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의 동해안과 일본의 서해안 일대의 문화가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는 것이 많다. 그러한 예로 한국의 남부지방과 일본 규슈(九州)의 북부 지방에 존재 하는 ‘당일우귀(當日于歸)’의 혼속을 예로 들었다. 일본에서는 야마도 시대(大和時代)에 일시적인 처가 거주혼의 형태를 취했다가, 무가 시대(武家時代)에 부가 거주혼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한국의 남부지방과 같은 문화를 가졌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화적 동질성을 가지는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이런 전제를 세우는 경우, 일본의 호쿠리쿠 지방(北陸地方)에서 문헌에 정착된 <가가국의 뱀과 지네가 싸우는 섬에 간 사람, 뱀을 구하고 섬에 산 이야기>가 신라의 경역에 존재한 것도 같은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환동해 문화권’의 설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네 개의 이야기, 곧 가야의 왕자 <쯔누가아라시토 설화(都怒我阿羅斯等說話)>와,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보코 설화(天日槍說話)>, <연오랑 세오녀 설화(延烏郞細烏女說話)>, 고구려의 <날개옷 설화(羽衣說話) 등도 고찰하였다. 이들 설화의 고찰을 통해서, 한국으로부터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해로(海路)는 상당히 여러 개가 있었으며, 또 이주 집단들도 꽤 많았다는 것을 구명하였다.
본고는 영토 분쟁이 심화되면서 동북아의 군비경쟁이 가속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 간에 점점 분쟁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는 독도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한 것이다. 우선 본고에서는 먼저 한일 양국의 영유권 문제의 쟁점에 대해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 지 살펴본다. 즉, 역사적 근거, 국제법적 효력 및 2차 대전부터의 정치적 결정의 효력에 관한 해석에 대한 양국의 주장이 상대국에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있는 지의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지금까지의 독도/죽도 논쟁은 학문적 성과가 반영되지 않는 국면이 적지 않았다. 어쩌면 독도/죽도 논쟁의 문제점은 죽도 영유권을 둘러싼 의견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견 대립이 학문적 근거가 결여된 채 쟁점화 되는 데에 있다. 학문적 근거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주장이 재삼재사 되풀이하여 강변되고 똑 같은 논의가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양국의 독도/죽도 논쟁에 대한 해결의 길을 열기 위해서 조문(법령)의 해석과 사료를 둘러싼 해석 방법을 검토하였다. 조문에서는 ‘샌프 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겐로쿠 죽도도해금지령’의 해석에서 조문상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의도를 해석하였다. 또한 ‘우산도’, ‘일본해내 죽도외일도 지적 편찬에 방사(日本海内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의 해석에서도 사료는 먼저 주어진 텍스트 안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검토하였다.
사실, 독도/죽도 논쟁은 거의 정리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끝없이 논의를 지연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만약 향후의 한일 관계를 돈독한 것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이 논쟁을 끊어버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의성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사료·사실(史實)에 마주볼 수 있는 용기를 낼지 어떨지가 분기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안용복 피랍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겐로쿠 다케시마 일건 (元禄竹島一件)’의 결과, 에도 막부(江戶幕府)는 ‘다케시마(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이 금지령에 마쓰시마(松島, 독도)의 이름은 없었지만 금지령을 내린 경위를 생각하면 “다케시마 근처의 마쓰시마”도 도해가 금지된 것이다. 게다가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조선영토임은 1724 (교호 享保9)년 에 돗도리번으로부터 에도막부에 제출된 「다케시마노 가키쓰케(竹島之書付) 3통」에 부속 된 그림지도 「다케시마 도(竹島圖)」에서 확인된다. 이 그림지도는 분명히 다케시마 · 마쓰 시마의 한 쌍을 조선영토로 그렸다. 그후 에도막부는 ‘덴포 다케시마 일건(天保竹島一件)’때에 사건 기록 『조선 다케시마 도항 시말기(朝鮮竹島渡航始末記)』를 작성했는데 이에 부속된 그림지도에서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조선영토로 그렸다. 이는 ‘겐로쿠 다케시마 일건’의 인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인식은 에도시대 말기까지 계속됐으며, 에도막부는 쵸슈번(長州藩)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郎) 등으로부터 제출된 마쓰시마를 포함한 다케시마 개척 청원서에 대해 다케시마는 덴포기 에 조선영토임을 확인했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이런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조선영토로 보는 인식은 메이지(明治)정부에도 이어졌다. 메 이지 초년에 조선을 내탐하기 위해 부산의 왜관 등으로 파견된 일본외무성 관료들은 ‘겐로 쿠 다케시마 일건’을 충분히 조사해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했다. 한편, 일본내무성에서는 지지과가 관찬지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겐로쿠 다케시마 일 건’을 조사해,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 소다케시마 각서(礒竹島覺書)』를 편찬했다. 이 직후 지지과는 태정관으로 옮기고 관찬지지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를 편찬했으니 이 책에도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이 이어졌다. 이처럼 내무성 및 태정관은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을 가졌으니 시마네현에서 「일본해내 다케시마 외 1도 지적 편찬 질문서(日本海内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가 제출됐을 때 쉽게 다케시마 · 마쓰시마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인식에 근거해 내무성은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일관해 일본영토 밖으로 하는 관찬지도를 작성했다. 특히 지도 책 ꡔ대일본국 전도(大日本国全圖)ꡕ에서는 1871년부터 1883년까 지 일본 각지의 소속의 변천을 지도 12장에 밝혔는데 이 모든 지도에 다케시마 · 마쓰시마 는 없으며 일본영토로 취급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역사상 독도를 조선 · 한국 영토로 판단한 일은 몇 번이나 있으나, 독도를 일본영토로 판단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독도를 일본은 제국주의적 수법으로 1905년 에 일본땅으로 편입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외무성의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현재의 러 ․ 일 국경은 확실한 국제적 법적 기반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남부 쿠릴열도 는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러시아에 귀속되었고, 그 법적 기반은 연합국간 협정(1946년 2월 11일의 얄타협정,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선언)이다. 얄타회담의 결정에 따르면, 모든 쿠릴열도의 섬들과 사할린 섬들은 ‘영원히’ 소련으로 귀속된다. 영국과 중국이 서명하 고, (소련이 나중에 가입한), 미국의 포츠담 선언은 이와 같은 내용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따라서 러 ․ 일 관계는 2차 대전의 결과의 확고함이라는 중요한 원칙에 기초해야만 한다. 2차 대전의 결과의 불가침성(principle of the inviolability)이라는 원칙은 전후 국제관계 의 기초로서 여전히 남아있다.
결론적으로 러시아는 아시아의 현상유지를 위해 중국, 남한을 포함한 2차대전의 결과를 번복하지 않으려는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 일본에 의해 영유권이 주장되는 타케시마로 불리는 ‘독도’는 한국과 일본간의 긴장관계의 원인이 되었다. 독도는 “한국의 남 쿠릴열도 (Korean Southern Kuril islands)”로 불릴 수 있다. 일본의 여러 영토적 주장들, 예를 들면 독도(한국), 쿠릴열도(러시아), 팽호도(Penhuledao)(중국), 파라셀군도(베트남) 등은 일본의 국제법적 의무와 직접적으로 상충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조 를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2012년9 월 10일 댜오위다오 ‘국유화’를 선포하자 중국은 ‘영토 문제 보류’ 라는 암묵적 합의를 어긴 도발이라고 인식하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댜오위다오 국유화는 중일관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중일간의 영토 갈등은 동북아시아에 일촉즉발의 먹구 름을 드리우게 하였다. 앞으로의 중일관계의 발전방향을 전망하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려면, 우선 양국의 영토정책과 정부입장, 대응수단 등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일본의 댜오위다오 국유화에 대한 중국의 입장 및 대응수단 을 분석하였다. 중국의 댜오위다오 정책의 방향과 이념을 파악하여 앞으로 중국의 영토정책 에 관한 시사점을 모색하였다.
본 연구는 2011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주요 언론에서 다룬 독도에 관한 기사들을 바탕으로 언론분야에 있어서 독도문제의 보도현황을 분석하고 앞으로 개선하고 발전시 켜야 할 과제들을 이끌어 내고자 시도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우리나라 주요 언론기관들의 독도관련 기사들을 보도 분야별, 보도유형별, 프레임 유형별로 현황을 파악한 후, 언론이 정책행위자인 정부와 정책평가자인 독자들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다. 독도관련주제에 관한 보도들은 처음의 제한적인 상황에서, 국민정서에 편승하는 방향으로 선회되었다가, 오히려 오늘날에는 국민정서를 부추기어 정치적 인기를 만회하려는 선까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언론은 정권이 영토문제를 실정을 가리는데 활용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국민이 독도문제로 인하여 군중심리에 묻여버리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과감 히 돌아설 수 있도록 종용해야 하며, 문제의 본질을 짚어주고, 때마다 발생하는 사건 · 사고 에 일희일비하지 않도록 장기적 안목과 포용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야 한다. 언론은 각 정권이 독도문제를 정치적 이용보다 국가 장래에 도움이 되도록 정책으로 반영하고, 국민들이 독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각자의 일상에 매진하도록 배려하는데 시금석이 되어 주어야 하겠다.
1952년 2월 12일자 한국정부의 일본정부에 대한 구술서는 “한국정부는 SCAP이 1946 년 1월 29일자 “SCAPIN 제677호”에 의해 독도를 일본의 영유권으로부터 명백히 배제했 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바이다”라고 진술했다. 1952년 4월 25일자 일본정부의 한국정부 에 대한 답변 구술서에서 “위에서 언급된 SCAPIN 제1항에 의하여 일본정부는 리앙끄르도 (다케시마)에 대한 정치적 또는 행정적 권한의 행사 또는 행사의 의도를 중지할 것을 지시 받았을 뿐이다. SCAP이 일본영토로부터 이 소도의 배제를 지시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 했다.
교전점령법의 원칙은 점령은 주권을 배제하거나 이전하지 아니한다. 점령자는 점령 영토 에 대해 군사적 권한을 행사할 권한이 부여된다. 그러나 교전자는 평화조약에 의해 그에게 할양되지 아니하는 한 그 때까지 주권을 취득하지 아니한다. 이 원칙은 학설, 국제판례 그리 고 관행에 의해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있다.
SCAP은 “SCAPIN 제677호”에 의해 일본정부에게 리앙끄르도에 대해 정치적 행정적 권한의 행사를 중지시켰을 뿐이다. 따라서 일본영토로부터 리앙끄르도의 imperium 만이 분리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의 견해는 점령에 관한 국제관습법과 “SCAPIN 제677 호”의 규정에 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일평화조약” 제19조(d)항은 “점령기간 동안 점령당국이 행한 작위와 부작위 의 효과를 승인하고, 지령의 결과를 승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동 조항의 “지령”에 “SCAPIN 제677호”가 포함됨은 물론이다. 따라서 독도는 “SCAPIN 제677호”에 규정된 바와 같이 “대일평화조약” 제19조(d)항의 규정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그리고 이 법적 효과는 동 조약 제2조(a)항 전단의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의 규정에 따라 한국 정부의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까지 소급되게 된다. 그러므로 “SCAPIN 제677호”에 의해 분리된 독도의 imperium 은 “대일평화조약”에 의해 분리된 dominium 과 일치되게 된다. 독도의 dominium 은 “SCAPIN 제677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일평화조약” 제19 조(d)항의 규정에 따라 SCAPIN에 의해 분리된 imperium 이 동 조약 제2조(a)항 전단의 규정에 따라 소급적인 dominium 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독도 dominium 의 분리의 직접적인 근거는 “대일평화조약”이고 간접적인 근거는 “SCAPIN 제 677호”라 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독도의 분리근거를 “SCAPIN 제677호”라는 주장에서 “대일평화조약 제19 조(d)항”이라는 주장으로 정책 전환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