생’만을 강조한 담론전략은 식민체제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키고 억압적 현실에 스스로 순응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젠더 논의에 있어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이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는 조선사회가 처한 현실과 교회의 실질적인 문제들이 논의의 중심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본고에서는 이용도의 시대인식과 조선적기독교를 연구하였다. 먼저 그의 시대인식을 파악하기 위해 그가 조선교회, 선교사 및 서구교회, 그리고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또 이런 시대인식이 예수교회의 설립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고찰하였다.
이용도는 조선교회의 정통주의적 주류 신앙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선교사 및 서구교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전형적인 반교회적, 반선교사적인 인물로는 평가할 수 없다. 그는 협성신학교를 입학한 후 정치적 민족주의를 포기하였다. 때문에 예수교회의 설립은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용도가 예수교회를 설립한 이유는 조선교회의 신앙적 체질을 바꾸고자 한 그의 시도가 장로교회의 견해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관점에서 예수교회는 서구교회로부터의 신학적, 경제적 독립보다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발생하였다.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을 추구하였던 이용도 지지자들은 기성교회의 권위에 부딪히자 독자적인 교회의 설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본 논문은 아시아에 위치한 버마(1998년 미얀마로 개칭)의 소수종족인 까렌족이 서구 제국과의 만남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고 주권국가 건설을 시도하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버마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불교 국가로 19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6년 1월 해방된 신생 독립국가(버마연방)이다. 버마 역사 상 정치적 주권을 전제한 민족주의운동은 영국이 버마를 식민지화하는 시기 소수종족 까렌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에 일어난 까렌 민족주의와 그 실천 과정은 당시 서구 기독교 선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소수종족 까렌족은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구전된 까렌 신화에 나오는 ‘생명의 책’에 대한 예언(백인 형제가 생명의 책’을 가지고 귀환할 때 까렌족의 번영이 이루어진다)의 성취로 보고,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그 결과 (버마족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버마족으로 분리된 까렌 독립국 설립을 추구하였다.
언급한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본 논문은 먼저 식민지 전 구(舊)버마 전통사회의 구조를 개관하고 식민지 이후 변화된 사항들을 고찰한다. 다음으로 영국의 식민지 통치 시기 서구 기독교가 까렌족에게 소개되고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까렌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현실에서 까렌 독립국 설립을 추구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본 연구결과는 19-20세기 초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간 복음과 서구 문명이 버마의 소수종족 까렌족에 주어진 특수 환경, 즉 식민정부의 종족분할정책, 다수 버마족과의 공존, 낙후된 문명과 정령신앙 등의 영향으로 아시아 여타 지역과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실천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글은 아시아 기독교사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를 총 정리한 것이다. 신학 및 교계 잡지에 발표된 글과 단행본, 그리고 일반 역사학 관련 잡지를 검토하여, 가능한 모든 글을 소개하려고 애썼다. 한중일 3국을 주요 범위로 하였지만, 그 밖의 아시아 전체국가를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동남아나 인도, 서아시아 국가의 기독교사에 관한 국내 연구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본문을 통해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1970년대와 1990년대, 2000년대 등 각 시기별 변화에 따라 연구의 주제와 내용이 민족, 선교, 세계화 등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I장에서는 한국 기독교사의 기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경교 연구사, 그리고 한국 천주교의 기원과 국제관계, 중국과 일본, 그 밖의 아시아 천주교 연구를 소개하였다. II장은 만주선교와 기독교 민족운동, 한국 개신교의 유래에 대한 연구가 중국개신교사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고, 개혁개방 이후 중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이후, 점차 중국 기독교사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밝혔다. III장은 식민지 시기 한국에 미친 일본기독교의 영향에 대한 관심이 일본개신교사에 대한 연구를 일으켰고, 오늘날까지도 일본기독교의 국내외 영향관계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IV장을 통해서는, 근동지역과 인도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아직 부족하지만, 동남아에 대해서는 1990년대 이후 활발한 선교, 국내 이주민의 급증으로 새로운 관심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기독교사 연구는 선교사들의 자료 수집, 번역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의 아시아 기독교사 연구는 그동안 한국 기독교사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고, 따라서 한국 기독교사 전공 학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이후 선교를 위한 관심으로 옮겨갔고, 최근에는 주체적인 또는 통합적인 서술로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각국 기독교사에 대한 개별 연구와 통합적인 조망은, 아시아 기독교사 전체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작업이기도 하다. 본 논문에서 빠진 것이 보충되고 좀 더 세밀한 분석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The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clearly states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While pure religious action should be separated from politics, Koreans with religion have some duties and rights based on the fact that religious people also are members of the Korean nation and society. This article aims to describe an aspec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politics and religions with a special attention to Christianity.
First of all, Christianity of Catholic and Protestant played a great role in the building of the Republic of Korea. After the World War Ⅱ, other religions in Korea did not support liberal democracy. Also they had a very ambiguous attitude toward democracy. Some of them accepted even communism. In the ideological chaos, Christianity clearly counted as one of the important anticommunistic groups. At this point, Christianity should be considered as one of great contributors to the nation buildings of the South Korea. This close relationship of Christianity and anticommunism has been maintained from the World War Ⅱ to the present day.
However, several presidents of Korea became dictators in the name of anticommunism so that many liberal Christians have protested against authoritarian government as well as anticommunism which became a hated word in Korean liberal society. Many struggles between governments and liberal Christians had been appeared in other areas such as industrial problems, rural society, as well as environment. Recently, many Buddhists has been strongly involved in such agendas of liberal Christianity.
During transition from industrialization to democratization in South Korea, this nation has tried to find out a national identity and the Korean government have supported traditional religions such as Buddhism under the title of support of traditional and national culture. This support from government has been appeared in the area of culture, tourism and education. At this point, traditional and national religions of the South Korea have received a lot of financial aid from government.
The present study aims to examine whether the Korean elementary school texts rightly and impartially describe the history of Protestant Christianity. In Korea the contents of the elementary school texts change as the education curricula are revised by the Department of Education. This study analyzes the description of Protestant Christianity in the elementary school texts published in each education curriculum (education curricula have been revised seven times during from 1955 to 1997.
This study first examines the space which the current elementary school text alloted to the description of Protestant Christianity in comparison with the space alloted to the description of other religions, in particular Chyeonjugyo, Chyeondogyo, Daejonggyo, and Wonbulgyo. Next it turns to the concept of Protestant Christianity as it is understood in the elementary school texts. Thereafter it examines what the elementary school texts describe about the contribution of Protestant Christianity to the modernization of Korea. And it also investigates what these elementary school texts talk about the contribution of Protestant Christianity to the recovery of national sovereignty in Japan’s colonial period.
From this study is resulted this. First, the current elementary school text alloted more space to the description of Chyeonjugyo, Chyeondogyo, Daejonggyo, and Wonbulgyo than to that of Protestant Christianity. Secondly the elementary school texts mentioned the teaching of Protestant Christianity and its contributions to Korean society but did not explain the introduction-process and the main activities of Protestant Christianity. Thirdly the elementary school texts mentioned the introduction of new belief, and Western medicine, education plus culture, as the contributions of Protestant Christianity but often omitted the propagation of the idea of equality, abolition of superstition, and development of national self-supporting spirit.
To conclude, this study proposes some suggestions to improve the description of Protestant Christianity in the elementary school text to be produced in accordance with the 2007 revised education curriculum.
1) The text to be produced in accordance with the 2007 revised education curriculum should mention the influences which the reception in Korea of Protestant Christianity exerted on Korean society and daily life;
2) this text should explain Protestant Christianity’s contributions in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following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movements in Japan’s colonial period;
3) this text should describe Protestant Christianity’s participation in the movement for democratization in 1970-1980s.
Six kinds of Korean Modern History’ Authorized Textbook have the fixed places in which the contents of Christianity were described. The Comparison between the tables of them shows the similarity of the large units, th meddle units, and the little units of six textbooks.
According, first of all it must be examined that the places of Christianity in textbooks is fitting. The places of Christianity in textbooks were decided according to the editing principles of textbooks and the historical view. All textbooks have the nationalistic historical viewpoint and the immanent development historical viewpoint. Some textbooks have the left-oriented historical viewpoint plus these common features.
When the textbooks were written with the nationalistic historical viewpoint and the immanent development historical viewpoint, the modernization and the armed independence movement as the most urgent of modern history tasks have the most important places. So the written contents of korean modern history were comprised with those. Now the debating problem is the cognition about the causes of the modernization. The nationalistic historical viewpoint and the internal development historical viewpoint have the viewpoint that the modernization was progressed by the internal development, but interrupted by the Japan. After that, the national independence was achieved by the armed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modernization was progressed.
But the Christianity contributes very much the modernizing process of Korea in the modern history. Therefore in the future, the some important roles of Christianity in the korean modernization process must be known and the Christianity should be recognized as the core of modernization. The upright historical viewpoint for the description of modern history has to be established for the recognition of the roles of christianity in the modernizing process. The new historical viewpoint should be comprised with the internal factors and the external factors.
The exploit of Ham Suk-Hun in Korea Christianity history was new and authoritative speech (Matthew 8:29). He criticized old and powerless Korea Christianity by using new authoritative language and presented the new religious vision and spiritual energy that have given risen to prospective task in Korea Christianity today. He thought fundamental problem of Korea Christianity as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as consciousness of the times in disregard of history. He regarded Korea Christianity which has become lukewarm ashes and withered trees as formal idealism of religious belief which has taken history as just luck by chance. He sorted phenomenon of Korea Christianity in two aspects.?Firstly, systematized and privileged Christianity denied national solution, democratic demand in 1950s and pursued their interests by taking side with high and mighty people. Secondly, democratic Christianity that is not for construction of church but for construction of race conscience, not for a privileged minority but democratic religion for a majority and to service not to rule, to do an ascetic life not to be a state of euphoria. His writing criticized the realty of Korean society. In that situation the privileged class who make a monopoly of riches in clover life and neglect the people who suffer from absolute poverty after the Korean War. What he said is God’s words that spring up in the people. The person who tell and hear are the masses. So, someone who can not see the people’s mind can not hear this story even if he heard that. Hence they can not only hear the people’s speech but also can not speak true freedom. Ham thought that it is foolish to argue with them. Salvation is possible only by God’s grace. There is a confession of faith and life that are against human system and authority. He distinguished a new form of religion with old one and regulate Roman Catholic as an old form of religion that boast the power of a number and quantity. A new form of religion is for resist unfaithfulness and that is for freedom of the people’s spirit. Ham criticized Korea Christianity’s role and task in the desperate realty of Korean society. He conveyed God’s intention by the people’s voice in the land. God use Ham for Korea Christianity’s repentance and reformation prior to reformation of society. Because Korea Christianity did not role of prophets even though they have God’s words. His speech which was sent 50 years ago will become coordinates to Korea Christianity in identification and future dir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