麗水石堡(石倉城)發掘の成果と特徴
여수석보는 1457년(세조 3) 세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며, 전라도에서 최초로 연해안에 설치된 석보이다. 고려말 이래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이루워지던 축성 사업은, 조선 태종대에 入保를 위한 대형 산성의 수축과 함께 연해안의 주요 관방처 축성으로 이어졌다. 세종 27년(1445)에 조정에서는 병조판서를 보내 경상도와 전라도의 연해안 여러 고을의 책보(柵堡)를 둘러보게 하였고, 그 해 8월에 두 도의 요해처에 각각 하나씩의 석보를 축조하도록 결정하였다. 하지만 흉년이란 재해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만다. 그 후 여러 논의를 거쳐 마침내 여수 석보는 세조 3년(1457) 이전에 완성되고, 경상도 울산의 유포(柳浦)석보는 세조 4년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을 보았다. 여수 석보는 2회의 발굴조사 결과 성격이 어느 정도 밝혀 졌다. 이 성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평지성으로, 외벽은 할석을 이용하여 아주 정연하게 쌓고 내벽은 흙을 이용하여 축성한 편축식 성곽이다. 성의 네모서리는 각을 이룬 형식 아니라 호형으로 처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성벽의 기초부 너비 5.7~6m 정도를 15~30cm 크기의 판석재 할석을 전체적으로 깔고 있다. 이러한 기초 부분의 형식도 여수 석보의 한 특징이다. 성벽은 지대석 끝에서 안쪽으로 20~30cm 정도 들여서 1단을 올려 놓아 조선시대 다른 석축성과 같은 기법을 적용하였다. 전 구간에서 조사된 해자는 너비 5m 규모이며, 양쪽에 석축을 하여 토사방지를 하였다. 건물지는 석보의 중심부와 서쪽에서 각 3동과 5동 조사되었다. 서쪽에서 조사된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15~18세기 경으로 편년되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지를 이용하였던 주체는 석보에 주둔하였던 군인들에 의해 처음 조영되었으며, 그들이 1522년 돌산진으로 이동한 후 언제부터 석보창 관련 시설물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심부에서 조사된 건물지는 대부분 17세기 중후반에서 18세기대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주를 이루워 석보창 관련 시설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麗水石堡は1457年(世祖3年)「世祖実録」にはじめに登場して、全羅道に最初で沿海岸に設置され石堡
である。高麗末以来倭冦の侵入に備えて作られる築城事業は朝鮮太宗時代に入保のため大形山城の修築とともに沿海岸の主要關防(国境の防備)處につながった。世宗27年(1445)に朝廷(君主が国の政治を行所)には兵曹判書を送って慶尚道と全羅道の沿海岸の多くの村の柵堡見回すようにした。同年8月に両刀の要害處に各一つずつの石堡を築造するように決定した。しかし、凶年という災害のため実行できなくなった。その後多くの論議経てとうとう麗水石堡は世組3年(1457)以前に完成して、慶尚道の蔚山の柳浦石堡は世組4年に築造され始めてその翌年に完成された。麗水石堡は2回の発掘調査結果の性格がどれほど明かされた。この城は方形に近い平地城で、外壁は割石を利用してとても整然としているように積んでに内壁は土を利用して築城する片築式城郭である。城の四角は角を成した形式ではなく弧形で処理した特徴を見せてくれている。城壁の基礎部の直径5.7~6m程度を15~30cmの大きさの板石材の滑石を全体的に敷いている。このような基礎部分の形式も麗水石堡の一つの特徴である。城壁は地臺石の終りで中方へ20~30cm程度らのため1段を乗せて朝鮮時代に他の石築城のような技法を適用した。全區間で調査された垓字は直径5m規模であり、両方に石築をして土砂防止をした。建物址は石堡の中心部を西から各3棟と5棟で調査された。西から調査された建物址で出土された遺物は15~18世紀頃で編年されていた。したがって、この建物址を利用された主体は石堡に駐屯した軍人たちによって初めて造営されたし、それらが1522年突山鎭で移動した後いつから石堡倉の関連施設物だったことで見られる。中心部から調査された建物址はほとんど17世紀中後半から18世紀時代に該当する遺物が主に成り立って石堡倉の関連施設物で使われたことで推正することができ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