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gnition of Dokdo as an affiliated island of Ulleungdo as shown in Japanese material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그동안 여러 선행연구의 성과를 통하여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강제 편입시키기 이전, 일본의 지도와 역사지리교육에서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지하지 않았다는 점이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시대적인 특성상, 위와 같은 관점의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시기에 따라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연속성 하에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법제적으로 일본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영토화했다고 해도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인식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울릉도와 독도 관련의 일본어 자료 속에 독도 인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상 자료는 2017년에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김남훈 독도 관련 기증자료 중,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역사지리부도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저술된 울릉도와 독도 관련 연구논문, 시마네 현 마쓰에 시 죽도연구소에서 필자가 직접 수집한 「죽도편입에 관하여」라는 문서군을 주목하고자 한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시바 가즈모리(芝葛盛) 의 『일본역사지도』(1922)에는 죽도(=독도)를 조선의 것으로 적어,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독도를 인지했음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地名의 巨人’으로 불린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의 『대일본지명사서』의 영향이 컸으며, 요시다 도고가 펴낸 『신편 일본독사지도』에 소개된 「한국병합 전후 일본영역도」 의 인식과도 일치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나아가 시바 가즈모리의 관점은 연구 동료인 후지타 아키라(藤田明)의 저술에도 반영되었다. 그런 점에서 시바 가즈모리의 『일본역사지도』 의 독도 관련 기술이 시바 가즈모리의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인식하는 사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의 저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이마무라 도모(今村鞆) 등의 연구에서는 울릉도를 竹島, 독도를 松島에 비정함으로써 자연히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간주하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히바타 셋코(樋畑雪湖)는 직접적으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이 라고 단정했다. 한편 일제강점기 울릉도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뚜렷이 보인다고 증언한 점, 독도가 竹島라는 이름으로 시마네 현에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인은 량코도로, 조선인은 獨島라고 했다는 점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정 지역의 소속과 명칭을 바꾸어도 일상생활 속에서 체감하는 공간 인식은 이전의 방식 과 습관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23년 발간된『島根縣誌』나 1945년 일본 마쓰에 재무부 국유지대장에 ‘獨島’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은,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의 독도의 존재감이 일본 측에도 인지되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정작 독도를 영토 편제한 시마네 현에서는 1926년에 행정구역 개정으로 오키 도사가 폐지되고 오키지청이 수립된 후 독도 관련 행정 조치도 취해야 했지만 1953년까지 방치한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점은 현재 일본 측에서는 은폐하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독도에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는 지표이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한국병합조약에 의해 ‘영원히’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고 인식되었기에, 일본 측은 굳이 독도를 따로 떼어 내어 일본의 영토로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도는 그 행정적인 소속 관계와 상관없이 지리적인 특성에 의해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펴낸 저술에도 표출되었으며, 일본 측 공식 자료에도 ‘獨島’라는 명칭이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Until now, through the results of several previous studies, it is thought that it was fully revealed that Japan did not recognize Dokdo as a territory of Japan before it was forced to annex it to its territory in 1905. Howeve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t was difficult to prove that Dokdo was Korean territory because all of the Korean territory became Japanese territory. Nevertheless, history is not cut off from time to time, but still exists under continuity. Even if Japan, by law, made Dokdo one-sided as its territory, the perception that Dokdo is an island attached to Ulleungdo will not suddenly disappear. This study aims to examine how Dokdo's perception appeared in Japanese materials related to Ulleungdo and Dokdo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The data for this study were donated by Nam Hoon Kim, donated to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in 2017, research papers related to Ulleungdo and Dokdo written by Japanese scholar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Matsue City, Shimane Prefecture It is a document called "About the Incorporation of Takeshima" that I directly collected at the Takeshima Research Institute. The research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Shiba Kazumori's Japanese History Map (1922) wrote Takeshima(=Dokdo) as the territory of Korea, revealing that it recognized Dokdo as an island attached to Ulleungdo. This was largely influenced by Yoshida Togo's "The Great Japanese geographic dictionary", which was called the Giant of Japanese Geography. This coincides with the perception of Japanese territorial maps before and after the Korean annexation introduced in the "New Japanese history map" published by Yoshida Togo. Furthermore, since Shiba Kazumori's perspective was reflected in the writings of research colleague Akira Fujita. Shiba Kazumori's perception was not limited to him. An example of recognizing Dokdo as an affiliated island of Ulleungdo can also be found in research papers written by Japanese scholar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other words, studies by Tabohashi Kiyoshi and Imamura Tomo revealed the perception of Dokdo as a sub-island of Ulleungdo by declaring Ulleungdo as Takeshima(竹島) and Dokdo as Matsushima(松島). Setko Hibata directly determined Dokdo as an island of Ulleungdo. On the other hand, Japanese residents who lived in Ulleungdo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estified that Dokdo was clearly visible on Ulleungdo on a clear day. Despite the fact that Dokdo was incorporated as a Japanese territory in Shimane Prefecture under the name of Takeshima(竹島), Japanese were known as Ryangkodo and Koreans were Dokdo(獨島). The fact that it is called is a part where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previous methods and habits continue in life regardless of changes in the system. Also, it is recorded as Dokdo(獨島) in 『島根縣誌』 (1923) and the head of the State Treasury Department of Matsue, Japan (1945), indicating that Japan also recognized Dokdo as an attached island of Ulleungdo. Furthermore, after the administrative district was changed from Oki island governor (島司) to the Oki branch office in 1926, it was left until 1953 without administrative measures for changing the region governing Dokdo. Japan is hiding this fact, but this is an indicator that Japan can guess how Dokdo was perceiv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Korea was recognized as the “territory of Japan Empire” by the Korean Merge Treaty, so the Japanese side did not have to separate Dokdo and emphasize it as Japanese territory. In such a situation, regardless of its name, the geographical recognition of Dokdo as a sub-island of Ulleungdo was naturally expressed in Japanese records related to geography. Even Japanese officials have indicated that the island was called “Dokdo(獨島)” by Kore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