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영토문제’라 하면 오키나와(沖縄)와 북방영토(北方領土)가 주요 대상이었 으며 1972년 오키나와 반환 이후에는 북방영토가 최대 현안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 센카쿠(尖閣)와 독도에 대한 ‘영토 내셔널리즘’이 높아져 왔다. 그런 가운데 작년12 월 일본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하였고 민주당이 참패하였다. 야당에서도 보수 우익 정당들 이 약진한 반면 혁신정당들은 존폐의 위기에 빠졌다. 1955년 체제하 일본정치에서의 보수 -혁신(진보) 대립은 헌법9조, 미일안보, 자위대가 쟁점이었는데 1990년대 후반 소위 ‘총보 수화’를 거쳐 바야흐로 중의원 의원들 중 거의 80%가 헌법‘개정’과 ‘집단적 자위권’에 찬성 하는 등 일본정치의 ‘우경화’가 두드러진다.
일본정치의 보수화·우경화가 한일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연 스럽다. 하지만 한일관계사에서는 일본의 보수정치가 항상 부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 었다. 그 사실은 1965년 한일협정이래 소위 ‘65년 체제’를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즉, 일본 ‘일당 우위제’ 보수정권과 한국 ‘개발독재’ 정권 사이에서 냉전과 개발의 이익을 일치 시키며 과거청산과 독도문제를 내버려 둠으로서 협조를 이뤄 낸 것이 바로 ‘65년 체제’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따라서 일본정치의 보수화 우경화 가운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한일관 계에 작용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일본정치에서의 ‘문 화적 폭력’으로서의 식민지주의와 ‘동맹의 딜레마’ 시각에서 일본의 역사인식과 영토정책을 살펴본다.
현재 동북아 지역은 냉전적 요인의 영향를 받아 주요국간의 경쟁과 불신이 중첩되는 가운데 여전히 상당한 불확실성을 내재하고 있다. 한편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상대적 쇠락, 미국의 아세아 귀환 등 국제정세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 댜오위다오 분쟁은 동북아의 경제 발전과 평화 안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댜오위다오 분쟁의 고리를 풀려면 다자적 시각과 동북아 지정학적 관점의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해주고 있다.
본 연구는 현 단계 심화되고 있는 중일 댜오위다오 갈등은 동북아 국제 정세가 변화 되고, 관련 각국이 동북아 미래 질서에 관한 전략을 구상하고 있는 시점에서 발생되고 전개 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며 동북아 질서라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댜오위다오 분쟁이 격화된 배경과 촉매 요소 ,분쟁의 심화가 미친 영향 등을 분석하고, 댜오위다오 분쟁의 해결에 관한 시사점을 모색하고자 한다.
최근 동아시아 지역의 해양 도서 분쟁은 불신과 경쟁으로 특징 지워진 이 지역을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 잠재적으로는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될 해양(EEZ와 대륙붕) 자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외형상으로는 해양 영토의 보전과 국가안보의 확보라는 형태를 띤 쟁점들이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핵심적 과제로 떠올랐다. 그 결과 해양 쟁점이 아시아 지역안보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해양 레짐은 이런 갈등을 완화하고 협력에 대한 믿음을 창출한다. 아시아 지역의 확고한 다자간 해양 레짐의 부재는 수용가능하고 관련 당사자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레짐 을 발전시키기보다 현상유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상과 위기와 손실과 이익을 고려하는 민족국가들의 정치적 계산을 반영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은 단지 아직까지 어업자원의 관리와 해양 환경보호에 초점을 맞춘 다자간 해양 레짐의 심각한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종합하면, 이런 상황은 특별하고(ad hoc) 특정쟁점에 전문적인(issue-specific) 다자간 해양 레짐 건설의 발전적 과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런 과정을 동북아 지역으로 이동시키려면, 관련 당사국들은 동북아 다자간 해양 레짐 의 목적과 원칙을 논의하기로 합의해야 한다. 해양관할권의 확장과 관련하여, 몇몇 어업에 대한 양자간 협정이 이미 재협상되고 있다. 그것들은 양자간 협정들을 조정하고 그런 레짐 에 지역의 모든 국가들을 포함시킴으로서 종합적인 지역 협정의 무대와 기초를 형성한다. 비록 진보가 더디긴하지만, 다자간 대화가 이런 과정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 동해의 환경보 호레짐 건설은 이런 가속화 과정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쿠릴열도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각 정권별 정책과 이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통시적으로 살펴보았다. 최근까지 러시아의 입장은 큰 변함이 없다. 즉, 이전 정권에 의해 약속된 것은 크게 부정하지 않는다. 1956년 소일공동선언에 따라, 평화조약 체결 이후 하 보마이와 시코탄의 반환은 인정하되, 1990년대 중반 협상과정에서 일본의 압력에 의해 등장한 쿠나시르와 이투루프는 배제시켰다. 지금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가 결코 정당한 권리로서 자신에게 속한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 프로젝트를 제안했다는 사실은 협상의 여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영토적 분쟁과 갈등은 다른, 예를 들면 통상갈등이나 분쟁과 달리 특수성을 띤다. 그것은 분쟁당사국의 민족주의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국내지도자에게 엄청난 압력을 행사하며 따라서 국내정치적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자원, 특히 석유와 가스 등과 같은 전략적 자원과 관련된 국가적 핵심이익이 개입되고, 어업자원을 포함하여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과 연계되고, 심지어 제3국의 외교정책, 예를 들면 미국의 세계전략 등과도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든 협상의 여지는 있다. 러시아와 일본 모두에게 협상은 다양한 국가적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필요조건을 형성한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논의와 러시아 외무성 자료의 검토를 통해 드러난 사실들은 다 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즉, 일본과 분쟁 중인 쿠릴열도 문제와 관련된 러시아의 공식입 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현재 쿠릴열도를 둘러싼 러-일 국경은 확실한 국제적 법적 기반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남부 쿠릴열도는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러시아에 귀속되었고, 그 법적 기반은 연합국간 협정(1946년 2월 11일의 얄타협정,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선언)이다.
둘째,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언급된 내용의 수정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 후 아시아에서 전개된 현상유지를 훼손하고, 아시아의 영토적 안정성을 해칠 것이다. (중국 의 국경이기도 한 외몽고의 지위, 한국의 독립, 많은 섬들과 기타 지역의 지위)
셋째, 쿠릴열도의 성격과 관련하여, 쿠릴열도는 분리될 수 없는 지리적 개념으로 고려되 어야 한다. 왜냐하면 쿠릴열도는 그런 분류의 모든 특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1956년 10월 19일의 소-일 공동선언에 따라 평화조약으로 전쟁상태가 종결되면, 러시아는 하보마이와 시코탄을 일본에 반환할 것이다.
2010년 9월 15일 무르만스크에서 조인된 러시아와 노르웨이간 ‘바렌츠해의 해양경계 및 협력에 대한 조약’은 거의 40여년 동안의 과정을 종결지었다. 조약이 북극해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시점에 타결되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해빙(sea-ice)의 해빙(解氷) 전망과 북극해의 해양수송 가능성 및 천연자원, 특히 석유자원에 대한 접근 가능 성은 그 시점에서 양 당사국이 조약에 합의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두 북극해 연안국 들은 이런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고,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적 권리와 국제수송에 대한 관할 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간의 차이점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와 노르웨이의 해양경계를 획정하는 것은 양국 모두의 해양 영역 강화에 기여할 것이다. 노르웨이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또한 그간 자신이 주장했던 영역에서 일부는 노르 웨이에게 양보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주장의 대부분을 성취했다. 그러나 두 당사국은 공식적으로 2010년 9월 조약에 다자간 조약 하의 그들의 권리와 의무가 이 경계에 의해 미리 확정된 것은 아니라는 조항을 포함시킴으로서 그들의 권리를 유보했다. 미래의 초점은 이들 해양영역에 바렌츠 조약을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이다. 북극해 해양경계에 관한 노르웨이-러시아 조약의 더 광범위한 영향은 훨씬 더 불확정적이다. 그러나 이 조약이 2008년 일루리사트 선언(Ilulissat Declaration)을 포함해 북극해 지역의 질서정연한 거버 넌스에 더해진 것은 분명하다
이 글은 ‘시마네현 죽도문제연구회’가 발간한 제2기 ‘죽도문제에 관한 조사연구’ 최종보 고서(2012.3)에 수록된 스기하라 다카시(杉原隆)의 보고서 「에도시대부터 쇼와시대에 걸 쳐 다케시마와 관련된 오키인들의 발자취」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본 것이다. 스기하라는 이 보고서에서 울릉도·독도 문제에 관련된 오키섬 주민 개개인의 역할, 집안 내력, 심지어 그들 후손의 현재 상황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울릉도·독도가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오키섬 주민들의 삶과 밀착된 지역이었다는 점, 즉 전근대에 일본(오키섬 주민)이 독도를 실질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음을 우회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독도의 역사적 권원이 일본에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스기하라 보고서’는 비록 사료에 근거하기는 하나, 엄밀한 학술적 논증 형식을 갖춘 논문이라기보다 보고서 형식의 기사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스기하라 보고서’는 울릉도·독도가 오키섬 주민들의 삶과 관련이 있었다는 ‘기억’과 ‘기록’만을 가지고 독도영유권 주장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는 드러난 경 험적 사실만을 절대화함으로써,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실증주의적 사고 방식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국제연합헌장’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국제연합의 어떠한 회원국도 그의 계속이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협하는 분쟁에 대해 안보리에 주의를 환기 시킬 수 있으며(제35조), 안보리는 분쟁의 어떠한 단계에 있어서도 적절한 조정의 절차와 방법을 권고할 수 있다(제36조 제1항). 안보리는 권고를 함에 있어서 일반적 으로 법적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규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당사국에 대하여 국제사법재판 소에 회부하여 해결할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제36조 제3항).
일본정부는 1954년 9월 25일 독도영유권 문제를 먼저 분쟁으로 간주하고 그 분쟁을 국제 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해결할 것을 한국정부에 제의한 바 있으며, 이에 대해 한국정 부는 1954년 10월 22일 한국의 권리를 어떠한 국제재판소에 의해 확인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일본정부의 제의를 거절했다. 2012년 8월 10일 이명박대통령의 역사 적인 독도방문에 대해 일본정부는 8월 24일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해결하 자고 제의해온 바 있다. 역시 한국정부는 이를 일축했다.
독도영유권 분쟁의 해결에 관한 일본정부의 기본적인 전략은 ‘국제연합헌장’ 제36조의 규정에 따른 안보리에 권고 결의를 통해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으로 추정된 다. 이에 대한 한국정부의 대응전략을 수립함에 있어서 한국정부는 독도영유권 문제를 분쟁 화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안보리가 ‘국제연합헌장’ 제36조의 규정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 에 제소하라는 권고결의를 해도 이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지 아니하는 것을 고려 해야 한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 및 그 실효적 관할 상 대한민국의 영토임은 재론을 요치 아니한다. 이는 우리 역사기록 뿐만 아니라 일본의 태정류전(太政類典)과 일본총리부 령 제24호(1951.6.6) 등에도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다. 국제법적 견지에서는 II차 세계대전 후 포츠담선언(8)과 일본항복 후 초기 일본의 점령 및 통제를 위한 연합국최고사령관에 시달된 훈령(1945.11.1) I(d)에 근거하여, 연합국최고사령관(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이 훈령(지령) 677호(1946.1.29)에 의거 명문으로 ‘독도’ 등을 일본주권에서 제외 조치한 것이고, 당시 일본정부는 이를 전적으로 수용하여 일본총리 부령 제24호(1951.6.6) 및 대장성 고시 제654호(1946.8.15)에 ‘독도’ 등이 일본 땅이 아니라 외국 땅임을 명문으로 규정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시 동 강화조약 제19조(d)에 동 SCAPIN 677호의 효력이 계승되어 있다. 또한, 일본은 한·일 기본관계조약 (1965.6.22)에 의거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국제법상 묵인(acquiesence)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그간 터무니없이 ‘독도’가 일본영토 소위 ‘다케시마’라 고 주장하여 왔다. 근간에는 한국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일본의 초, 중, 고교 교과서(사회과)에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일률적으로 왜곡하여 교육을 실시하고 있 다. 이런 여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 10일 독도를 방문하였다. 일본정부는 이명 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강하게 비난하고, ‘독도영유권’ 문제를 공동으로 국제사법재판소 (ICJ)에 제소하여 그 판결을 받아 결정하자는 제의를 우리정부에 하여 왔다(2012.9.21). 끈질긴 일본정부의 동 ICJ제소 공세 결과 인 듯 근간 우리사회 일각에 ‘부득이한 경우’에 대응하여 우리도 ICJ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지난 (2013년) 3월 25일 국회헌정기념관에서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국제사법재판소 (ICJ)제소에 대한 대응방안’ 제하에 세미나가 열렸다. 본고는 동 세미나에서 배포된 자료 등을 중심으로 동 ICJ제소 문제를 심층 고찰하여 소위. 독도문제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정 에서 그 일환으로 우선 ‘독도’가 불법적으로 탈취 된 역사적 문제(a historical issue)이고, 새삼스럽게 독도영유권에 관한 법적다툼(a legal dispute)이 될 수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가 독도문제를 계속 심도 있게 앞으로도 연구하여야 하는 것은 어디 까지나 독도영토주 권보유국가로서 독도를 온전히 보존하고, 불법부당한 일본의 독도 재 침탈 야욕을 밝히고, 규탄하고, 국내외적으로 홍보하여 일본의 독도 재 침탈야욕을 저지하는 데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지, 결코 우리 독도영토주권을 ICJ에 회부하여 결정하자는 일본의 제의에 동의할 수 없음을 국제법적 견지에서 접근코자 하는 것이다.
독도 문제는 동아시아의 미래 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럼으로 앞으로는 독도 문제 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현실주의적인 해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독도 문제에서 1905년 1월 일본의 독도 점유는 조선 침략을 시작하면서 5년 뒤의 강압적인 한국 병합을 위한 전조로 행해졌다는 점에 시초가 있다. 일본으로서는 이 주장을 논박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이렇듯 독도 문제는 일본군 강제위안부 등 여전히 미해결 상태인 다른 과거사 문제 청산작업과 동시에 진행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젠 이런 문제를 인정한 뒤 대화와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쌍방 모두 심대한 손실을 입게 될 상황에 처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런 중대한 의미를 갖는 독도 문제에 대해 한국 국민들의 현재 상황을 파악해 보는 시도이다. 이를 위하여 이 연구에서는 특히 우리 국민의 독도 영유권 인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 연구에서는 먼저 한국 국민의 독도 영유권 인식 현황을 살펴보았다. 더불어 사회경제학적 입장에 따른 한국 국민의 독도 영유권 인식 현황을 살펴보았다. 다음 으로는 독도 영유권과 관련 있다고 판단하는 다른 항목들에 대한 인식 현황을 살펴보고, 이들 관련 항목과 독도 영유권 인식과의 관련성을 분석해 보았다.
1. 「태정관지령」 부속 지도 「기죽도약도」 발견 경위
2005년 3월 대신대학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 죄에 대한 설교를 계기로 나는 독도 문제 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죽도 외 1도 건에 대해서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는 태정관(太政官) 지령이 원본에서는 붉은 글씨로 되어 있는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붉은 글씨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그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 원본의 개시 신청을 하고 동년 5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원본에는 「기죽도약 도(磯竹島略圖)」(울릉도 약도)로 쓰인 작은 봉투 안에 접혀진 한 장의 부도(付圖)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죽도약도」였습니다. 펼쳐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부도 오른쪽 상단에도 「기죽도약도」라고 기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죽도(울릉도)와 함께 송도(독도) 가 그려져 있던 것입니다. 2006년 5월 고신대학 강연에서 제시한 공문록 및 「기죽도약도」 에 대해 6월 7일 부산 MBC 문화방송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에서 공개하였습니다.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선생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즉시 인터넷상 에 공개하였습니다. 「기죽도약도」의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터넷상과 서적( 다케시마 =독도논쟁 內藤正中・박병섭, 2007년, 新幹社)에 공개한 것은 박병섭 선생님이 처음이었 습니다.
1. 「태정관지령」 부속 지도 「기죽도약도」 발견 경위
2005년 3월 대신대학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 죄에 대한 설교를 계기로 나는 독도 문제 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죽도 외 1도 건에 대해서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는 태정관(太政官) 지령이 원본에서는 붉은 글씨로 되어 있는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붉은 글씨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그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 원본의 개시 신청을 하고 동년 5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원본에는 「기죽도약 도(磯竹島略圖)」(울릉도 약도)로 쓰인 작은 봉투 안에 접혀진 한 장의 부도(付圖)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죽도약도」였습니다. 펼쳐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부도 오른쪽 상단에도 「기죽도약도」라고 기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죽도(울릉도)와 함께 송도(독도) 가 그려져 있던 것입니다. 2006년 5월 고신대학 강연에서 제시한 공문록 및 「기죽도약도」 에 대해 6월 7일 부산 MBC 문화방송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에서 공개하였습니다.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선생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즉시 인터넷상 에 공개하였습니다. 「기죽도약도」의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터넷상과 서적( 다케시마 =독도논쟁 內藤正中・박병섭, 2007년, 新幹社)에 공개한 것은 박병섭 선생님이 처음이었 습니다.
1. 「태정관지령」 부속 지도 「기죽도약도」 발견 경위
2005년 3월 대신대학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 죄에 대한 설교를 계기로 나는 독도 문제 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죽도 외 1도 건에 대해서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는 태정관(太政官) 지령이 원본에서는 붉은 글씨로 되어 있는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붉은 글씨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그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 원본의 개시 신청을 하고 동년 5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원본에는 「기죽도약 도(磯竹島略圖)」(울릉도 약도)로 쓰인 작은 봉투 안에 접혀진 한 장의 부도(付圖)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죽도약도」였습니다. 펼쳐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부도 오른쪽 상단에도 「기죽도약도」라고 기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죽도(울릉도)와 함께 송도(독도) 가 그려져 있던 것입니다. 2006년 5월 고신대학 강연에서 제시한 공문록 및 「기죽도약도」 에 대해 6월 7일 부산 MBC 문화방송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에서 공개하였습니다.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선생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즉시 인터넷상 에 공개하였습니다. 「기죽도약도」의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터넷상과 서적( 다케시마 =독도논쟁 內藤正中・박병섭, 2007년, 新幹社)에 공개한 것은 박병섭 선생님이 처음이었 습니다.
1. 「태정관지령」 부속 지도 「기죽도약도」 발견 경위
2005년 3월 대신대학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 죄에 대한 설교를 계기로 나는 독도 문제 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죽도 외 1도 건에 대해서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는 태정관(太政官) 지령이 원본에서는 붉은 글씨로 되어 있는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붉은 글씨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그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 원본의 개시 신청을 하고 동년 5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원본에는 「기죽도약 도(磯竹島略圖)」(울릉도 약도)로 쓰인 작은 봉투 안에 접혀진 한 장의 부도(付圖)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죽도약도」였습니다. 펼쳐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부도 오른쪽 상단에도 「기죽도약도」라고 기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죽도(울릉도)와 함께 송도(독도) 가 그려져 있던 것입니다. 2006년 5월 고신대학 강연에서 제시한 공문록 및 「기죽도약도」 에 대해 6월 7일 부산 MBC 문화방송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에서 공개하였습니다.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선생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즉시 인터넷상 에 공개하였습니다. 「기죽도약도」의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터넷상과 서적( 『다케시마 =독도논쟁』內藤正中・박병섭, 2007년, 新幹社)에 공개한 것은 박병섭 선생님이 처음이었 습니다.
2. 「태정관지령」 부속지도 「기죽도약도」의 의의
「기죽도약도」가 발견되기 전부터 공문록 사료를 진지하게 마주 한 연구자들은 ‘외 1도’ 가 송도(독도)라고 하는 바른 결론을 당연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기죽도약도」는 이러한 연구자들의 연구의 결과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박병섭 선생님이 “「공문록」 에 쓰여진 외 1도인 송도(松島)가 독도인 것은 「공문록」 부속 「기죽도약도」를 보면 일목 연하다”(『시모죠 마사오의 논설을 분석한다』, 90쪽, 『독도연구』 제4호, 2008년, 영남대학 독도연구소)고 적고 있는 대로입니다. 태정관지령을 문서사료와 함께 확인한 「기죽도약도」 에 의해서 ‘외 1도’가 어느 섬을 가리키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고 하는 견해는 거부되었습 니다. 게다가 ‘외 1도’를 공문록 그 자체로 부터 해석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해 공문록 밖에서 독도 이외의 섬이라고 결론지으려고 하는 잘못된 시도와 결론도 무력화시켜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3. 독도 문제
독도연구의 제1인자로 거론되는 고 나이토 세이쥬(內藤正中) 선생님은 일본 외무성의 자세를 “과거의 역사와 정면에서 부터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역사의 일부를 편의주의에 따라 수박 겉핥기를 하고, 그 한편으로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는 사실은 무시하고 고려하지 않는다”(『죽도=독도문제입문』 64쪽)고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즉, 국가가 역사로 부터 진심 으로 배우고 마주보고 역사적 사실을 존중해 간다면, 독도 문제도 해결의 길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국의 역사에서 진심으로 배운다는 것은 국가 스스로가 그 시대의 역사에 새겨진 발자 취로서 역사적 사료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진지하게 응시하고 회개하는 것에 의해서 미래는 올바르게 열어 갑니다. 「기죽도약도」 등이 중요한 사료는 이것을 보는 사람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진실로 마주 보는지 어떤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죽도(울릉도) 외 1도(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태정관지령은 확실히 오늘 일본에게 회개를 강요하는 지령인 것입니다.
이 글은 과거, 주로 식민지 시기의 한-일 연대 투쟁의 경험에 기반하여 앞으로의 한-일 민간 사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의 발전적인 가능성들을 모색해보는 시도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연대’는 무엇보다 어느 한 쪽의 ‘맹주론’, 즉 그 어떤 불평등한 전제조건들도 수반하지 않는, 한-일 양쪽 민중의 교류와 공동의 투쟁을 뜻한다. 따라서 묵시적으로나마 ‘일본맹주론’을 저변에 깔았던 구한말 시절의 일본 범아시아주의자들의 ‘연대’를 가장한, 내지 표면적으로 ‘연대’의 기치를 내세운 제반 시도들을 여기에서 제외시키고, 아울러 한국 인의 ‘열등성’을 전제로 하는 식민지 시기의 각종 부일(附日)협력 행위들과 엄격히 구분시키 려고 한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주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와 의 경계선에 선) 자유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내지 무정부주의자 등 일본제 국에 비타협적으로 저항한 만큼 또 하나의 저항주체인 조선민족과 평등한 동지적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그나마 보였던 부류들이다.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었던 매우 급진적인 – 거의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운 - 자유주의자로 법조인 야마자키 게사야와 같은 양심 인사들을 언급할 수 있으며, 그와 함께 (일본인 반체제 투사들과 함께) 조선 및 대만의 반체제 투사들을 변론해준 후세 다쓰지는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으로 분류된다. 마찬가지로 1920년대 반(反)식민지 문학의 창시자인 나카니시 이노스케도 – 비록 전후에 공산 당에 입당했지만 – 그 당시로서는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 을 치르면서 조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억압적 체제에 같이 맞섰던 이들은 바로 학계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나 가장 선진적인 대기업들에서 (이소가야 스에지) 공산주의적 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이었다. 일본 ‘내지’와 중국에서 한-중-일 무정부주의자들의 연대투쟁도 1920년대 초반부터 꽃피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도들의 의미를 높이 사는 동시에, 그 한계도 지적해야 한다. ‘평등한 공통투쟁’이라 해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길러낸 아비 투스가 그대로 작동돼 일본 내 공산주의적 조직 안에서도 조선인들을 타자화시킨 일이라든가 일본 무산계급 작가들의 작품 (오구마 히데오, 장장추야)에서 조선을 여성화시켜 오리 엔탈리즘 논리의 적용 대상으로 만드는 등 반체제 투사들도 체제의 논리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일제의 패전 이후에는 무장투쟁 등 다양한 모색의 기간을 거친 일본공산당 은 1955년6월의 제6차 대회 이후에 체제내 편입의 길을 택함과 동시에 (일차적으로 일본 내의) 조선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거의 끊어버리고 말았고, 비슷한 시기에 북조선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국제주의보다 훨씬 더 민족주의적인 노선으로 가게 됐다. 이렇게 해서 식민지 시기 한-일 연대 투쟁의 유산은 점차 역사 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