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의 「청구도범례」에서 고지도의 경우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작성하였지만 만약 상하·좌우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전체 지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란 지적을 통해 현재 고지도를 보는 시각에 대한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독도, 우산도는 울릉도 동남쪽에 있다. 「청구도범례」에 따르면 고지도상의 ‘우산도’의 경우 동쪽이나 동북쪽에 그려진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서쪽이나 북쪽, 남쪽에 그려진 것은 우산도의 위치가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 고지도가 나왔을까? 그 이유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이 글이 작성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우산도·무릉도 설명을 통해 우산도는 무 인도임을 정확히 인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울릉도가 울진에 가깝지만 우산을 먼저 들고 울릉도를 뒤에 기록한 것은 우산이 무인도임을 알았기 때문에 적을 것이 없어 먼저 기록하고, 울릉도에서 양자의 관계를 적을 수밖에 없는 사정 때문에 그러한 서술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산’, ‘무릉’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것이 고지도상 본토와 울릉도 사이에 ‘우산도’를 표기하게 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울릉도 동(남)쪽에 ‘우산도’를 표기한 지도는 1693년 이후에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를 건너간 이후 ‘울릉도쟁계’ 발생 이후, 1694년 장한상이 울릉도에 파견된 이후에 수토제가 확립되면서 주로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지도에 나온다. 조선 초기의 경우 주로 강원도에서 울를도와 독도를 드나들었지만 조선후기의 경우 경상도, 전라도 지역의 동남해연안민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드나들었다. 그들은 울릉도의 동북방 에 ‘우산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후기 고지도에서 울릉도 동북방에 ‘우산도’를 표시하는 지도가 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산도’가 표기된 지도를 두고 ‘독도’라고들 한다. 특히 울릉도 동쪽에 그려진 ‘우산도’ 는 독도임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울릉도 동쪽에 그려진 ‘소위우산도 ’는 독도 가 아니라 댓섬(죽도)이다. 영조때 강원도감사 조최수의 주기가 담긴 ‘우산도’는 ‘소위우산 도’를 빼고 ‘우산도’라고 하였고, 광활하다고 하였다. 이 주기가 담긴 ‘우산도’도 댓섬일 것이다.
일본의 고대지도인 교기도(行基圖)에 안도(雁道)라는 지명이 일본 북쪽에 표시되어 있는 데 이는 기러기가 다니는 길 즉 철새들의 통로라는 뜻이다. 이 안도는 곧 한당(韓唐)이라는 지명으로 바뀌는데 거기에는 “이 나라에는 사람이 없다(此国不有人形)”라는 부기가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독도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일본 지도에 표시되었기 때문에 이들 지역이 일본 땅 곧 독도가 자기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도 지도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남섬부주지도에는 한당이 조선의 강원도 쪽에 붙여서 표시하였다. 이는 이 지역이 일본 땅이 아니라 한국 땅이며, 독도는 분명히 한국 땅이라는 증거가 된다.
전통시대의 지도에는 가고시마현에 소장된 조선전도가 있는데 이 지도에도 울릉도와 독 도는 조선 땅으로 표시되어 있다. 에도시대에는 안용복의 두 차례에 걸친 도일사건이 있은 후에 애도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는 분명히 조선 땅이라고 못을 박았다. 일본의 천문관인 고교경보가 제작한 일본변계약도에는 동해를 조선해라고 표기했고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분명하게 표시하였다. 심지어 개정일본여지전도에서는 처음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영역에 넣었다가 에도정부의 간섭으로 제2판에서부터는 두 섬을 일본의 영역에서 제외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하야시가 만든 삼국여지노정전도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고 심지어 조선이 소유하고 있다고 부기까지 하였다.
또 일본에 심혈을 기울려 제작한 일본의 국가지도인 게이초 일본도(慶長日本圖)와 쇼우 호일본도(正保日本圖), 겐로쿠일본도(元禄日本圖)와 텐보국회도(天保國繪圖) 등에는 울릉 도와 독도의 표시가 전혀 없다. 이는 두 섬이 일본의 영역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제작한 수많은 지도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표시하였다. 1873 년 해군 수로국지도, 1875년의 일본 육군성의 조선전도, 1876년 한국에 비밀리에 파견되 었던 육군대위 승전사방(勝田四方) 등이 제작한 해좌전도, 1876 일본 해군 수로국의 한국 동해안도 등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이러한 지도 외에도 수백 종의 일본지도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시마네현에서 제작된 많은 지도에서도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시하지 않았 다. 시마네현 지도에도 독도 표시가 없는 지도가 대부분이다.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정책 이 강화되면서 비로소 죽도를 시마네현의 영역에 표시한다.
이와 같이 일본의 고대 지도부터 에도시대를 거쳐 근대지도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제작 된 지도에도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영토가 아닌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였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동해 해역에 대한 관심이 적은 편이어서 이 지역에 대한 문헌이나 지도상의 기록이 많은 편은 아니다.
현재는 독도를 비롯해 한·중·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역사문제, 영토문제 등이 동북아 정세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중국은 이 지역에 초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와 언론 매체 등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도에 대해 명확한 논평을 내놓지 않고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으면서 공식적인 표기법은 “獨島(竹島)”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와 일반의 사용빈도를 조사한 결과 “獨島”를 좀 더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역대지리지장도(Lidaidilizhizhangtu)』의 「당십도도(Tangshidaotu)」, 『대명혼일도(Daminghunyitu)』, 『광여도(Guangyutu)』경우를 빼고 현존하는 송대부터 명대까지 중국의 고지도에서 한반도의 윤곽이 정확하게 표현되었거나 독도가 표기된 지도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0세기 이전 중국의 지도 중 최초로 독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황여전람도(Huangyuquanlantu)』이다. 이 지도 중의 조선부분은 바로 조선이 청측에 제공한 것이다. 중국에서 목판본 지도를 제작하며 울릉도의 “鬱”이 너무 복잡해 뜻과 발음이 같은 “菀”로 바꾸었고 “于山島”의 경우는 전사 과정의 오류로 “千山島”라 표기했다.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있는 것은 조선에서 가져온 지도의 내용 그대로 그렸을 것이다.
이런 『황여전람도』의 울릉도와 독도의 표현 방법과 표기 방법은 이후의 지도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었다. 청 후기 독도가 표기된 거의 대부분의 『황여전람도』의 영향을 받은 지도라는 점이다. 이 지도들의 경우 19세기까지는 아직 바다의 국경선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바다에 국경선 등을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독도와 울릉도의 경우 일본과 동해를 사이에 두고 조선의 바로 옆에 섬 두 개와 지명을 표기하고 있어 지도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황여전람도』는 중국을 대표하는 지도로 조선부분은 조선에서 제공한 지리 정보를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 그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확실히 조선의 영토에 속하도록 표현한 것은 이 지도의 영향이 19세기 중국에서 발간된 다수의 세계지도에도 그대로 이어져 울릉도와 독도가 명확하게 조선의 영토라고 표현될 수 있었던 사실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D’Anville은 알려진 것보다 이른 1732년 “중국령 타타르의 일반지도”에서 울릉도와 독 도를 그려 넣었고 한자를 잘못 읽어 Fan Ling Tao, Tchian Chan Tao로 표기하였다. 그런데도 D’Anville의 “한국왕국도”는 100년 이상 유럽 고지도에서 한국지도의 정형으로 정착되었다. 단지 고지도 중에는 두 섬의 철자가 다른 것도 있고 또한 동해 탐사지도의 등장과 함께 두 섬이 네 개, 세 개 혹은 한개만 나오는 경우도 있으며, Siebold는 두 섬의 일본식 표기명을 뒤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의 고지도들이 울릉도와 독도의 소유국가가 한국임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두 섬 이 한국 영토임을 명시하는 지도로는 1832년 Klaproth가 제작한 “삼국접양도”의 한국과 일본 지도가 있는데, 울릉도와 꽤 떨어져 있는 독도를 일본명칭 “Takenosima”라 표기하였 지만 한국령(a la Coree)이라고 명시하였으며 독도는 울릉도 옆에 있는 죽도(Isle des Bamboo)는 Takenosima와는 다르다는 주석까지 병기하였다. 또한 김대건 신부가 북경을 통하여 프랑스 선교본부에 보낸 “조선왕국도”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1846년 발간되었는 데, 그 지도에서 김 신부는 울릉도를 Oulento로, 독도를 옛 이름인 Ousan으로 표기하여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남겼다.
17세기 해금 정책으로 인해 무인도로 된 울릉도·독도에 일본 어민들이 침입해 어업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의 연구를 바탕으로 에도막부(江戶幕府)가 다케시마(竹島)=울릉도 도해면허처럼 마쓰시마(松島)=독도 도해면허도 발행하고 마쓰시마 를 경영했기 때문에 일본은 마쓰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17세기에 확립했다고 주장했다. 이 처럼 17세기 일본인의 마쓰시마 어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본격적으로 검증한 논문은 거의 볼 수 없다. 본고는 이런 일본인의 마쓰시마 어업이나 도해면허를 분석 하고 독도 영유권 문제를 생각한다.
마쓰시마에서 어업이 시작된 것은 다케시마(竹島)=울릉도에서의 어업이 시작된 지 약 30년 후다. 이렇게 뒤늦게 마쓰시마 어업이 시작된 것은 많은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마쓰시마에는 80석짜리 정도의 작은 배로 갈 필요가 있었다. 다음에 마쓰시마에는 장작이나 식수가 거의 없으니 생활하기가 어려운데다가 강치에서 기름을 만드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시마에서의 강치 기름의 수확이 급감했기 때문에 어민들은 부득이 1650년대에 마쓰시마에서 강치 잡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강치 사냥은 악조건 때문에 “조금씩”밖에 못했다. 따라서 다케시마 도해가 없으면 마쓰시마 어업은 경제적으로 도 성립되지 않다.
가와카미 겐조는 어민들은 다케시마로 도해하는 도중에 먼저 마쓰시마에 들러서 어업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도해 기록을 분석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다케시마로 왕복하는 도중에서의 마쓰시마 어업은 없었다. 마쓰시마 어업은 다케시마를 기지로 삼아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마쓰시마는 “다케시마 근처의 작은 섬” 등 다케시마의 속도로 인식됐다.
종래 다케시마로의 도해는 200석짜리의 큰 배 2척으로 갔는데, 마쓰시마에서 어업을 하려면 배 2척 중 1척을 80석짜리 정도의 작은 배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져올 수 있는 어획물의 적재량이 감소한다. 이 때문에 당초 오야(大谷)는 마쓰시마에서의 어업을 제의한 무라카와(村川)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라카와만이 마쓰시마 어업을 시작한다 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무라카와는 오야·무라카와 양가를 돌보던 아베 시로고로(阿倍四郎五郎)를 움직여 오야를 설득했다. 드디어 오야도 수입의 감소를 각오해 마쓰시마에서의 어업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사정을 아베는 그때까지 전복을 헌상하고 있었던 로쥬(老中)에 알리고 양해를 얻었다. 이것이 “로쥬의 내의(內意)”인데,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는 이를 바탕으로 마쓰시마 도해면허가 발급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가 주장하듯이 “로쥬의 내의”는 결코 도해면허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민들 사이의 사업을 조정하는 것이며, 마쓰시마 도해면허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오야·무라카와 양가의 어업은 조선인도 울릉도에 출어하게 되자 전기를 맞았다. 다케시 마(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조·일 간에 울릉도쟁계(다케시마 일건)가 시작됐다. 논쟁이 평행선이 됐다는 쓰시마번의 보고를 받자 에도막부는 다케시마·마쓰시마의 조사를 시작했 다. 그 결과 다케시마는 조선 영토이며, 다케시마 근처에 있는 마쓰시마는 돗토리번에도 일본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다는 사실을 에도막부는 알게 됐다. 따라서 1696년에 에도 막부가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을 내렸을 때에 일본 땅이 아닌 마쓰시마도 도해가 금지됐던 것이다. 그 후는 약 200년 동안 마쓰시마에서의 일본인 어업은 기록에 없으며 마쓰시마에 상륙했다는 기록도 없다. 따라서 17세기에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주장 은 성립될 수 없다.
1945년 9월 2일 동경만의 미국전함 미조리함 상에서 “항복문서”에 일본의 서명이 있었다. 맥아더 장군 지휘하의 연합군최고사령부의 설립이후에 동 사령부는 일본어선에 대한 어로활동을 전면적으로 제한했다. 1945년 9월 27일까지 일본어선이 제한 영역에서 어로활동이 인가될 수 있게 연합군최고사령관은 인가된 어로구역을 발표했다. 이 인가된 어로구역의 경계선을 연합군최고사령관의 이름을 따라 맥아더 라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 맥아더 라인은 수차에 걸쳐 수정되게 되었다. 맥아더 라인의 수차례 걸친 수정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라인은 독도의 외측에 설정되었으며. 더구나 1946년 9월 22일의 “SCAPIN 제1033호”는 이 후 일본어선과 인원의 독도의 12해리 이내에 접근을 금지했다. 따라서 한편으로 맥아더 라인은 연합군최고사령관에 의한 한국의 독도영토주권의 승인을 의미함이 명백하고, 다른 한편으로 1951년의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의 해석에 있어서 통합의 원칙에 따라 일본이 “SCAPIN 제 1033호” 를 승인한 동 조약 제19조 (d)항은 조약의 문맥의 전체를 구성한다. 동 조약 제19조 (d)항과 “SCAPIN 제1033호”에 의거 독도의 영토주권은 한국에 귀속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당국에 대해 독도의 영토주권의 권원은 “SCAPIN 제1033호”가 아니라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에 있으며, 통합의 원칙에 의해 동 조약 제 19조 (d)항에 의거 “SCAPIN 제 1033호”에 있다는 것으로 정책 전환을 할 것을 제의한다.
최근 일본내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명박 정권 시기 높은 수치를 유지하던 한국에 대한 친근감 정도가 정권말기에 이르면서 갑자기 급락, 거의 전후 최저치라 할 수 있는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급격한 한일관계 악화의 배경에는 작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당시)의 독도방문이 있었고,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대한 일본 여론의 추이 및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 ≪산케이신문(産経新聞)≫을 분석대상으로 해 보도의 양적분석과 질적분석을 시도했다.
한일 양국 신문 중에서도 일본의 우익성향이 짙은 ≪산케이신문≫기사 수는 8일간 95건을 나타내고 있으며 ≪아사히신문≫이 61건의 기사를 싣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산케이신문≫이 한국 신문보다 가장 많은 기사를 게재하고 있으며 거의 매일 10건 이상의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이것은 MB의 독도방문 직후 일본 외교상의 유감표명과 주한 한일대사의 소환 등이 이어지고 8월 11일에는 런던 올림픽 한일 축구전에서 박종우 선수의 ‘독도는 우리 땅’ 세리모니 논란까지 연달아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8월 14일에는 다시 MB의 일왕 사과 발언 요구까지 더해지면서 일본 여론은 뜨겁게 달구어지며 일본 우익단체의 반한시위로까지 번지게 된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에 가세하여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도 배우 송일국 씨가 출연하는 드라마 방영을 연기하는 등 일반 대중들의 눈치를 살피는 형국으로 번지게 된다. 이처럼 정치보도가 단기간에 거대한 전파력을 가지고 일본의 일반 대중에게 확산되는 양상은 보기 드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보수우익성향이 강한 ≪산케이신문≫에서 한국 신문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기사를 싣고 여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현재 우경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일본의 사회현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MB의 독도방문’에 대한 일본 신문의 제목 성향에 대해 분석한 결과, ≪아사히신문≫과 ≪산케이신문≫ 모두 부정적인 성향의 제목 성향을 나타냈다. 가장 진보적 성향이 짙은 ≪아사히신문≫조차도 독도방문에 관해 ‘극히 유감’, ‘기습적’, ‘분별없는’, ‘전대미문의 폭거’, ‘대국답지 않은’, ‘분별없는’ 등의 공격적이고 비호의적인 보도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산케이신문≫은 더욱 강도를 높여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용어로 보도하고 있었다.
한국정부는 한·일간 독도영유권 논쟁에 대해 종지부를 찍었지만, 일본은 매년 방위백서를 발간하면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종래 한국정부는 ‘조용한 외교’를 기조로 하여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하면서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면서 독도의 배타적 영유권에 대한 특별한 가시적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광복절을 5일 앞둔 2012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독도에서 ‘독도는 우리땅’임을 천명하여 독도의 실효적 지배 강화를 위한 강한 의지를 보였고,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행위가 국익을 위해, 독도의 배타적 지배를 위해 절실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본고는 영남지방의 대표 신문인 ≪매일신문≫과 ≪영남일보≫를 대상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대한 기사의 보도 유형을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독도방문의 배경과 저의를 알아보고자 했다. 일왕사관 발언 등 쟁점별 보도 경향을 분석한 것은 언론의 취재와 기사 작성, 그리고 저널리즘의 사명감 등을 동시에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양 신문은 지방신문이라는 동질성이 있는 반면에 각기 고유성과 정체성이 있었다. 독도 관련 기사를 정치적 성격으로 배열하고 보도하는 경향과 기사의 수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또한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대해 환영일색의 보도를 유지하면서도 그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매일신문≫보다 ≪영남일보≫가 상대적으로 중립과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매일신문≫이 ≪영남일보≫에 비해 연합뉴스 기사가 적은 것은 기사의 재생산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일왕사과발언과 위안부 등 역사인식의 기사 보도에서도 일방적인 긍정과 중립적 입장의 상대적 차별성이 있었으며, 영남지역민들의 반응을 보도하는 면에서도 이러한 점은 드러났다. 양 신문은 지방신문으로서 가지는 공통된 입장과 신문사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대구경북지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언론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제2차 아베내각이 들어선지 1년이 되었다. 그간 한일관계는 독도와 과거사문제가 양국의 현안이 되면서 지난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로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또한 일본의 헌법 개정움직임과 집단적자위권행사를 위한 법적조치는 한일관계 뿐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에도 긴장관계를 고조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아베정부는 왜 주변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경화정책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두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 1990년 이래로 계속되는 경제 불황과 실업자증가로 인한 국내정치의 불안요인을 잠재우기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일본국내정치의 우경화정책을 통한 정권의 안정과 부상하는 중국에 대응하기위한 군비증강이다. 하지만 일본의 이러한 국내외적 요인이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그래서 이 논문은 아베내각의 우경화정책이 한일관계에 미치는 문제점 분석과 한미일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둔다.
최근 일본은 아베정권이 들어선 이후 우경화로 치달리고 있고, 반면에 우리 박근혜정부는 신뢰를 바탕을 한 외교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은 타케시마는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은 평화적인 수단을 이용해서 현안을 해결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정책기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협상을 계속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은 외교에서도 속내와 겉마음이 다른 것이 기본적인 태도이다. 죽도연구회는 시마네현이 만든 유사 관변단체이다. 죽도에 관한 연구는 일본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는 죽도연구회를 심각하게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사견으로는 독도는 한국 영토이고, 영토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도는 일본이 러시아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는 북방영토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본 연구는 2012년 9월 일본 정부가 댜오위다오 국유화 조치를 취한 때로부터 현재까지 중국의 반응과 대책을 검토한 것이다. 댜오위다오에 대한 중국의 기본적인 영토 해결 방안은 ‘쟁의유보 공동개발(搁置争议、共同开发)’이다. 이 ‘쟁의유보 공동개발’은 첫째, 주권은 중국에게 있다. 둘째, 영토분쟁에 대해 확실한 해결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주권의 귀속은 논의하지 않고 쟁의를 유보한다. 셋째, 일부 분쟁이 있는 영토에 대해 공동으로 자원개발을 한다는 것으로 잠깐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분쟁을 유보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2012년 4월 일본의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는 공개적으로 도쿄도가 댜오위다오를 매수할 것이라고 표명하고 일본정부가 댜오위다오의 국유화를 실현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은 원래의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반격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댜오위댜오 국유화에 당면한 중국의 반응은 적극적인 외교, 감찰관리 기구의 재편성, 해상순시 강화, 댜오위댜오 영유권 분쟁 연구를 강화하였다. 향후 중국은 댜오위다오 분쟁으로 인한 일본정부의 군사적, 비군사적 행동에 직면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할 것이다. 첫째, 전 세계 화교들에게 댜오위다오 지키기 운동을 펼치도록 지원하고, 대만 당국에 댜오위다오를 지키는 책임을 지도록 요구한다. 둘째, 중국정부는 직접적으로든 혹은 제3자를 통해서든 일본이 간절히 바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가입’ 문제에 있어서 효과적으로 압박을 가할 것이다. 셋째, 대일 경제무역을 적절히 축소할 것이다. 넷째, 러시아, 한국 등의 일본과의 도서 분쟁에 호응하여 일본에게 효율적인 압력을 가한다. 다섯째, 지속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일본 각계 우호인사들의 적극적인 역할 발휘를 지원한다는 것을 포함하여 중국은 일본의 댜오위댜오 국유화에 당면하여 일본이 댜오위댜오 분쟁의 존재를 인정하고 최대한 빨리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도록 외교 정치적 방법으로 댜오위댜오 분쟁을 해결하려고 압박과 반격을 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