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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연구 KCI 등재 The Journal of Do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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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22권 (2017년 6월) 12

일반논문

1.
2017.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의 목적은 17세기말 안용복의 도일(납치) 사건으로 촉발된 「울릉도쟁계」(=죽도일 건)와 관련하여 한일 간의 쟁점을 정리하고, 「울릉도쟁계」 관련 사료의 재해석을 통해 몇 가지 쟁점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였다. 첫째, 1693년 안용복과 박어둔의 납치 정황을 검토 하고, 둘째, 안용복이 서계를 받았는가 하는 점과 셋째, 「죽도도해금지령」(1696) 전후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 정황과 마츠에번 및 돗토리번의 독도 인식을 밝히고자 한다. 한국의 연구에서 안용복 일행이 총검에 위협당해 납치된 것으로 하고 있으나, 사실은 일본인의 술잔치에 꾀임을 당해 끌려갔다. 또한 안용복이 받았다는 서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당시 돗토리번에 억류되어 있었던 안용복이 막부 장군이 사는 에도로 가지도 않았다. 당시의 일본 사료를 보면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는 1695년까지 확인되며 「죽도도해금지령」 이전 마츠에번과 돗토리번의 울릉도·독도 인식은 그들의 판도 외 즉 조선의 판도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울릉도쟁계」 관련 사료는 아직 많은 부분에서 한일 간에 상호 일방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 양측의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울릉도쟁계」의 실체를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겠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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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근세 일본의 사료에 나타난 울릉도 · 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중심으로 그들이 말하는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 우산도, 자산도)가 한국의 영유임을 재확인해보는 것이다. 일본이 17세기 고유영토설의 근거 사료로 삼고 있는 『죽도기사』의 곳곳에서 이미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의 역사지리서에 기술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때, 일본은 이미 17세기 이전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이 영유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죽도고』에서도 역시 오야와 무라카와 집안이 80년간 울릉도에서 불법적인 어로활동을 한 사실만을 가지고 자신들이 되찾아야 할 섬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지적할 수 있다. 왜구의 노략질로 고통 받던 울릉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섬을 비워둔 것을 사람이 살지 않는 폐도라고 하면서, 잠시 동안 그곳에서 어로활동 한 것을 핑계로 자신들이 되찾아야할 섬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의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 중 <포인트 3>의 ‘17세기 고유영토확립설’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록각서(元祿覺書)』에서 안용복 일행이 타고 온 배에 걸린 「조울양도감세장 신 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 臣 安同知騎)」라고 쓰여진 깃발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안용복이 울릉도 · 독도가 조선의 영유임을 일본 측에 선포하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울릉도와 우산도(자산도) 양도의 감세장을 칭하며 죽도(울릉도)의 조선영유를 당당히 확인하기 위해 도일한 것임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세 울릉도 · 독도 관련 일본사료에 나타난 지리적 인식의 특징을 보면, 조선에서 울릉도 · 독도까지 거리를 실제보다 훨씬 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원록각서』와 『죽도기사』에서 안용복의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죽도고』를 편찬한 오카지마는 오히려 조선에서 울릉도 · 독도까지의 거리가 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울릉도 · 독도가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공간적 거리보다 인식적 거리가 훨씬 가까웠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근세 일본의 사료에 대한 검토, 특히 ‘울릉도 · 독도의 지리적 인식’에 대한 검토는 일본 측의 ‘17세기 다케시마 고유영토설 주장’을 비판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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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록각서(元祿覺書), 죽도기사(竹嶋記事) 그리고 죽도고(竹嶋考)는 모두 울릉도쟁계를 주제로 일본측에 의하여 작성된 역사적 문서들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에 울릉도 및 독도와 직접 관련된 역사문서가 매우 희귀한 현실에서 이들 역사적 문서들이 담고 있는 내용의 광범성, 정확성, 객관성, 풍부성 등은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권원의 존재를 밝혀 주는 문서로서 결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역사적 문서들은 조선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하여 명확하게 자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조선이 지리적 근접성에 따라 울릉도 주변의 바다와 섬들에 대하여 포괄적인 주권활동을 하였고 당시 한일 간에는 지리적 근접성을 영역결정의 기준으로 수용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국제증거법의 측면에서 이들 문서는 각기 그 증명력에 있어 차이가 있지만 증거능력은 모두 인정된다 할 것이다. 원록각서는 공적조서로서 일본의 국내적 공문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하여 일본이 부정할 수 없는 구속력을 부여할 수 있다. 죽도고는 울릉도쟁계 당시 일본이 조선에게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이 있음을 인정했다는 원록각서와 죽도기사의 내용에 신빙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정황증거로서 간접증거의 지위를 갖는다. 특히 죽도기사는 조선과의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쓰시마 번주의 명령에 의하여 공직자인 편찬자. 집필자, 검수자들이 작성한 외교공문서로서 지위를 갖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확대해석하면 울릉도 및 독도에 관한 한일 양국간 유일한 국제합의문서의 집성으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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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지리적으로 울릉도의 부속섬과 같은 위치에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에서도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보았다. 1690년대 안용복사건은 일본 에도막부에서 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내림으로써 종결되었는데, 그 당시에 돗토리번에서 에도막부에 제출한 지도가 「소곡 이병위 제출 죽도지회도」(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絵図)이다. 이 지도는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판단할 때 사용된 지도이다. 그 후 명치시대에 들어 안용복사건 당시 조선・일본 양국간 외교교섭 결과를 한 번 더 확인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고 공시한 자료가 1877년의 『태정관지령』이다. 일본측에서는 『태정관지령』의 마쓰시마(松島)는 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2006년에 공개된 부속지도 「기죽도약도」에 의해 『태정관지령』의 마쓰시마(松島)는 독도 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해졌다. 광복 후 일본을 점령통치한 연합국최고사령부는 관할지역과 어선조업구역 양면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로부터 분리하였는데, 관할지역에 있어서는 연합국최고사령부훈령 (SCAPIN) 제677호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하고, 「SCAP관할지역도」로써 독도가 남한지역에 포함됨을 분명히 하였다. 1948년 8월, 그 관할지역 그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에 인계됨으로써 독도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일본을 연합국의 점령통치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샌프란시스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연합국과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독도문제는 다시 불거져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샌프란시스코조약은 독도에 대한 언급이 없이 체결되었으나, 최근에 공개된 「일본영역 참고도」는 당시에 일본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스스로 인정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독도를 한국 땅으로 그린 「일본영역참고도」를 샌프란시스코조약 조인 전에 일본정부에서 제작하여, 샌프란시스코조약 비준과정에서 동 조약의 부속지도로 썼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고, 국제법적으로 증거능력 · 증명력이 큰 공적인 지도를 대상으로 분석하면, 에도시대부터 샌프란시스코조약 때까지, 일본의 독도 영유권 판정과 관련된 4개의 공적 지도는 모두 독도가 한국 땅임을 표기하고 있거나, 독도가 한국 땅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중 연합국점령통치 기간 중의 「SCAP관할지역도」를 제외하고, 3개의 지도는 일본정부 스스로 제작한 지도로서, 일본정부 스스로 3번이나 독도를 한국 땅으로 인정한 근거가 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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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이승만라인(평화선) 및 독도에 관한 오해가 심하다. 특히 이승만라인 선포는 그 당시 ‘공해 자유의 원칙’에 어긋난 불법 행위였다는 이해가 거의 일본인의 공통된 인식으로 되고 있다. 이 글은 최신 일본 자료를 활용하여 그런 오해나 이승만라인이 선포된 배경과 경위, 경과 등을 검증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세계 각국은 일본의 해적어법 및 약탈어업의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일본의 약탈어업을 염두에 두고 대전 후 곧 트루먼선언을 발표함과 동시에 일본 어업을 맥아더라인 안에 제한했다. 이런 정책은 각국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각국은 어업관할수역을 설정하는 세계적인 조류를 만들었다. 이 흐름을 타고 한국은 맥아더라인 폐지에 대비해 이승만라인을 선포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일본의 대응은 이중적이었다. 일본은 소련이나 중국 등 대국이 선포한 어업관할수역이나, 혹은 일본 어선에게만 제한 조항이 있는 미·캐·일 어업조약 등은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약소국’인 한국에 대해서는 일체 어업관할수역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1940년 당시에 일본이 어업을 하지 않았던 보존어장에서는 자발적으로 조업을 억제한다는 일본 자신의 공약에 반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조선 연안에 ‘총독부 라인’을 긋고 보존어장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승만라인과 비슷한 것이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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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문제연구회의 좌장격인 시모조 마사오(下条正男)는 비논리적인 주장으로 칙령41호 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石島)」에서 석도는 독도가 아니고 지금의 「관음도」라고 하여 사실을 날조했다. 첫째, 『조선어사전』에서 「독(獨)」이 돌(석)의 사투리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올바른 해석을 일부러 피하고, 「단독(單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부분을 적용하여 칙령의 석도는 독도가 될 수 없다고 비논리적인 주장을 한다. 둘째, 시모조는 일본의 고문헌 니이타카호(新高号) 군함일지에는 1904년 울릉도에서는 독도라고 기록 하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한 논증을 거부하고 1904년경에 울릉도사람들이 독도에 들어가서 강치를 잡았는데, 그때의 울릉도사람들은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처음으로 독도에 들어갔다고 사실을 날조했다. 셋째, 시모조는 광여도와 청구도가 지금의 죽도를 우산도로 잘못되게 비견하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1900년에 발령된 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에서 「석도」는 지금의 「관음도」라고 주장한다. 그는 광여도와 청구도가 수토사 박석창이 잘못 그린 「울릉도도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을 일부러 피하고 비논리적으로 함부로 사실을 날조했다. 넷째, 1900년에 발령된 칙령 41호의 「석도」는 울릉도 사투리로 돌섬을 「독섬」라고 하는 것을 문헌상 표기로 「독도」라고 기술하였다는 것은 1904년 의 일본군함 니이타카호가 증명하고 있고, 심흥택 군수가 1906년 “본군 소속 독도(獨島)” 라고 표기했던 것으로 명확하다. 그런데 시모조는 침략적인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정당화 하여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비논리적으로 사실을 날조했다. 이처럼 죽도문제연구회가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영토내셔널리즘에 의한 침략행위이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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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역사적, 국제법적 및 그 실효적 관할 상 엄연히 대한민국의 영토이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근거 없이 일본정부가 “독도는 자국 땅“이란 부당한 주장만 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아베정부에 이르러 독도왜곡이 더욱 심화되어, 일본 중·고교 교과서에 “다케시마(독도)는 일본의 고유한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거짓 내용을 실어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거짓내용일 뿐만 아니라 여러 국제법 위반 사항임을 지적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전에는 1699년 1월 당시 조선국 정부와 일본 막부정부 간 외교서계교환을 통하여 합의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국의 영토주권에 대한 위반임을 지적할 수 있다. 2차 대전 후에는, 포츠담선언8) 후단규정, 스카핀 (SCAPIN) 677(1946.1.29.), 샌프란시시코 평화조약 제2조(a) 및 동 조약 제19조(d)를 위반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전기 일본교과서에 게재한 ‘일본의 고유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점거‘ 하고 있다는 내용은 ’독도‘ 재침탈을 위한 일종의 “위협”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영토는 타국의 위협이나 무력사용으로 인한 탈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유엔총회결의 2625호(1970.10.24)와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으로 규탄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학계 일부의 ‘독도’ 영토주권에 관한 논조가 애매모호한 것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일본정부의 헛된 주장에 따른 국제법위반 사항을 포함하여 이 모든 것들은 각종 학술발표회를 통하여 검증되고 사안에 따라 퇴출되고 또 규탄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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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연구의 기본방향은 독도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의 학문분야마다 다를 수 있고, 또 특정학술분야에 소속되어 있는 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독도연구소마다 각기 다른 연구방향이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의미하는 독도연구의 기본방향은 개별 학자와 전문가의 전공분야와 학문분야를 초월해서, 각 독자연구소의 설립목적을 초월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서 포괄적, 총체적인 독도연구의 기본 방향으로 정의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독도연구의 기본방향의 제시는 국가의 과제에 속하는 것이 되고, 민간 대학 연구소로서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의 범위를 넘게 된다. 따라서 저자는 독도연구의 기본방향을 제시한다기보다 그간 독도를 연구하면서 느낀 소박한 소감을 토로하여 향후 한국의 독도연구의 기본방향 제시에 미호의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과욕을 가져본다. 저자는 국제법 전공자이므로 결국 이 소감의 토로도 국제법의 영역에서의 편파적 소감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자인한다. 그러나 국제법학자 이외의 독도연구학자, 특히 사학자에게 친국제법 연구를 권고해 보려는 것이 저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하 선제적 연구로 “독도연구에서 국제법과 사학의 관계”, “국제법의 법원”, “역사적 권원의 대체”, “지도의 증명력” 그리고 “지리적 접근론”에 관해 논술하기로 한다. 그리고 연구방법상의 제의에서 “학제연구”, “연구결과의 보급” 그리고 “독도연구소의 특성화연구”에 관해 논술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독도에 대한 학제 연구의 필요성과 독도연구 결과의 대중화 필요성을 제의해 본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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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연구는 팔라다호 소속 장교의 인명, 팔라다호의 출발과 도착의 항해과정, 곤차로프의 출발 이유 등에 대해서 초보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이유는 선행 연구가 대체로 조선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팔라다호의 이동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탐사 과정을 주목하였다. 그 과정에서 독도와 울릉도의 발견 과정을 추적하였다. 러시아황제 니꼴라이 1세(НиколайⅠ)는 1852년 청국과 일본과의 개항을 추진하기 위해서 러시아 제독 뿌쨔찐(Е.В. Путятин)을 특사로 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1852년 10월 7일 끄론쉬따트(Кронштат)를 출항했고,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에 도착하였다. 제독 뿌쨔찐은 전함 팔라다호(Фрегат Паллада), 캄차카 함대 소속 코르벳함(군함) 올리부차호(корвет Олибуца), 스쿠너 범선 보스톡호(шкуны Восток), 수송선 공작 멘쉬꼬프호 (транспорт Князь Меньшиков)으로 함대를 구성하였다. 뿌쨔찐은 소령 꼬르사꼬프(Корсаков)를 추천하여 스쿠너 범선 보스톡호의 함장으로 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함장 소령 운꼽스키(Унковский)를 비롯하여 장교 22명과 승무원 439명으로 구성 되었다. 이 중에서 보스톡호에 승선할 장교 6명과 수병 37명도 포함되었다. 알렉산드르 넵스끼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아바꿈(Аввакум) 신부는 중국어통역을 맡았다. 뿌쨔찐은 1855년 1월 26일 일본정부와 시모다조약(Treaty of Shimoda, 下田条約)을 체결하였다. 팔라다호는 일본과의 외교 수립, 해군부의 탐사 지시에 따른 실행 등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팔라다호는 1854년 3월 발발한 크림전쟁의 여파로 서방 국가들과 관계가 단절되어, 미국에 있는 러시아 식민지를 방문하지 못했고, 오호츠크해 해안을 조사하지 못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일부터 4월 7일까지 거문도에 정박했고 1854년 4월 20일 조선 연안에 도착해서 5월 11일까지 동해안 조사를 시작하였다. 곤차로프는 거문도를 직접 답사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양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명명한 국가는 러시아였다. 팔라 다호 소속 올리부차호는 독도를 발견하면서 서도를 올리부차(Оливуца), 동도를 메넬라이 (Менелай)라고 명명하면서, 실측에 기초하여 최초로 정확하게 좌표에 기입하였다. 그 후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동해에서 울릉도를 경유하며 해상훈련을 실시하였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알렉셰예프는 동해에서 전략적인 거점으로 울릉도를 주목하였다. 이것은 러시아가 1896년 9월 두만강·압록강·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획득하여 한국에 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을 실행한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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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일러수뇌회담은 일러 양국의 영토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목적이었지만, 더 나아가 아베 수상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강화하고자 하는 회담이었으며, 동북아국제정치의 큰 판의 움직임을 염두에 둔 아베 수상의 의도가 엿보이는 중요한 회담이었다. 그러나 북방4도의 반환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북방영토문제의 미해결은 많은 부분 일본정부의 책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정부의 ‘4도 일괄 반환’ 주장과 ‘2도 선행 반환’ 주장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잦은 ‘골대 이동’이 북방영토 해결을 무산시키는 주요 요인이었다. 물론 일본정부의 그러한 결정에 미국정부의 부정적 영향력 행사의 산물이거나, 미일동맹정책의 대가임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본 논문을 통해, 동아시아 영토문제는 대국간 힘의 전이 현상이 배경에 있어 복잡한 정치역학이 작용하는 극히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고유영토론에 대한 러시아인의 인식을 살펴보면, 북방4도에 대한 일본정부의 ‘고유영토론’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명확해진다. 일본의 ‘고유영 토론’은 독도에 대한 주장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그 주장의 공허함이 같은 이유에서 오버랩 되고 있음을 숨길 수 없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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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국해에 막대한 양의 석유 및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남중국해의 연안국들 간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필리핀과 중국 간에 분쟁이 본격화된 것은 석유가 천연가스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고 밝혀진 리드 뱅크(Reed Bank)에서의 충돌 사건 때문이었다. 필리핀은 2013년 중국을 상대로 해양법협약이 규정 및 동 부속서 Ⅶ에 근거하여 동 사건을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제소하였고 2016년 7월 12일에 최종적으로 판정이 내려졌다. 동 판정이 가지는 쟁점별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재판관할권과 관련된 문제로 중국은 필리핀과의 분쟁이 해양에 관한 국가주권과 관련된 문제이고 해양법협약이 정하는 ‘협약의 적용 및 해석에 관한 분쟁’이 아니며 중국이 ‘배제선언’을 통하여 해양분쟁을 강제적 관할권에서 제외하기로 하였다는 점에서 동 분쟁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부정하고 중재재판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재판소는 필리핀의 청구내용을 중심으로 동 분쟁이 남중국해의 해양지형에 대한 영유권의 귀속에 관한 문제가 아니며 중국이 자국의 권리가 미친다는 해역은 다른 국가들의 주장이 중복되고 해양경계가 아직 해결되지 않는 해역이라고 전제하였다. 이에 따라, 동 분쟁은 해양법협약이 규정하는 섬의 법적 지위,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 등에 관한 해석 및 적용에 관한 문제이어서 필리핀의 청구내용에서 일부에 대한 재판관할권이 인정된다고 판단하였다. 둘째, 중국은 동 분쟁이 국가주권과 관련된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 남중국해에 대한 역사적 권원을 주장하며, 소위 ‘9단선’ 이내의 해역은 중국의 역사적 수역이며 ‘다툴 수 없는 중국의 권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재판소는 중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주권문제를 결정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증거력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셋째, 남중국해의 해양지형들의 법적 지위에 관한 것으로, 해양법협약이 규정하는 바에 의하여 분쟁해역의 해양지형들은 그 자체의 배타적 경제수역이나 대륙붕을 가질 수 없는 ‘저조고지’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넷째, 중국이 남중국해에 인공섬을 건설하는 것에 대하여, 재판소는 해양법협약이나 국 제법 원칙에 의하면 해양에 인공섬을 건설하는 것은 인정되지만 인근 국가들에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고 해양생태계에 중대한 위협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와 같은 재판소의 판정은 특히 재판관할권, 영유권에 관한 역사적 권원, 해양지형의 법적 지위, 인공섬의 건설 등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독도문제에 보여주는 법적, 정책적 시사점이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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