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tudy was carried out to investigate the effect of the feeding method of total mixed fermentation (TMF) and concentrate feed on the growth performance, carcass and meat characteristics of late fattening Hanwoo steers. Twenty-four Hanwoo steers were used in this study. The control group was fed with concentrate feed + rice straw from the growing to the late fattening period, while the T1 group was fed with TMF from the growing to the early fattening period and concentrate feed + rice straw for the late fattening period. The T2 group was fed with TMF from the growing to the late fattening period. The average daily gain (ADG) and feed conversion ratio (FCR) were not different between the treatment and control group. Serum cholesterol and high density lipoprotein (HDL) cholesterol concentrations were higher in the T2 groups than in the control group (p<0.05). The yield grade and quality grade were not different between the treatment and control group. The lightness of longissimus muscle was higher in the T1 group than in the control and T2 groups (p<0.05). Poly-unsaturated fatty acid (PUFA) of longissimus muscle was increased in the T2 groups than in the control group. Therefore, the method of feeding TMF and concentrate feed could have a positive effect on the lightness and fatty acid composition of longissimus muscle without affecting the growth and carcass grades of Hanwoo steers.
Jeongseon-gun had 892 Korean beef cattle farmers, and had 9,180 Korean beef cattle in September, 2010. Average fed cattle by farm was less than 20 heads. The small scale breeding ratio was higher than the case of Gangwon-do and the average country level. Jeongseon-gun tries to increase the beef cattle to 20,000 in oder to increase farm income. The purpose of the study is to analysis the farmer's intention to the increasing feed scale. Data were collected by questionnaire. Frequency analysis, factor analysis and cluster analysis were used to analyze. In the results of frequency analysis, about 92% respondents were agreed to expand the increasing scale to 20,000 heads. In order to accomplish the goal, about 63% respondents wanted complex for Korean native cattle breeding. About 62% respondents had intention to increase the feeding cattle heads. In the results of factor analysis, four factors were derived as "Government support", "Infrastructure construction", "Brand development" and "Construction logistics system". In the results of cluster analysis, three clusters were derived as "group that does not need support from the government", "group that needs construction of logistics system" and "group that needs support system".
독도는 고대의 신라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의 고유영토이다.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41호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독도는 행정적으로 울도군의 소속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독도를 침략하기 위해 독도를 주인이 없는 섬이라고 했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칙령41호를 부정해야만 했다. 칙령 41호에는 “울릉전도, 죽도, 석도” 를 행정구역으로 지정되어있다. 여기에서 석도는 독도이다. 일본은 석도가 독도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일본은 석도가 관음도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울릉도 주변에는 죽도와 관음도만 있다는 것이다. 울도군의 관할구역은 울릉도 주변에 있는 섬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899년 울릉도 시찰위원으로 임명된 우용정이 울릉도를 조사하고 울릉도의 범위에 독도가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칙령41호로 울도군을 정한 이유는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 하게 위한 것이다. 독도를 관리할 이유가 없었다면, 명칭으로써, ‘울도군’이 아니고, ‘울릉군’ 으로 충분했다. 위키피디아의 ‘석도’는 내용적으로 죽도문제연구회가 날조한 것이다. 죽도문제연구회는 칙령41호의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 1904 년 이전에 독도를 알지 못했다. 명칭상으로 ‘석도’가 ‘독도’로 변경된 이유를 알 수 없다. 한국의 주장대로라면, 석도는 우산도가 되어야 옳다. 1905년 일본이 독도를 편입하였을 때, 한국은 일체 항의를 하지 않았다.” 일본은 칙령41호의 ‘석도’는 ‘관음도’라고 주장한다. 울릉도 주변에는 독도가 없고, ‘죽도’와 관음도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것은 추측이고, 합당한 설명은 없다.
본 연구는 안용복의 2차도일의 성과와 일본정부의 안용복 업적을 폄훼에 대해 논증하였다. 안용복은 2번에 걸쳐 도일하여 호키주태수에 고발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 토임을 확답받았다. 그런데 현재의 일본정부는 안용복은 관직을 사칭하고 월경한 범법자이고, 조선국의 대표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조정에서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받았다고 하는 안용복의 진술은 신뢰할 수 없다고 폄하했다. 또한 도해금지령은 울릉도에 국한된 것으로 독도에 대한 도해금지령은 내리지 않았다고 사실을 날조했다. 사실은 안용복의 1차도일은 일본어부들의 울릉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조선과 막부 사이에 울릉도와 독도 를 둘러싼 영유협상을 하도록 했고, 최종적으로 막부가 돗토리번에 소속을 확인한 후 일본어부들의 도항을 금지시키고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인정하였다. 2차도일은 1696년 1월 막부가 조선영토임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미루고 있는 대마도로 하여금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조선정부에 알리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안용복은 1차도일로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확인받았고, 2차도일로는 대마도로 하여금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하도록 하는데 역할하였음을 논증하였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 10일 독도를 방문했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영토 라고 하여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비난했다. 특히 일본 국회에서 독도문제를 국제사 법재판소에 제소하여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본 연구는 일본국회에서 독도문제를 국제사 법재판소에서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분석하였다. 첫째, 일반적으로 일본은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일본국회에는 국회의원들이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하는 인식이 적극적인지, 소극적인지, 아니면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고찰했다. 적극적인 견해는 독도가 일본영토임에도 불구하고 현 민주당정부가 적극적으로 독도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고 일본정부를 비난했다. 소극적인 견해는 독도가 일본영 토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게 된 것은 이전의 자민당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하여 정치권 모두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2005년 일본 시마네현이 ‘죽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그 이후 매년처럼 중앙 정부의 관료를 초빙하여 2월22일에 ‘죽도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일본 국회에서도 시마네현의 ‘죽도의 날’ 기념행사에 즈음하여 독도문제를 제기하여 영토문제는 외교문제 이기 때문에 정부주도의 행사를 개최하여 국내외에 홍보해야할 것과 독도문제를 국제사법 재판소에 제소하여 신속하게 해결할 것을 독촉했다. 그러나 독도문제를 제기하는 의원은 시마네현 출신 국회의원 단 한사람뿐이다. 그것도 매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간혹 제기했다. 이처럼 일본국회에서도 독도 영유권에 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즉 다시 말하면 일본국회에서도 독도가 일본영토이기 때문에 반드시 찾아와야하는 영토라는 인식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대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해결하자고 과거 3번에 걸쳐 공동제소를 제의한 바 있었는데, 한국이 모두 거절했다. 본 연구는 공동제소를 제의한 일본의 의도를 분석하게 위해 2005부터 2018년까지 일본국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시기별 나누어 조사하여 검토하였다.
2005년 2월 시마네현(島根県)이 ‘죽도(竹島)의 날’을 제정하였고, 한국정부가 이에 항의를 하였을 때, 야당위원이 일본정부에 대해 죽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과거 2,3차례 공동제소를 한국에 제안하였으나 거부했다. 그래서 가장 적절한 방법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 검토 중이라고 답변했다. 이처럼 일본정부는 형식적 답변만을 반복하여 현실적으로 제3자의 조정에 의한 해결이 불가능함을 표명했다. 2011년 한국정부가 헬기장 개수공사와 해양과학기지 건설을 계획했다. 일본국회에서 야당위원이 다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독도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정부의 입장은 이전과 동일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자 야당위원은 공동제소가 불가능하면 단독제소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도 일본정부는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고 있다는 답변을 반복했다. 일본정부가 야당위원의 주장에 대해 이 같은 동일한 답변을 계속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전 정권들이 한일협정 등에서 외교적으로 한국의 실효적 지배를 묵인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정부주도의 ‘죽도의 날’을 제정한다든가, 국제사법재판소에 ‘단독제소’를 할 만큼 일본에 영토적 권원이 존재하는 분쟁지역이 아님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도문제연구회의 좌장격인 시모조 마사오(下条正男)는 비논리적인 주장으로 칙령41호 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石島)」에서 석도는 독도가 아니고 지금의 「관음도」라고 하여 사실을 날조했다.
첫째, 『조선어사전』에서 「독(獨)」이 돌(석)의 사투리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올바른 해석을 일부러 피하고, 「단독(單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부분을 적용하여 칙령의 석도는 독도가 될 수 없다고 비논리적인 주장을 한다. 둘째, 시모조는 일본의 고문헌 니이타카호(新高号) 군함일지에는 1904년 울릉도에서는 독도라고 기록 하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한 논증을 거부하고 1904년경에 울릉도사람들이 독도에 들어가서 강치를 잡았는데, 그때의 울릉도사람들은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처음으로 독도에 들어갔다고 사실을 날조했다. 셋째, 시모조는 광여도와 청구도가 지금의 죽도를 우산도로 잘못되게 비견하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1900년에 발령된 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에서 「석도」는 지금의 「관음도」라고 주장한다. 그는 광여도와 청구도가 수토사 박석창이 잘못 그린 「울릉도도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을 일부러 피하고 비논리적으로 함부로 사실을 날조했다. 넷째, 1900년에 발령된 칙령 41호의 「석도」는 울릉도 사투리로 돌섬을 「독섬」라고 하는 것을 문헌상 표기로 「독도」라고 기술하였다는 것은 1904년 의 일본군함 니이타카호가 증명하고 있고, 심흥택 군수가 1906년 “본군 소속 독도(獨島)” 라고 표기했던 것으로 명확하다. 그런데 시모조는 침략적인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정당화 하여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비논리적으로 사실을 날조했다. 이처럼 죽도문제연구회가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영토내셔널리즘에 의한 침략행위이다.
본 연구는 일본 영토정책의 틀 안에서 독도가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일본에서의 독도 문제 제기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확대에 의 해서 초래되었으므로, 이 내셔널리즘의 약화만이 문제 해결의 핵심임을 밝혔다. 다음으로 러시아와 문제가 되고 있는 쿠릴열도 귀속 문제는 일 본측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도 알아냈다. 또 조어도 문제는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역사적 근거가 박약함에도 불구하고 실효적 지배론을 앞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규명하였다. 특히 일본이 조어도 문제에 관한 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은 한국과 관계가 있는 독도 문제와 대조되는 입장이어서 주목을 끈다. 이상과 같은 고찰은 일본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국가와의 영토분쟁에 대한 현안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 영토분쟁이 앞으로 어떻 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망을 하였다. 즉 독도의 경우는 한국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면, 일본의 집요한 요구에 설복될 가능성이 있다. 쿠릴열도 문제 역시 러시 아의 국내적인 어려운 상황을 기다렸다가 일괄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어도는 일본이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으나, 영토 적 권원이 미약하다는 약점 때문에, 중국에 자원의 공동 개발을 제안하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의 사례를 가지고 일본이 독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한국의 독도 영유권 문제가 위기에 봉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울러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