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the ‘Cabinet Decision’ of 1905, ‘Notification No. 40 of Shimane Prefecture,’and the Incorporation of Dokdo
이 논문에서는 메이지시기 울릉도·독도에 대한 일본 측의 인식 변화를 고려하면서 1905 년 초에 일본 정부가 시행한 독도 편입 조치의 의미를 검토했다.
각의 결정 당시 일본 중앙정부는 독도를 더 이상 ‘마츠시마’나 ‘다케시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나카이 요자부로가 제출한 ‘량코도 영토 편입 및 대하원’에서 사용했던 ‘량코도’나 전통적 명칭인 ‘마츠시마’ 또는 새로 취득한 무주지에 적당한 제3의 명칭이 아니 라, 굳이 역사적으로 많은 혼동을 불러일으켰던 ‘다케시마’라는 명칭을 붙였다. 독도에 대해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일본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연결시켜 인식해온 역사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일본 정부는 메이지시기에 감행한 도서(島嶼) 편입의 절차를 독도에 그대로 적용했다. 새로 섬을 편입한 후 소관 지방관청이 고시를 하는 것도 그 절차의 일부였다. 지방관청의 고시는 중앙정부(각의결정)→지방관청(고시)→민간(대여)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흐름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 즉 고시는 대외적인 조치가 아니라 전적으로 국내용 조치였던 것이며, ‘시마 네 현 고시 제40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싸고 2백년 이상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대해 아무런 통고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편입 조치의 일방성을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This study examined the meanings of the Japanese government’s action to incorporate Dokdo in 1905, taking into account the changes to Japan’s perceptions of Ulleungdo and Dokdo during the Meiji period.
At the time of the cabinet decision, the central Japanese government no longer called Dokdo “Matsushima” or “Takeshima.” The Japanese government chose “Takeshima,” which had historically caused a lot of confusion, instead of “Ryangkodo,” which was used by Nakai Yojaburo in his “The territorial incorporation of Ryanko island and lease request” the traditional name “Matsushima,” or a proper third name for the newly acquired terra nullius(“empty land”). By entitling Dokdo “Takeshima,” the Japanese government paradoxically demonstrated that there was no fundamentally denying the history that had perceived Dokdo in connection with Ulleungdo.
The Japanese government applied the procedure of incorporating islands from the Meiji period to Dokdo as it was. A notification by the concerned local agency after a new incorporation of island was part of the procedure. Notifications by local agencies should be understood in the flow from the central government(the cabinet decision) through local agencies(notification) to the private sector(rental). That is, notifications were not foreign measures but totally domestic ones. “Notification No. 40 of Shimane Prefecture” was no exception. In spite of conflicts over Ulleungdo and Dokdo for more than 200 years, the Japanese government gave no notification to the Korean government and thus demonstrated the unilateral nature of the incorporation a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