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8일 일본 중·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서가 독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주장을 기술하도록 개정된 이후 검정을 통과한 일본의 모든 초·중·고 사회과 교과서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내용이 기술되었다. 교과서보다 앞서 독도교육을 주도한 것은 시마네 현이다. 시마네현 竹島문제연구회 제3기 최종보고서에는 고등학교 일본사A/B 학습지도안 (이하, 학습지도안)이 제시되어 있다. 제2기 竹島문제연구회 활동 기간에는 지리A/B, 공민 (정치경제, 현대사회), 세계사A/B 학습지도안이 작성되었는데, 이번 학습지도안은 竹島문 제연구회 차원에서의 고등학교 독도교육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본고의 목적은 첫째, 시마네현 竹島문제연구회 제3기 최종보고서를 소재로 일본 초·중· 고 교과서의 독도기술과 시마네현 독도교육 자료를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둘째, 시마네현이 실시하고 있는 독도교육 실태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향후 일본 학교현장에서의 독도교육 방향을 전망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시마네현에서 작성한 일본사 학습지도안과 교과서 기술의 공통점은 첫째, 일본이 국제법에 근거하여 독도를 편입한 사실을 가르친다는 학습 목표와 논리, 근거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둘째, 독도 편입 경위를 러일전쟁과의 관련성이 아니라 강치 잡이와 연계시켜 설명하고 있고, 편입 후 시마네현이 독도에 대해 행정력을 행사하고 어업활동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마네현에서는 ‘독도는 일본 침략에 의해 최초로 희생된 땅’이라는 한국 주장에 대한 반론을 중시하고 있다. 그리고 시마네현에서는 교원연수, 고등학교 입학 선발 시험 문제 출제, ‘竹島의 날 주간’ 계기수업, 교과 시간 등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竹島학습 이 추진되고 있다. 시마네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독도학습과 교육 자료는 다른 지역에서도 모범적인 사례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 행사는 역사적, 국제법적 근거와 법령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일본 교과서 기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교과서 기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청소년들의 국제이해에 교과서가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일본 교과서 독도기술과 시마네현 독도학 습은 한일 간 협력의 필요성이 커지는 현실과 역행하는 것으로 한일관계는 물론 동아시아 공생과 번영의 걸림돌이 된다. 따라서 대응방안도 이러한 차원에서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한일 양국의 청소년들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자료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독도 영유권에 대해 논의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편견을 해소하도록 해야 한다.
홍재현은 1883년에 울릉도에 입도하여 일제강점기까지 울릉도에 거주한 인물로 그의 손자가 독도의용수비대장으로 알려진 홍순칠이다. 홍순칠은 조부가 1898년 일본 시마네 현에 건너가 독도에서 일본인의 불법 강치잡이에 대해 항의를 하여 일찌감치 독도를 수호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그 증거로 1898년에 일본 시마네 현에서 가타오카(片岡) 형제와 찍은 사진을 제시했다. 일본 시마네 현의 죽도문제연구소가 펴낸 『제3기 「죽도문제에 관한 조사 연구」최종보고서에는 이시바시 도모키(石橋 智紀)가 「메이지30년대 초 시마네현을 방문한 울릉도민과 홍재현의 허실(明治30年代初頭に島根県を訪れた鬱陵島民と洪在現の虚実)」 이라는 논문에서 위의 홍재현의 활동상은 거짓이며 그는 울릉도에서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 었다고 밝히고 이를 근거로 하여 1947년에 독도와 관련한 홍재현의 진술서는 자신의 친일 행위를 덮기 위해 위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연구는 이와 같은 이시바시의 연구를 재검토함과 아울러 그동안 주목되지 않은 홍순칠과 그의 처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자료를 중심으로 홍재현의 행적을 재검토한 것이다. 연구결과, 홍재현은 1896년에 울릉도에 입도한 가타오카 요시베(片岡吉兵衛)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울릉도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의 융화를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 였다. 그 과정에서 1898년 일본 시마네 현에 있는 가타오카 요시베 자택을 방문하여 그의 형제로부터 환대를 받고 방문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실은 문제의 사진이 보관된 상자 뚜껑의 안쪽에 적혀있다. 따라서 1898년에 홍재현이 일본에서 촬영한 사진은 가타오 카와의 친분관계를 나타내는 사진이지 그의 독도수호활동을 증명하는 사진은 아니다. 아울 러 일제강점기에 홍재현은 일제 식민통치협력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울릉도의 조선인과는 갈등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시바시의 주장처럼 1947년에 이루어진 그의 독도관련 진술서가 그의 친일행 위를 은폐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진술서는 당시 남조선과도정부 및 조선 산악회의 활동 과정에서 울릉도 현지조사를 통해 채록된 산물이며 1898년의 渡日에 대해 서는 언급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홍재현의 1898년의 독도 관련 활동상이 허구였다고 해서 1947년의 홍재현의 진술서를 거짓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일본은 1905년 어장 독점을 기도한 강치어민 나카이 요자부로를 내세워 독도를 불법 편입하였다. 나카이 요자부로는 어장을 독점하고자 모든 권력을 이용해 어장을 폐쇄하고 죽도어렵합자회사의 사장이 되어 어장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1925년 독도어장은 오키 고가 촌(五箇村) 구미(久見)어민들에게 이동되었고 울릉도인들과 공동 경영되었다. 해방이 되기 까지 독도어장의 실질적 이용자는 울릉도 잠수기어민이었다.
현재 일본은 자신들의 생업 터전이었던 독도가 해방 후 한국이 공해상에 일방적으로 그은 평화선(1952년 1월 18일)에 의해 ‘불법점거’되었다는 사실을 홍보하며 오키 주민들의 구술과 기억, 그리고 독도에서 사용된 수경, 독도의 전복 껍질, 1935년 독도어업을 기록한 어업 일지 등을 그 증거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인베 마사히데(忌部正英)의 보고서는 오키의 구미지역에서 어업권자의 직계가족과 일부 지역민들에게 회자되는 강치어업이었다. 이들의 기억은 최대 6~7년간의 기억으로 강치 수 십마리의 생포와 운반에 관한 것들이었다. 죽도어렵합자회사 해체이후 독도는 울릉도인의 독점어장으로 오키인의 강치포획은 비정기 적, 단기적으로 포획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본 논문은 메이지(明治) 초기 일본의 국가최고통치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의 기능과 성격을 밝히고, 1877년 독도의 영유권애 관련된 ‘태정관지령(指令)’의 의미와 효력을 분석한 것이다. 태정관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행정부의 최고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을 통할하는, “천하의 권력은 태정관에 귀결되는” 국가 최고통치기관이었다. ‘태정관지령’으로 사법부의 판결도 무효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태정관이 발하는 법령의 형식으로는 포고布達, 달達, 고시, 지령이 있다. 1886년에 ‘공문식公文式’의 제정으로 포고와 달은 법률로, 그 이하의 법령은 내각 및 각성의 명령 즉 각령 및 성령 등의 형태로 흡수된다. 지령은 하급기관의 질의에 대한 유권해석의 성격을 가진 회답이다. 1877년의 독도관련 ‘태정관지령’은 내무성괴 시마네 현의 질의에 대한 태정관의 유권해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태정관지령’은 영토(주권)의 판도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질의를 한 하급기관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전체에 효력을 미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즉 1877년의 ‘태정관지령’은 헌법의 영토조항에 상당하는 가치를 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법령이 그 후에 제정된 법령에 모순되지 않는 한 현재까 지도 그 효력이 미치는 것으로 봐야하기 때문에, 독도의 조선 귀속을 확정한 1877년의 ‘태정관지령’은 현재도 유효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연장선상에서 헌법적 가치를 지닌 ‘태정관지령’을 무시하고 일본이 1905년 2월 시마네 현 고시를 통해 독도를 편입한 것이 법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일본 정부가 태정관지령의 변경을 명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한 시마네 현 고시는 상위 법령(태정관지령)을 위반한 무효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정치한 이론화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긴다.
1948년 미군에 의한 독도폭격사건은 많은 인명과 재산손실을 초래한 사건으로 전 국민의 슬픔과 공분을 자아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 그 진상이 명백히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을 뿐 아니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1948년 독도폭격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중요한 연구 성과들이 있었다. 특히 최근의 몇몇 연구는 이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밝히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1948년 독도폭격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지금까지 1952년 2차 독도폭격사건이 발생한 배경에 대한 의혹은 상당히 밝혀졌지만, 1948년 1차 독도폭격사건의 발생 배경에 대한 의혹은 아직까지 충분히 규명되지 못했다. 이 연구는 기존의 독도폭격사건 관련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1948년 독도폭격사건의 경과를 재구성해보고, 1948년 독도폭격사건이 발생한 배경에 대한 의혹을 밝혀보고자 한다. 1차·2차 독도폭격은 울릉도·독도를 생업터전으로 삼고 있는 어민들에게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특히 1948년 1차 폭격사건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기에 범국민적 아픔과 공분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우리정부와 국민이 독도영유권 수호에 대한 의지를 더욱더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 독도를 양국 간의 외교 교섭의 대상으로도, 제3자에 의한 분쟁해결의 대상으로도 인정하지 않지만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독도 문제를 국제적인 법정에 강제적으로 제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국제 사회의 여론을 독도 문제에 관한 가상 법정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최근 일본의 영토 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적으로 영향력·발신력이 있는 제3국에서 일본 입장에 대한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하면서 영토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영어로 전달하는 정보 발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움직임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학자가 아닌 제3국 학자의 독도 관련 연구 동향을 살펴보는 것은 독도에 관한 국제사회의 여론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독도 문제에 관한 법적 연구에 한정하여 보면 제3국 학자의 연구는 시기적으로는 1990 년대 이전에는 보기가 어렵다. 1990년 말에 영어로 된 제3국인의 독도 연구 논문이 등장하여 2000년대에 그 수는 늘어났다. 그러나 2010년 대에 들어 가장 많은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제3국 학자들의 독도 영유권에 관한 논고들은 거의가 독도에 관하여 한국이 일본보다 우월한 법적 영유근거를 가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 일본의 독도 문제 제소 주장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는 것이 많다. 이들 제3국 학자들의 독도 연구에는 한국 학자가 영어로 제공하는 지식과 정보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3국 학자의 독도 연구 논고들은 일종의 가상의 법정과 같은 역할을 하여 독도에 관한 한국과 일본의 국내 여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독도 문제에 관해서는 제3국 학자와 국민과 같이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국의 주장에 동의하도록 하는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과 논리가 필요하다.
1951년 9월 8일 48개 연합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대일평화조약”(the Peace Treaty with Japan)에 한국은 체약당사국이 아니나 동 조약 제21조의 규정에 의해, 동 조약 제2 조, 제4조, 제9조 그리고 제12조는 한국에 적용된다. 한국에 적용되는 제2조 (a)항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은 포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편 “조약법 협약”은 “제3자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조약은 그 제3자가 동의의 의사표시를 할 때 그 조약으로부터 권리가 발생한다라 고 규정하고, 제3자가 동의의 의사표시를 하지 아니해도 동의의 의사표시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제36조 제1항). 한국은 동의의 의사표시를 한 바 없으며 동 조의 규정에 의해 동의의 의사표시를 한 것으로 추정되어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은 한국에 대해 효력이 발생한 것으로 된다.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 전단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다(이하 “독립승인조항”이라 한다). 이는 동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한국은 비 독립국가의 지위에 있었음을 전제로 한 것으로 그것은 비 독립상태의 법적 근거인 "한일합방조약“이 유효함을 전제로 한 것이다. (a)항 후단은 “일본은 …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바(이하 “권리포기조항”이라한다), 이는 동 조약이 발효 되기 직전까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갖고 있지 아니한 권리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의 근거인 “한일합방조약”이 유효함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 연구는 이러한 법적 효과를 지적하고, 이러한 법적 효과를 배제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이 조약의 어떠한 조항도 한일합방조약이 유효한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는 내용의 “해석선언”(interpretative declaration) 또는 “해석유보”(interpretative reservation)를 함을 요한다는 제의를 하기로 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바렌츠해에서의 러시아-노르웨이간의 해양경계 분쟁 해결과 관련된 해양경계획정의 국제법과 그 적용에 대해 확인하고 해명하는 것이다. 이 연구의 2/3 이상은 해양경계획정의 국제법과 법적 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UN해양법협약(LOSC)이 효력을 발휘한 이후, 해양경계획정 문제는 일련의 법원의 판결기록을 통해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이러한 기초는 LOSC 발효이전에 해양경계를 획정하는 국제법의 개념, 역사, 발전을 통해 놓여졌다. 오랫동안의 경험은 좀 더 높은 수준의 확실성을 가지고 해양경계획정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했다. 이런 국제법과 법적 틀을 바렌츠해에서의 러시아와 노르웨이간의 해양경계획정 문제에 적용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해양경계획정 문제에 대한 국제법과 법적 틀에 대한 좀 더 명확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와 노르웨이 간 바렌츠해의 해양경계에 대한 조약은 거의 40여년 동안의 과정을 종결지었다. 조약이 북극해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시점에 타결되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해빙(sea-ice)의 해빙(解氷) 전망과 북극해의 해양수송 가능성 및 천연자원, 특히 석유자원에 대한 접근 가능성은 그 시점에서 양 당사국이 조약에 합의하도록 영향 을 미쳤을 것이다. 두 북극해 연안국들은 이런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고,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적 권리와 국제수송에 대한 관할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 간의 차이점을 제거할 필요 가 있었을 것이다. 서로 중첩되는 주장의 제거는 또한 제3국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하게 했다. 북극해 해양경계에 관한 노르웨이-러시아 조약의 더 광범위한 영향은 훨씬 더 불확정 적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북극해 지역의 질서정연한 거버넌스에 더해질 것이다.
표제에 쓴 책은 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가 4년 전에 발간한 논문집 『다케시마 문제란 무엇인가』(‘앞의 책’으로 약칭)를 발전시키고 동시에 일반인을 위해 알기 쉽게 쓴 것이다. 새 논고로서 한·일 양국이 각각 발행한 팸플릿에 대한 비판, “근대 일본의 해도와 수로지”, 1950년대 한·일 양국 간 영유권 논쟁, “고유 영토”론 등이 추가되었다.
이번 책은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근대 전기까지 한·일 양국은 어느 쪽도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경우, 겐로쿠(元禄) 다케시마(竹島)일건, 덴포(天保) 다케시마일건, 메이지 태정관(太政官) 지령에 의해 독도 영유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 논증은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폭넓은 사료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이케우치의 조선 사료 분석은 기무라 간(木村幹)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 사료의 분석에 비하면 큰 낙차가 있으며 문제가 많다. 특히 관찬서 『춘관지』의 분석은 내용의 이해 뿐만 아니라 그가 중시하는 문헌사학의 관점에서도 의문이다.
또한 이케우치는 이번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 현대사를 다루었다. ‘앞의 책’에 대해 기무라는 선행연구의 검토가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는데, 이런 비판이 이번 저서에서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듯하다. 특히 영미 공동 초안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으며, 따라서 이에 근거하여 도출된 결론은 의문이다.
독도는 서기 512년 이래 대한민국의 땅이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 (Spanish Armada)가 영국 침략에 실패한지 4년 후, 이 지구상 반대편에서는 일본이 1592년 4월 12일 30만 대군으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구실삼아 조선국을 침략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이 이 땅에서 벌어졌다. 이순신 장군의 일본 해군 섬멸과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 난 의병(義兵)과 명(明)의 원군의 분전으로 침략군 왜군은 패퇴하였다. 그러나 이 7년 전쟁으로 조선국토는 황폐화되었고, 동해상 조선과 일본 간 해상 국경은 장기간 일본 어선들의 불법월경으로 혼란 상태에 있었다. 드디어, 1693년 3월 우리 어부들이 독도 근해에서 불법 조업 일본 어부들에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때 납치된 우리 어부는 안용복(安龍福) 과 박어둔(朴於屯)이었다. 일본어에 능숙하였던 안용복은 일본의 지방 정부 및 막부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국 강원도에 속한 우리 땅이며, 이곳 해역에서 조업하는 조선 어부들을 불법 월경한 일본 어부들이 납치한 것에 항의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그 결과 일본 막부는 조선어부들을 동년 9월 귀국조치 시켰다.
그러나 귀국한 조선 어부들과 함께 보내온 일본국 서계에, 앞으로 “일본 땅”인 울릉도에 조선어부들의 출어금지를 요구하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국은 “일본 땅 울릉도”주장을 묵과할 수 없었다. 조선 정부는 1694년 3월 이의를 제기하는 서계를 일본측에 보냈다. 이를 계기로 조· 일 간에 수년에 걸친 외교 교섭인 소위 “울릉도 쟁계”가 이어졌다. 드디어 조선 정부는 1698년 3월 조선 예부 이선부(李善溥) 명의로 서계를 일본측 에 보냈으며, 동 서계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국 영토임은 『동국여지승 람(東國輿地勝覽)』및 그 부속지도인 「8도총도(八道總圖)」에도 명시되어 있음을 역설했다. 그 후 일본국이 동 조선국 서계 내용을 수용하는 1699 년 1월자 서계를 조선 정부에 보내옴으로써,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 의 영토 주권은 국제법상 그 완성을 성취했다. 이렇게 완성된 조선의 영토 주권은 그 소유국인 조선의 명시적 포기가 없는 한 국제법상 영유권은 유지된다(국제판례: 「불란서와 멕시코 간 클리퍼튼섬(Clipperton Island) 분 규사건(1931년)에서 중재재판관 Victor Emmanual의 판시」).
울릉도 및 독도의 조선 영유권이 완성된 이후 역대 일본 정부는 1905년 일본 정부가 국제법을 위반하며, 불법적으로, 은밀하게 러·일 전쟁 중 ‘독도’를 일본에 편입 조치 할 때 까지 조선의 그 영토 주권을 200여 년간 존중하여 왔던 것이다. 1836년 죽도도해금지령을 위반한 일본인 어업자 아이즈야 하치에몽(會津屋八衛門)을 1837년 처형한 것과 1877년 3월 29일 자 일본 정부 최고 기관인 태정관 지령이 그 증거가 된다.
태정관 지령은 “일본해내 죽도 외1도(독도 지칭)는 일본과 관계없음을 마음에 새길 것”을 일본 내무성에 시달했던 것이다(동 일자 1877.3.29). 일본 관보의 전신 격인 「태정유전(太政類典)」에는 “일본해내 죽도외 1도를 판도 외로 정함”이란 제목 하에 태정유전 내용을 실었던 것이다. 특히 이 태정관 지령문 내용이 중요한 것은 태정관 스스로 이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조사해 보니, 이미 전 막부 정부와 당해국 (조선)이 수년간 내왕하며 외교 교섭 결과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관계없게 된 것을 근거로 한 일종의 지적(외교적 종결에 관한)으로서 기존의 사실을 증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대 일본 정부가 조선국의 영토 주권을 존중하여 왔던 ‘독도’를 소위 “무주지”라는 명목 하에 은밀히 일본 영토에 편입 결정한 1905년 일본 정부 결정은 국제법상 금반언원칙(principle of Estoppel)에도 저촉되며, 원천 무효인 것이다. 원천 무효인 동 일본 정부의 편입 결정에 근거를 둔 ‘독도’ 편입 시마네현 고시 제40호(1905. 2, 22)도 자동적으로 무효임은 재론을 요치 아니한다.
1905년 ‘독도’를 불법 편입한 일본은 그 5년 후인 1910년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국을 강제 병합하였으나, 이 역시 불법 조치로 무효임은 재론을 요치 아니한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말까지 조선을 폭압으로 식민지 통치하였으나, 그것은 국제법상 영유권이 없는 불법적인 무력에 의한 강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정부가 무치오(Jon M. Muccio)를 미국정부의 특별 대표로 파한 시 1948년 8월 12일자 미국 정부 성명에도 명시되어 있다. 동 성명에서 미국 정부는 “...비록 일본에 의 한 조선 병합은 1945년 8월 및 9월 소련과 미국군의 조선 점령으로 효율 적으로 종결되었지만, 4대강국이 그렇게도 엄숙하게 서약했던 조선 (Korea)의 자유와 독립은 그 실현이 지연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 즉, 일 본의 무력에 의한 1910년의 불법적 편입은 (카이로선언 중 “폭력 과 탐욕 에 의한 탈취”를 함축) 한·일병합은 미소양국군 (armed forces)의 한반도 점령으로 종결되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우리는 한·일 관계를 고려 시 고 노무현 대통령의 2006년 4월 25일자 한·일관계 특별담화 (대·국민)중 다음 지적을 마음에 새기고 접근해야 마땅할 것으로 본다.
(생략)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한반도 침략 전쟁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빌미로 우리 땅에 군대를 상륙시켜 한반도를 점령했습니다. 군대를 동원하여 궁을 포위하고 황실과 정부를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토지와 한국인을 마음대로 징발하고 군사시설을 설치했습니다. 우리국토에서 일방적으로 군정을 실시하고 나중에는 재정권과 외교권마저 박탈하여 주권을 유린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도”는 한국인의 품에 다시 돌아 왔으며, 그 국제법적 근거는 카이로선언 (1943.12.1.), 포츠담선언 (1945.7.26.), 스카핀(SCAPIN) 677(1946.1.29.) 및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19(d)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일본 정부가 1951년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서명 후 동 조약 비준을 위하여 일본 의회에 동 조약을 보낼 때 함께 보낸 「일본영역참고도」에 ‘독도’는 울릉도의 속도로서 일본 국경선 밖의 한국 영역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상기 국제법적 제 근거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중의원에서 동 비준 심의 시 동 영역도상 ‘독도’의 위상에 관한 논란이 있었으나 동 조약은 그대로 비준되었던 것은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의회도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인정한 명백한 국제법적 증거가 된다. 이로써 국제법상 한·일간 소위 “독도영유권 문제”는 그 종언을 고한 것이다. 항간에 ‘독도’와 관련하여,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2조(a)에 “울릉도”만 명시되어 있고, ‘독도’는 명시되어 있지 아니하여 ‘독도’는 일본이 방기해야 할 대상에서 빠진 것이다라고 운운하나,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동 조약 2조(a)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일본은 코리아의 독립을 인정하며,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코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를 포기 한다.
동 조항은 코리아의 ‘독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와 ‘4,195개의 도서 (명시된 3개 도서 외)’가 누락되어 있다. 이것은 ’코리아‘의 사실과 거리가 먼 우스광스러운 (absurd) 표현이다. 이런 경우 조문 해석에 관하여,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 은 동 31조의 규정에 의하여 조약문에 사용된 용어에 주어진 통상적 의미로 해석하되 그 의미가 모호할 때는 동 제32조 (보충적 해석수단)에서, 당해 조약의 준비자료 및 그 조약체결환경 등을 포함한 보충적 해석수단에 따라 해석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Recourse may be had to supplementary means of interpretation including the preparatory works of the treaty and the circumstances of its conclusion in order to confirm the meaning resulting from the application of Article 31 or determining the meaning...
동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주진을 주도한 미국의 대표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동 조약조인 3일 전에 동 조약 체결 준비 과정 및 그 체결 환경 등에 관한 연설을 하였는바 (1951.9.5.), 그 연설 내용은 전기 비엔나협약 제32조에서 규정한 조약문의 보충적 해석수단으로 활용대상이 되는 것이다. 동 연설에서 덜레스 대표는 일본의 영토 주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본의 영토주권은 무엇인가? 제2장이 이를 다룬다. 일본에 관한한 실제로 6년 전에 시행된 포츠담항복조건의 영토규정을 일본이 공식적으로 인정(비준) 하는 것이다.
그렇다. 6년전 스카핀 677호(1946.1.29.)에 의거, 연합국최고사령관(SCAP)이“울릉도, 독도, 제주도 와 코리아”를 일본주권에서 명문으로 제외 조치하였으며, 그 위에 한국인들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평화조약 2조(a) 상 “울릉도”에는 ‘독도’가 그 부속도서로서 포함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즉, 일본이 동 조약에 의거 “울릉도”를 포기할 때 그 속도인 ‘독도’도 함께 포기된 것이다. 또한, 이를 뒷받침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일본정부가 평화조약에 서명 후 동 조약비준을 받기 위하여 일본 의회에 제출 시 함께 제출한 「일본영역참고도」가 있다. 동 참고도에도 ‘독도’는 울릉도의 속도로서 일본국경 밖의 한국영역에 들어가 있다. 그렇게 ‘독도’가 그려진 것도 상기 비엔나협약 32조의 해석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일본영역참고도」에 관한 일본 중의원 제17회 외무위원회(1953.11.4.)의 속기록 발췌문에서도 동 영역참고도상 ‘독도’의 위상에 관하여, 즉 분명히 한국 땅으로 되어 있는 것에 관한 일본 의회내의 인식을 찾아 볼 수 있다. 동 속기록 발췌문 중 가와가미 칸이치(川上貫一) 위원의 질의는 다음과 같다.
처음부터 이것은 애매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첫째로, 이 평화조약을 비준 당시 제출한 지도, 뒤에 정부가 서둘러 취소했습니다만, 그 지도에 「일본영역참고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영역”이라고 쓰여 있는 이 지도에 분명하게 “竹島”는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의원위원회에는 제출되지 않았고, 중의원에는 제출되었습니다. 왜 제출을 하다가 중단 되었을까요? 이는 미국이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가다(小紡) 부총리께서 노농당의 질문에 대해 평화조약에 의해서 “竹島”는 우리(日本) 영토라고 대답하지 못 하고 국제법에 따라 우리 영토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평화조약에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면, 그렇다고 대답해도 되지 않았을까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 일본정부는 평화조약상에서 “죽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증명한 자료를 제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출하고 있지 않아서, 제출을 다시한번 촉구하는 바입니다.
소위 “독도문제”는 과거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역사 문제이지 단순한 한 낙도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일찍이 ‘독도’에 대한 조선국의 영토 주권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국의 강원도에 속한 영토임을 명시한 조선국 서계 (1698.3월)에 대하여 그 조선의 입장을 수용한 1699년 1월자 일본국 서계에 의하여 국제법상 조선국의 영토 주권이 완성된 것이다. 외교 교섭을 통하여 이렇게 완성된 영토 주권은 소유 국가가 명시적으로 그 영토 주권을 포기하지 아니하는 한 국제법상 그 영유권이 유지된다. 조선국은 ‘독도’영토주권을 포기한 바가 없다. 그리고 역대 일본정부가 200여년 간 이 조선의 영토주권을 존중하여 왔던 것이다.
그런데 1905년의 일본정부가 국제법을 위반하며, 러·일전쟁 중 은밀하게 ‘독도’를 소위 “무주지”란 구실을 붙여 일본에 편입결정 했던 것이다. 이는 국제법상 금반언 원칙(principle of Estoppel)에 저촉되어 원천 무효가 됨은 재언을 요치 아니한다. 동 원천 무효인 일본 내각의 편입 결정에 근거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1905.2.22.) 또한 무효가 됨은 물론이다. 일본정부는 1910년 무력을 배경으로 불법적으로 소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이 불법적 병합조약 체결 이전부터 ‘독도’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관할하여 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유권이 없는 폭력에 의한 강점에 불과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도’는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8), 스카핀(SCAPIN) 677 및 평화조약 19조(d)에 의거 다시 한국인의 품에 돌아왔다. 포츠담선언(8)에 근거한 스카핀 677에 의거 연합국최고사령관은 “울릉도, 독도, 제주도 및 코리아”를 명문으로 일본주권에서 제외조치 하였다. 한국인들은 평화조약 체결 3년 전인 1948년 8월 15일 그 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제반 여건에서 볼 때, 오늘날 일본 정부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2조(a), 동 조약 19조(d), 포츠담선언(8) 및 스카핀 677호 (1946.1.29.)를 위반할 뿐만 아니라 유엔 헌장 제2조에 따른 유엔 총회 결의 2625 (1970.10.24.), 즉 “타국의 영토는 협박과 무력의 사용으로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협박과 무력사용으로 획득한 어떤 영토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를 위반하는 것임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한·일간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을 위하고, 동북아평화를 위하여 한국의 독도영유권 존중이 요망된다.
이 논문은 19세기 말엽, 동해라는 바다 명칭이 일본해 또는 다른 명칭으로 분지되는 과정과 관련된 한ㆍ일 양국 간의 인식을 통해 식민주의적 권력과 지식체계가 어떻게 상호구성적으로 이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실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연구자는 외교문서ㆍ신문기사ㆍ고지도ㆍ어업협정문서ㆍ연설문 등에 나타나는 식민주의적 담론의 구성과 그 전략의 실천, 영토 및 해양경계에 관한 지역지식 및 가치체계의 전도양상, 명칭의 역사적 근원에 대한 해석방식 등에 대해 포괄적 접근을 하였다.
19세기 말엽은 한ㆍ일 양국에 있어서 해양공간과 관련된 영토성과 역사성이 변화하는 변곡점에 위치한다. 이 시기에 유럽의 식민지 세력이 아프리카에 확대되기도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도 서구의 문명개념이 식민정책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 사회가 식민지상품경제체계로 들어가면서 국가경계를 넘은 식민주의적 상업공간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서구의 문명개념은 식민주의적 영토성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경우, 서구의 진화론적 지식을 수용하면서 이에 기반을 둔 문명관념을 통해 기존의 아시아적 가치체계의 전도와 ‘군국’(軍國)의 새로운 영토적 범주의 창출, 영토화된 공간에 대한 개념화 등을 정립하였다. 이 시기 일본식 식민주의를 창출한 사상가들은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면서 기존의 동아시아 사상에 내재하던 ‘동문(同文)’,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개념을 일본중심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동해보다 과거 서구의 탐험가들이나 외교관들이 제작한 고지도 속에 기록된 일본해라는 바다 명칭을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과 주권선의 설정을 통한 영토성 구축, 후쿠자와 유기치의 문명과 반개(半開)라는 일본식 진화론적 사상의 정립, 참모본부ㆍ흑룡회ㆍ수산업자 등이 일본해 명칭을 사용한 사례들은 바다 이름이 문화 정치적ㆍ군사적 차원에서 상호영향을 주면서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19세기 한국인들의 바다 개념은 연해ㆍ내양ㆍ외양ㆍ원양 등의 범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국제해양법에서 정한 영해와 인접수역을 포괄하는 해역과 어느 정도 유사한 범위를 나타내주었다. 그리고 당시에 동해라는 바다 명칭은 동아시아인들이 하늘과 땅, 해, 달, 별자리, 산악, 바다, 강 등을 분류하고 위계질서를 정하며 그 방위를 주재하는 신을 위치시키는 공간인식방식에서 형성된 개념이었다. 동해란 동ㆍ서ㆍ남ㆍ북의 바다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는 각 바다마다 신이 있다고 믿어 양양에 동해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동해신묘를 두었다. 이 점은 동해에 대해 조선왕조의 왕권이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동해ㆍ조선해ㆍ한국해로, 일부 일본인들 중에는 일본 서해로, 중국의 왕지춘(王之春)은 고려해협 등으로 불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말엽 일본의 명치 정부에서는 동해 대신에 일본해로 표기하거나 불렀다. 영토확장을 지향하는 식민주의자들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과정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공칭화하고자 하였다. 19세기 말엽, 식민주의적 영토지식과 담론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바다공간을 군사적 지배영역으로 전환하면서 동해를 일본화된 해양공간으로 범주화하는 과정과 관련됨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해양공간에 대해 영토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명치 정부의 관료ㆍ군부ㆍ지식인ㆍ사상가ㆍ소기업가 등의 식민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한 영토적 장소만들기와 그 지배권의 제도적 실천 등이 원동력이 되었다.
19세기 말엽, 일본해가 동해 대신에 바다 이름으로 부각되는 과정에는 일본과 한국의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구조 속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 바다 분류체계의 해체, 일본의 식민주의 확대를 통한 동해 지배권 확대, 일본해 명칭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 등이 상호영향을 주었다. 특히 동해를 일본해로 명명함으로써 일본의 영토가 영해로 둘러싸여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문화 정치적 전략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