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20대 젊은 성인 34안을 선별하여 내안각을 측정하고 원데이 프리즘 밸러스트 방식으로 제조된 토릭 소프트렌즈를 착용 후 렌즈의 회전량을 측정하고, 내안각이 프리즘밸러스트 디자인으로 제조된 토릭 렌즈의 회전량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방법: 실험 대상자는 20~25세 사이의 젊은 성인 34안을 선별하여 난시값에 따라 –2.00D 이하와 –2.00D 이상으로 분류하였다. 안검 장력은 면봉을 이용해 눈꺼풀 반전을 통해 눈꺼풀 장력이 느슨한 경우는 배재하였다. 대상자등의 내안각을 슬릿 램프를 사용하여 T.A,B.O 각으로 분류하였다(OD:0°~15°, OS:165°~180°). OD:7°, OS:172°를 기준으로 내안각이 큰 경우와 작은 경우로 분류하였다. 렌즈 착용 후 30분 이상의 안정화 시간을 가진 후 push-up test, 상하좌우 시선 이동시 렌즈의 래그량을 평가하여 정상적인 피팅 범위 내에 측정된 피검자들을 대상으로 회전량을 측정하였다.
결과: C-2.00 이상의 난시 값 에서는 내안각이 OD:0°~7°, OS:172°~180°에서 회전량은 2.00±1.22°이었고, 내안각이 OD:7°~15°, OS:165°~172°에서 회전량은 4.75±2.75°이었다. C-2.00 미만에서는 내안각이 OD:0°~7°, OS:172°~180°에서 회전량 4.83±4.86°이었다. 내안각이 OD:7°~15°, OS: 165°~172°일 때 회전량은 5.08±3.95°로 측정되었다.
결론: 프리즘 밸러스트 디자인 토릭 소프트 렌즈에서 내안각과 관련하여 회전량을 평가하였을 때 내안각이 크고 난시량이 작을수록 상대적으로 회전량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In today's society, many women wear high-heeled shoes, but the effect of heel height on lumbar lordosis has not been clearly defined. The objective of this study was to identify the influence of heel height and general characteristics of subjects on lumbar lordosis. The subjects of this study were 40 healthy women who were students of the Department of Physical Therapy, College of Rehabilitation Science, Taegu University. Flexible ruler measurement was used to measure the lumbar lordosis at barefoot, 3 cm and 7 cm high-heeled standing positions. The results were as follows: 1) Significant statistical decrease in lumbar lordosis was observed as heel heights were increased from barefoot to 7 cm high heel. 2) There were no statistically significant differences between lumbar lordosis according to three different heel heights and weight, body mass index. 3) Lumbar lordosis measured at different heel heights was related to subject's height. With increasing subject's height, lumbar lordosis that measured from each heel height was significantly decreased. As heel heights were increased from barefoot to 7 cm high heel, significant statistical decrease in lumbar lordosis was observed in the subjects whose height were 151~160 cm. 4) Intrarater reliability on lumbar lordosis taken with a flexible ruler was good, with Cronbach values of 0.8971 for barefoot, 0.8107 for 3 cm and 0.9002 for 7 cm high-heeled standing positions.
The purposes of this article are to review the pathogenesis, prevention, and management of amputation due to diabetes mel1itus complications, and to report one case who had lost his toes due to diabetes mellitus. A primary cause for hospital admission of the patient was foot ulcer. Since many amputations in diabetic patients are precipitated by such ulcers, a program for active prevention and optimal treatment of diabetic foot lesions might decrease the risk of amputation. Diabetic foot ulcers and, ultimately, amputation can stem from a variety of pathways. The combination of peripheral neuropathy, peripheral vascular disease and infections is the harbinger of the final cataclysmic events of gangrene and amputation. As the physical therapist is often involved in the treatment of diabetic patients, the therapist should be aware of the followings: the patient's type of diabetes and the severity of the diabetes, the complications of the disease, the effects of exercise, the importance of wearing proper shoes and education to patients about appropriate diabetic foot car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iew the literature of AIDS/HIV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human immunodeficiency virus) and to introduce physical therapy of the AIDS client. It was first reported that five young homosexual men, in 1981 in Los Angeles, died of pneumonia caused by pneumocystis carinii - called "pest of twentieth century". AIDS was implied a fatal breakdown of the functioning of the normal human immune system. The major routes of transmission has occurred via l)sexual contact between men, 2)heterosexual intercourse, 3)contaminated blood and blood products, and 4)intrauterine or pre-natal infection from mothers. AIDS clients who may require physical therapy for a wide range of problems due to respiratory, neurological, musculoskeletal and painful syndromes as well as general decline in fitness and function. AIDS is growing rapidly in our contury as well as all over the world. Therefore, physical therapist has to correct his understandings of AIDS in order to protect himself and to give proper physical therapy to the AIDS clients.
코로나 상황(Covid-19)의 장기화로 인해 현장에서 이루어지던 많은 교육과정들이 온라인 시스템을 활용한 교육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예비교사 교육과정의 필수 과정인 교육실습 역시 온라인 교육으로 시행되었다. 본 연구의 초점은 비대면 교육시대의 온라인 교육실습을 위한 실습지도교사와 예비교사의 요구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첫째, 2019년 충청권 교사연구회를 통해 드러난 실습지도교사와 예비교사들의 온라인 플랫폼에 요구되는 콘텐츠와 세부 기능에 대한 요구를 파악하고, 2020년 5개의 충청권 실습학교들이 실시한 온라인 교육실습의 내용을 살펴보아 현장의 요구가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둘째, 2020년 온라인 교육실습을 경험한 각기 다른 대학교 소속 4명의 예비교사들의 경험을 살펴 기억해야 할 가치와 교육실습의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았다. 연구의 결과로서, 실습지도교사는 실습의 전 과정의 흐름을 드러내는 콘텐츠의 중요성, 학생들은 실제실습의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 콘텐츠들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실습지도교사와 예비교사 모두 소통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교육실습의 가치를 드러냈다.
그동안 여러 선행연구의 성과를 통하여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강제 편입시키기 이전, 일본의 지도와 역사지리교육에서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지하지 않았다는 점이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시대적인 특성상, 위와 같은 관점의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시기에 따라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연속성 하에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법제적으로 일본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영토화했다고 해도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인식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울릉도와 독도 관련의 일본어 자료 속에 독도 인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상 자료는 2017년에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김남훈 독도 관련 기증자료 중,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역사지리부도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저술된 울릉도와 독도 관련 연구논문, 시마네 현 마쓰에 시 죽도연구소에서 필자가 직접 수집한 「죽도편입에 관하여」라는 문서군을 주목하고자 한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시바 가즈모리(芝葛盛) 의 『일본역사지도』(1922)에는 죽도(=독도)를 조선의 것으로 적어,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독도를 인지했음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地名의 巨人’으로 불린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의 『대일본지명사서』의 영향이 컸으며, 요시다 도고가 펴낸 『신편 일본독사지도』에 소개된 「한국병합 전후 일본영역도」 의 인식과도 일치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나아가 시바 가즈모리의 관점은 연구 동료인 후지타 아키라(藤田明)의 저술에도 반영되었다. 그런 점에서 시바 가즈모리의 『일본역사지도』 의 독도 관련 기술이 시바 가즈모리의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인식하는 사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의 저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이마무라 도모(今村鞆) 등의 연구에서는 울릉도를 竹島, 독도를 松島에 비정함으로써 자연히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간주하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히바타 셋코(樋畑雪湖)는 직접적으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이 라고 단정했다. 한편 일제강점기 울릉도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뚜렷이 보인다고 증언한 점, 독도가 竹島라는 이름으로 시마네 현에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인은 량코도로, 조선인은 獨島라고 했다는 점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정 지역의 소속과 명칭을 바꾸어도 일상생활 속에서 체감하는 공간 인식은 이전의 방식 과 습관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23년 발간된『島根縣誌』나 1945년 일본 마쓰에 재무부 국유지대장에 ‘獨島’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은,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의 독도의 존재감이 일본 측에도 인지되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정작 독도를 영토 편제한 시마네 현에서는 1926년에 행정구역 개정으로 오키 도사가 폐지되고 오키지청이 수립된 후 독도 관련 행정 조치도 취해야 했지만 1953년까지 방치한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점은 현재 일본 측에서는 은폐하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독도에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는 지표이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한국병합조약에 의해 ‘영원히’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고 인식되었기에, 일본 측은 굳이 독도를 따로 떼어 내어 일본의 영토로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도는 그 행정적인 소속 관계와 상관없이 지리적인 특성에 의해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펴낸 저술에도 표출되었으며, 일본 측 공식 자료에도 ‘獨島’라는 명칭이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홍재현은 1883년에 울릉도에 입도하여 일제강점기까지 울릉도에 거주한 인물로 그의 손자가 독도의용수비대장으로 알려진 홍순칠이다. 홍순칠은 조부가 1898년 일본 시마네 현에 건너가 독도에서 일본인의 불법 강치잡이에 대해 항의를 하여 일찌감치 독도를 수호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그 증거로 1898년에 일본 시마네 현에서 가타오카(片岡) 형제와 찍은 사진을 제시했다. 일본 시마네 현의 죽도문제연구소가 펴낸 『제3기 「죽도문제에 관한 조사 연구」최종보고서에는 이시바시 도모키(石橋 智紀)가 「메이지30년대 초 시마네현을 방문한 울릉도민과 홍재현의 허실(明治30年代初頭に島根県を訪れた鬱陵島民と洪在現の虚実)」 이라는 논문에서 위의 홍재현의 활동상은 거짓이며 그는 울릉도에서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 었다고 밝히고 이를 근거로 하여 1947년에 독도와 관련한 홍재현의 진술서는 자신의 친일 행위를 덮기 위해 위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연구는 이와 같은 이시바시의 연구를 재검토함과 아울러 그동안 주목되지 않은 홍순칠과 그의 처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자료를 중심으로 홍재현의 행적을 재검토한 것이다. 연구결과, 홍재현은 1896년에 울릉도에 입도한 가타오카 요시베(片岡吉兵衛)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울릉도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의 융화를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 였다. 그 과정에서 1898년 일본 시마네 현에 있는 가타오카 요시베 자택을 방문하여 그의 형제로부터 환대를 받고 방문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실은 문제의 사진이 보관된 상자 뚜껑의 안쪽에 적혀있다. 따라서 1898년에 홍재현이 일본에서 촬영한 사진은 가타오 카와의 친분관계를 나타내는 사진이지 그의 독도수호활동을 증명하는 사진은 아니다. 아울 러 일제강점기에 홍재현은 일제 식민통치협력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울릉도의 조선인과는 갈등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시바시의 주장처럼 1947년에 이루어진 그의 독도관련 진술서가 그의 친일행 위를 은폐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진술서는 당시 남조선과도정부 및 조선 산악회의 활동 과정에서 울릉도 현지조사를 통해 채록된 산물이며 1898년의 渡日에 대해 서는 언급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홍재현의 1898년의 독도 관련 활동상이 허구였다고 해서 1947년의 홍재현의 진술서를 거짓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이 글은 메이지 후기에 발행된 대표적 지리지에 독도와 관련하여 어떤 기술이 이루어지 고 있는지 그 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분석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1890년 전후 일본의 지리 인식의 특징을 검토하여 지리 지 발간의 시대적 배경을 검토한다. 이를 바탕으로 요시다 도고(吉田東伍,1864~1918)의 『大日本地名辭書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도의 시마네 현 강제편입 후에 발간된 향토지로서 오쿠하라 헤키운(奧原碧雲)의 두 저술인 『竹島及鬱陵島』와 『隱岐島誌』를 비교 검토하여 독도 관련 기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메이지정부는 1870년대 초부터 근대적인 행정체제 정비 및 국토 개발, 군사적 목적 하에 자국의 영토와 영해를 파악하기 위한 근대적 측량 사업을 시행하고 이를 토대로 국책사업으 로 지도 제작과 지리지 편찬을 진행해 왔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 본토에 서 멀리 떨어진 도서에 대한 영토편입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 가운데 동해의 울릉도에 대한 개척 논의가 일어난 적도 있으며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울릉도에 도항하여 벌목과 어로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가 이의 제기를 하여 일본은 1883년, 울릉도 재주 일본인 강제송환 및 도항금지 조치를 발령했다.
이 조치 이후에 간행된 일본의 지리지에는 이 금지령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즉, 문부성에서 지리교과서 편찬을 담당한 적 있는 오쓰키 슈지의 개정일본지지략, 일본 의 지질조사소를 이끈 하라다 도요키치의 「일본군도(日本群島)」, 요시다 도고의 대일본지 명사서에는 이 조치로 인해 울릉도가 조선에 귀속한다는 것이 한일양국에 결정되었음을 언급하였다. 한편 요시다 도고의 大日本地名辭書(1900)의 「오키」 부분에는 한일양국의 지리지를 구사하면서 일본에서 말하는 송도는 삼봉도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자료는 메이 지 후기의 대표적인 지리서로 평가받고 있을 뿐 아니라 한일양국에서 아직 언급되지 않는 자료이다. 더욱 1905년 독도의 강제편입 이전에 간행된 지리지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크다.
1905년 일본영토에 강제로 독도를 편입한 다음에 저술된 오쿠하라 헤키운의 다케시마 및 울릉도와 은기도지를 비교해보면 일본의 독도 편입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료 에 대한 자의적인 재해석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1915년에 저술이 완료된 은기도지에는 그것이 심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이제까지 선행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메이지 시대 문헌들을 중심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 본 것이다. 독도의 일본에 대한 역사적 영유권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분리하여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였으나 독도는 일본의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근대국가형 성기에 과연 이러한 인식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있었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본 논문은 메이지시대의 울릉도와 독도 인식은 전 통시대와 마찬가지로 울릉도를 중시하였을 뿐으로, 울릉도개척논의는 존재했으나 독도를 단독으로 주시한 견해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 당시 메이지 지식인의 언설에서 볼 때 울릉도와 독도를 동해상에 위치한 두 섬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이를 따로 떼어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점, 메이지 시대 이전과 이후의 지도자료를 통해 볼 때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일본의 영토로 간주한 지도도 있지만 이 두 섬을 조선의 영토로 간주한 지도, 혹은 아예 울릉도와 독도가 표시되지 않은 지도가 존재했으며 메이지 시대 지도에도 독도를 일본의 영토권 내로 표시한 지도는 없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배타적 영토관념이 희박했던 시대에 독도에 대한 관심이 불명료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즉,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영토편제하기 이전인 19세기 후반기에 일볹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생각한 흔적은 없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