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목적은 1953~1954년 일본의 독도 침범행위와 그에 대한 한국의 대응에 관한 사 건별 사실관계를 보다 명확히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 시기 일본의 독도 도발 동향과 한국의 독도 이용 관리 현황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한일 양국의 자료 에 따르면 사건별 사실관계가 서로 다른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일 양측의 1, 2차 자료를 비교 검토함으로써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해보고자 한다. 일본 측의 독도 침범행위는 1953년 5월 독도가 폭격연습지에서 해제가 공시된 후 본격화 되었다. 그후 1953~1954년간에 있었던 일본의 독도 침범행위는 26~37건에 이른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독도 침범행위 중 1953년에 있은 17건, 1954년에 있은 9건에 대해 살펴보았 다. 이 기간 일본의 침범행위는 고등학교 실습선에 의한 1건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침범행위 가 일본 순시선이나 관공선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편 독도를 영유하고 있던 한국 측에서는 정 부와 민간의 협력을 통해 일본의 독도 침범행위를 차단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가 해산된 이후 독도의용수비대원의 독도 수호활동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독도경비대로 활동하며 독도경비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경북경찰에 특별 채용된 대원은 경찰로 활동하면서 독도경비업무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독도경 비대의 안정화에 기여하였다. 둘째, 홍순칠을 중심으로 독도개발, 사단법인설립 등 다양한 민간 활동을 한 것이다. 대부분의 민간 활동이 정부의 불허로 시행되지 못했으나, 1990 년대에 정부 및 기업 주도하에 해당 사업들이 시행되며 결실을 맺었다. 이처럼 독도의용수 비대가 해산된 이후에도 대원들은 직·간접적으로 독도 수호활동에 기여하였다.
나가시마 히로키(永島広紀)는 통감부 시기를 한일 사이의 외교가 내정이 되는 시기로 판단 하였다. 통감부는 내정화의 핵심 기구인 것이다. 즉 통감부를 통해 한일간 모든 외교문제는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 한국 은 손쉽게 항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의하지 않았다고 단정지었다. 나아가 항의하지 않은 것은 곧 묵인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한일 사이의 교섭 상대가 되는 부서의 왕복 문서를 제시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나가시마의 주장을 역사적 관점에서 검토한 것이다. 그 결과 통감부는 일본이 한국의 내정에 대해 점진적으로 ‘간섭’, ‘주도’, ‘장악’해 간 침탈기구였음을 확인하였 다. 통감부 설치 이후 한일 양국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일본의 내정에 예속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의 교섭 상대가 대등하게 성립했을 가능성은 없다. 이는한일간 왕복문서의 내용에서도 확인되었다. 당시 왕복문서에는 공무에 관한 내용보다는 사적 이고 사소한 문제만 거론되었고 양방향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인 부탁 혹은 요청이 전부였다. 또 고종에 의한 ‘황실외교’ 역시 일본의 감시와 방해 속에서 잠시 존재했었지만 이마저도 ‘궁 금령’에 의해 유명무실해졌다. 이처럼 한국은 불법 부당한 통감부의 한국 내정 장악에 의해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또 일본은 한국에게 독도 편입 사실조차 공식적으로 고시하지 않았다. 고시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조선 후기 정기적인 수토제(搜討制) 실시는 1694년(숙종 20) 장한상(張漢相)의 울릉도 수토로 시작되었다. 수토사(搜討使)들은 자신들이 다녀간 흔적을 남기기 위해 각석문(刻石 文)을 남겼는데, 수토(搜討)의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증거이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울릉도 수토 각석문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대 략적인 현황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그동안 수토 각석문의 조사와 연구 현황을 종 합하여 비교·검토하고, 현재까지 발견된 각석문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는 동시에 그 특징을 살 펴보고자 하였다. 1711년(숙종 37) 박석창(朴錫昌)이 남긴 ‘울릉도 도동리 신묘명 각석문’은 수토제 시작 후 불과 17년이 지난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가 남긴 울릉도도형(鬱陵島圖形)에도 같은 내 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그의 울릉도도형에는 ‘각석입표소(刻石立標所)’를 표시하였는데, 이 표시는 이후 제작된 조선 후기 지도에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박석창의 각석문은 현재 까지 남아있는 울릉도 수토 각석문 중 가장 오래된 것일뿐만 아니라 울릉도 수토 각석문 중최초의 것일 가능성도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울릉도 수토 각석문은 크게 8개로 볼 수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1700년대 2개, 1800년대 5개, 1900년대 1개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분류하면 서로 다른 14명의 각석 문으로 나눌 수 있다. 지역별로는 서면 태하리에 4개 8명, 울릉읍 도동에 3개 4명, 북면 현포 리에 1개 2명의 각석문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총 4개 7명의 각석문으로 발견된 수의 50%에 지나지 않는 다. 울릉도의 개발 등으로 행방불명되거나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운 각석문이 다수가 존재 한다. 또한 울릉도 주민들의 증언에는 각석문이 수없이 많았다고 하고 있으므로 추가적인 각 석문이 발견된 가능성이 있다. 울릉도 수토 각석문에는 수토관(搜討官)뿐만 아니라 수토사에 참여하였던 다양한 사람들의 직명(職名)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각석문에 남아있는 직명 등은 문헌 자료와의 비교 검토를 통해 수토사의 규모나 구성 등을 파악하게 해 줄 것이다. 각석문은 조선시대 울릉도 수토와 독도 수호 노력의 직접적 증거이므로 이에 대한 추가 조사 및 종합적 인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도의 “한 그룹”, “한 자연적 단위” 또는 한 단위 전체로서 특정 사정 하에 “법적으로 한 실 체”로 간주될 수 있고 주도의 법적 지위가 잔여도에 확장되는 것이 인정된다. 즉 법적 실체에대한 주권은 반대의 증거가 없는 한 그 실체의 모든 부분에 확대된다. 이는 “주도와 속도의 법 적 지위동일의 원칙”이라는 이름의 국제법상 원칙이다. 이 원칙은 학설과 판례에 의해 일반적 으로 승인되어 있다. 학설과 판례는 “국제사법재판소규정” 제38조 제1항 (d)의 규정에 의하 여 법칙 결정의 보조적 수단으로 인정되어 있다. 우리 정부는 1906년 3월 29일 “심흥택의 보고서”를 근거로 독도는 울릉도의 속도라고 주 장한다. 독도의 영토주권에 관한 몇몇 관련 문제에 동 원칙을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산국의 신라에의 귀복에의 적용 : 우산국은 울릉도만으로 구성되었는지 독도도 포함한 것인지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일 본정부는 우산국은 울릉도만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고 한국정부는 울릉도뿐만 아니라 우 산도를 포함하여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 원칙을 우산국 문제에 적용하면 우산도 (독도)는 울릉도의 속도 이므로 우산국은 울릉도와 독도로 구성된 것으로 된다. 둘째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의 적용 : 1900년 10월 25일 고종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공포했다. 동 칙령 제2조는 "울릉군 청은 울릉전도, 죽도 석도를 관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동 조에 규정된 석도는 독도를 지칭하 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상기 원칙을 울릉도에 적용하면 독도 는 울릉도의 속도이므로 울릉군청은 울릉도와 그의 속도인 독도에 대해 관할권을 갖게 된다. 셋째로, 대일평화조약에의 적용 : 1951년 9월 8일 48개 연합국과 일본 간에 “대일평화조약”이 서명되었다. 동 조약 제2조 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동 조에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 는 명시적 규정도 일본의 영토라는 명시적 규정도 없다. 일본정부는 독도는 포기되지 아니한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한국정부는 포기된 한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기 원칙 의 적용결과로 울릉도의 속도인 독도는 동 조약에 의하여 일본으로부터 포기된 것으로 되어 독도는 한국의 영토로 된다.
2020년 재개관한 일본 영토주권전시관이 1905년 이후 독도에 대한 일본의 국제법상 합 법적 지배와 한국의 불법점거를 강조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일본제국주 의 침략노선의 근간인 일제식민주의에 입각한 일본의 지속적인 독도주권 침탈의 역사가 여전 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독도침탈 시도가 1905년을 중심으로 재개되 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 정부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장기전략 왜곡프레임이 총체적인 국제법적 권원 강화정책으로 전환되고 있는 점에서 그러한 독도영유권 주장의 정책적 토대를 구축해온 일본 국제법 학계의 권원 연구를 분석한 결과, 독도영유권에 대한 권원 연구가 미나가와 다케시(皆 川洸)의 역사적 권원론을 시작으로, 우에다 도시오(植田捷雄)의 본원적 권원론, 다이쥬도 가 나에(太壽堂鼎)의 대체적 권원론, 세리타 겐타로(芹田健太郎)의 공유적 권원론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인하였다. 그러한 권원 계보의 정점이자 귀결점에 위치하는 히로세 요시오(広瀬善男)의 국제법사관 을 전제로 한 ‘독도영유론’ 이후 주류 연구자로 등장하는 쓰카모토 다카시(塚本孝), 나카노 데 쓰야(中野徹也) 등의 국제법학자들은 모두 무주지 선점론을 주장하는 본원적 권원(original title)의 계보로 분류될 뿐만 아니라 영토주권전시관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기 를 요구하고 있다. 먼저 쓰카모토 다카시는 일본이 17세기 역사적 권원을 가진 영토에 대해 선점 등 실효적 점 유에 기초한 영역취득 절차를 거쳐 불확실한 원초적 권원을 근대국제법상의 권원으로 보강하 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필자가 선행연구에서 ‘대체적 권원론’의 검토했던 다이쥬도 가나 에(太壽堂鼎)의 주장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다이쥬도 가나에가 주장하 는 것처럼 국제법상 역사적 권원을 가지는 고유영토를 영유하기 위하여 그것을 근대 국제법상 의 다른 권원으로 대체하는 것은 요구되지 않으며, 실제 일본이 역사적 권원에 기초하여 영유하 는 다수의 도서를 선점과 같은 다른 권원으로 대체한 일도 없다는 점에서 국제법 법리상 타당성 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한 논거를 제시하고 있는 쓰카모토 다카시의 주장은 동일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1905년 당시 일본 정 부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군사상 필요에서 영토 편입한 것으로 기술한 나카이 요자 부로의 문서는 부정하면서도, 어업행위에 대해서는 국가권능의 행사로 추인하여 선점요건을 구비하였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 국제법 법리에 대한 왜곡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태정관지령,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독도 편입과 관련한 그의 역사의식 을 검토하면, 한국의 독도 명칭 관련 문제를 독도 무주지론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일본 역시 태정관지령에서도 울릉도를 ‘죽도’로 호칭하고 있는 문제를 개방 에 따른 서양지도의 유입으로 인한 혼란으로 희석화하는 등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한편 나카노 데쓰야는 쓰카모토 다카시와는 달리 역사적 권원과는 일정 부분 절연을 전제 로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의 국제법 관계를 전제로 한 무주지 선점론을 제기하고 있으나, 1904년 한일의정서 이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이 갖는 불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개의 개념으로 외면하고 있다. 그러한 그의 주장은 선점 요건으로서의 통고 문제에서 극명하게 표 출되어 1885년 베를린회의 일반의정서, 1888년 만국국제법학회의 통고 의무는 인정하면서 도, 영역권원 취득의 절대적 요건으로 한다는 국제법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해석 하며 시마네현의 고시로 선점의 완료를 주장하나, 국제법이 지자체의 고시와 동일하다는 법 규범 인식 자체가 타당성을 담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쓰카모토 다카시는 다이쥬도 가나에의 ‘대체적 권원론’에 내재된 법리적 문제점의 답습과 일본의 독도 명칭 혼선을 왜곡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며, 나카노 데쓰야는 역사적 권원과의 절연의 법리로 주권평등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국제법체제을 주장하면서도 독도주권 침탈을 비롯한 통고문제 등에서 일제식민주의를 합법화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아울러 히로세 요시오와 동일하게 무주지 선점론 주장자들이 실효적 점유의 법리로 제시하는, 클리퍼튼섬 사건, 동부그린랜드 사건, 망키에-에크레오 사건 모두 무인도, 원격지, 실 효적 지배와 관련된 사례로 자의적인 해석과 원용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정책적 토대를 구축해온 일본 국제법 권원 관련 계보의 주장들은 카이로 선언에서 천명한 폭력과 탐욕의 본질로서 일제식민주의와 일치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권원 계보의 귀결점인 히로세 요시오의 국제법사관이 이후 무주 지 선점론자들이 제기하는 식민지배합법론을 전제로 이와 분리를 시도한 독도영유권 주장은 국제법적 권원의 법리적 왜곡이자 한국의 독도주권에 대한 국제법을 앞세운 중대한 법리적 침해라는 점에서 21세기 평화공동체를 향한 일본의 국제법적 책무를 촉구하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벌어진 양국 정부의 외교문서에 의한 논쟁에 서 역사적인 근거만을 대상으로 무엇이 쟁점인지에 대해 고찰해보고 쟁점의 변용에 대해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의 견해는 상세한 자료와 고증을 들어 독도에 대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국의 독도 영유권 관련 주장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시사되기는 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없다. 따라서 양국 주장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의 교환공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독도영 유권 관련 주장의 논점과 변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조치를 한반도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정의 일환에서 이루어진 일로 보고 있으며, 일본은 한국강점과 독도영토 편입을 전혀 별개 의 사안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독도 문제를 보는 기본적인 역사 인식에서부터 한일 간에 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시점에 서 있으며, 이러한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있을 단초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적인 구조를 타파하 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장이 제3자에게도 합리적인 주장으로 비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 가 있으므로 우리 주장의 문제점에 대한 자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본 논문은 독도와 울릉도 그리고 일본 오키섬과의 관속식물상을 비교·분석하였다. 대양 섬인 독도의 독특한 생물학적 진화양상과 종분화 과정을 연구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축적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독도의 관속식물상은 29과 49속 54종 1아종 2변종 57분류 군으로 확인되며, 한국의 독도와 울릉도와 그리고 일본 오키섬에서 공통으로 자생하는식물이 9분류군(15.8%), 독도에서만 자생하는 식물 9분류군(15.8%), 독도와 울릉도에 서 자생하는 식물 37분류군(64.9%), 독도와 일본 오키섬에서 공통적으로 자생하는 식물 2분류군(3.5%)으로 조사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 보호종인 고유종, 식물구계학적 등급 식물, 귀화식물 등을 상호 비교·연구하였다. 독도와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식물 고유종은 3분류군, 식물구계학적 등급식물은 15분류군, 귀화식물은 8분류군이 확인되었으며, 독도 와 일본 오키섬에서 공통으로 자생하는 식물구계학적 등급식물은 5분류군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보고된 연구 결과, 독도의 식물상은 울릉도와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지만, 좀 더 확대된 지역(한국, 일본)의 식물상을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결과 는 독도식물의 기원을 밝히는 기초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한국의 독도 교육정책이 어떻게 강화되고 있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논의는 영토교육 강화로서의 독도 교육이란 관점에서 초·중·고등학교의 독도 교육 내용 체계를 검토하고, 당면하고 있는 한국의 독도 교육정책 실태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독도 교육 내용 체계의 완성은 2015년 교육과정의 개정에서 독도 교육 강화방 안이 수립되면서부터이다. 교육부는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독도 교육을 범교과 학습주 제로 채택한 취지에 부응하여 교과와 창의적 체험활동 등의 교육 전반에서 통합적으로 운영하 는 방침을 채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도 교육정책은 대응적 성격이 강하다.일본 문부과학성은 2010년 3월 초등학교 사회과 검정교과서에 독도를 일본령으로 명기하면 서부터 왜곡된 영토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고, 2017년 3월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2018년 3월 고등학교 학습지요령 및 학습지도요령 해설을 개정하였고, 그해 7월에 개정판을 고시하였다. 이에 한국의 교육부는 2009년 교육과정에서 2015년 교육과정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독도의 영토교육을 강화하는 대응적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독 도 교육은 교과 영역에서 독도의 영토교육 강화, 창의적 체험활동에서 독도의 영토교육 강화, 뉴미디어 공간에서 독도의 영토교육 강화로 특징지을 수 있지만, 초등학교에서 저학년과 고 학년 교육과정에서의 분류 항목의 분량과 난이도가 존재하고, 중등학교의 경우는 현장 교육 에 맞지 않게 교육과정이 진행되기도 하고, 고등학교에서는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 때문에 형 식적이거나 일회적인 활동으로 독도 교육이 진행된다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중학교 자유학년제에서 독도교육 현황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자유학년 제에서 효과적인 독도교육 방향을 제안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제2장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현황에서는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실태와 한계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본 연구의 제3장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방향에서는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특징과 개선점 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실태는 주제선택 활동에서 교사 수준의 교과 연계 수업 사례와 학교 수준의 범교과 연계 프로젝트 수업 사례, 진로탐색활동에서 독도체험관 중심의 독도교육 프로그램 운영 사례, 동아리활동에서 기존 독 도교육 동아리인 독도지킴이 활동 사례로 나타났다.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한계는 주제선택 활동에서 자유학년제의 취지와 방향에 적합한 수업 설계‧운영의 어려움, 진로체험활동에서 자유학년제 학생 대상의 차별화된 프로그램의 부재, 단기간의 일회성 프로그램 운영, 기관 연 계 프로그램의 부재, 동아리활동에서 교육과정 연계 동아리의 부재, 지역사회 연계 동아리의 부재로 나타났다. 둘째,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특징은 수업 혁신을 통한 영토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교육 강화, 다양한 경험을 통한 영토로부터의 자각과 체험의 교육 강화, 공동체 활동을 통한 영토를 위한 행동과 실천의 교육 강화로 나타났다.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개선점은 확 대 시행의 관점에서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정책 수립, 체계화의 관점에서 자유학년제의 독 도교육 핵심역량 설정, 차별화의 관점에서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수업(프로그램) 내용 개발, 지속화의 관점에서 자유학년제의 독도교육 수업(프로그램) 방법 개발, 활성화의 관점에서 자 유학년제의 독도교육 인프라 구축으로 나타났다.
독도교육은 독도의 영유권확보를 위한 선결적 수단 가운데 하나로서, 그 중요성은 따로 강 조하지 않더라도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지난 3년 동안의 영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의 독도교육의 운영사례를 중 심으로, 법학전문대학원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가장 효과적인 독도교육의 모델을 찾는데 목 표가 있다. 이러한 목표 하에서, 본 논문에서는 아래의 몇 가지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영남대 학교를 비롯한 지역대학에서의 독도교육의 현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둘째 영남대학교에서 수행해온 독도교육의 내용을 검토하고, 그 한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셋째 법학전문대 학원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가장 효과적인 독도교육의 모델을 구하고자 한다. 끝으로 결론에 갈음하여 법학전문대학원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독도교육의 나아갈 방향을 기술하고자 한다. 이상과 같은 검토와 분석을 통해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법학전문대학원에서의 독도교육은 독도 관련 법률전문가의 양성 및 국가의 전략적 차원에서의 기여라는 점에서 크게 환영할 일이라는 점이다. 둘째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독도교육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초・중・고교에서 의 독도교육과 연계성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교육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독도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전문가양성프로그램이 요청된다는 점이다. 넷째 독도교육을 위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다섯째 가칭 ‘독도교육공동연구회’와 같은 민간 주도의 위원회를 설치하여, 독립적이고 중 립적인 틀 속에서 관련 논의를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독도에 관한 국민의 사랑과 관심이 지속된다면, 독도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으 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국민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이 연구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동해연구소 독도전문연구센터가 동해의 바닷속 펼쳐진 거대한 독도의 해양영토를 밝히고 그 가치를 찾아 한국의 영토로서 확고한 주권확립과 이용관리에 기여하고 있으며, 과학연구 활동으로 많은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기 때문에 독도 해양과학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홍보현황과 활성화 방안에 대하여 조사와 분석을 한 것이다. 이 독도전문연구센터는 2006년도에 설립되어 올해 16년째 독도 해양과학연구를 꾸준 히 하고 있으며, 축적된 연구 성과에 대하여 홍보를 하였다. 이러한 독도 해양과학연구 성과의 홍보 방법으로는 학술논문, 학술활동, 특허, 서적출간, 언론홍보, 전시회 및 학술행 사, 독도관련 화보집, 총서와 독도체험시스템 등이 있다. 독도전문연구센터의 독도 해양과 학연구 성과의 홍보현황을 보면 2006년부터 2020년까지 학술논문은 82편, 학술발표 226편, 특허 11건, 서적 35종, 언론홍보 1158건, 전시회 32건, 학술행사(워크숍, 세미나, 심포지엄 등) 227건, 대중강연 107건, 견학(방문) 791건, 자료제공 226건 등 약 3천건 정도로 집계되었다. 독도 시민단체와 반크 등 일반인의 독도 홍보활동은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독도 해양과학 연구자들의 독도 성과와 홍보에 관한 것은 아직 충분치 않은 실정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활성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새로운 해양, 해저지형 표기에 있어서 동도, 서도 외 89개 부속 섬의 전체 바위명칭 부여 및 지도, 리플릿 제작 배포가 필요하다. 둘째, 독도 이용개발에 있어서 육상의 경우에는 자연환 경에 의한 풍화작용 등의 영향으로 바위가 훼손되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해야 한다. 셋째, 독도 해양 및 환경자료 활용을 확대하여 독도 통합관측시스템을 구축 및 운영하 여 실시간 서비스 제공도 지속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