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울릉도, 독도를 포함하는 동해 울릉분지 해저 화산그룹(가칭: 울릉도-독도 화산그룹)의 분화사를 복원 하고 미래 분화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해 진행중인 육상-해양 복합 다중스케일 화산연구의 개념과 지금까지의 결과를 소개하는데 목적을 둔다. 다중채널 탄성파반사자료 해석을 통해 유추되는 울릉도-독도 화산그룹의 주 활동 시기는 대략 5-2.5 Ma로, 동쪽 끝의 이사부평정해산에서 처음 시작되어 서쪽의 울릉도로 전파된 것으로 해석된다. 울릉도의 육상부 는 5단계에 걸쳐 생성되었으며 최종 단계에 접어들어 폭발성 분화를 통해 폭 약 3 km의 칼데라 지형과 그 내부에 화 산돔을 형성하였다. 울릉도의 마지막 분화 산물인 알봉 화산돔과 그 하부의 수증기마그마성 분화로부터 기원된 층단위 N-1 화산쇄설층은 기존 포놀라이트질 마그마방으로 유입된 보다 염기성의 새로운 마그마의 분화로부터 생성되었다. 층 단위 N-1과 알봉 분석이 갖는 조면안산암질 전암조성은 기존 포놀라이트질 마그마방 하부에 존재한 고철질 집적암이 새로 주입된 마그마를 오염시킨 결과로, 그 자체가 마그마의 조성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층단위 N-1과 알봉 화산돔에서 확인되는 새로운 마그마 주입의 증거들은 최근 밝혀진 울릉도의 높은 지온구배 및 분화주기와 더불어 울릉도가 여전히 작동중인 마그마 배관체계를 갖는 활화산임을 암시한다.
본 연구는 국내 최초로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 받았으며, 2025년 5월 울릉도 사동항구 공항완공예정으로 관광객이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울릉도·독도 방문객을 대상으로 한 자원가치평가 및 개발우선순위 평가를 통해 지질공원의 바람직한 개발 방향을 제안하는데 가장 큰 목적을 두었다.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2개의 만족도 지표 중 교통편리, 편의시설, 도로상태가 낮게 평가되었다. 다음으로 울릉도·독도를 이용한 이용자들의 전체적인 만족도에 미치는 요인을 알아보고자 다중회귀분석을 수행한 결과를 바탕으로 숙박시설, 관광자원의 체험, 교통 편의성 등 유의한 지표를 중심으로 한 울릉도·독도 개발계획 방향을 제안하였다. 숙박시설에는 현포1리 해안주변과 태하1리 산악주변으로 선정하였으며, 관광 및 체험에서는 현포리와 태하리의 해양체험지구, 천포리와 울릉읍을 잇고 있는 등산로는 산악레포츠 공간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국가지질공원 명소벨트, 지질트레킹벨트, 울릉옛길, 해안경관벨트를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도로는 죽암몽돌해안 주변의 도로확장과 도로정비, 구암터널, 남양~남통터널, 통구미터널확장, 통구미터널 주변 마을의 도로확장 등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본 연구는 기존의 공급자 위주 개발계획이 아닌 방문객들의 방문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바탕으로 개발계획을 위한 기초자료로서 활용가치가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향후 이용자뿐만이 아니라 실제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한 구체적인 개발계획의 마련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Parasitic wasps are a good source of natural enemies for pest control. Due to the presence of unique biodiversity in Ulleungdo and Dokdo Islands, we surveyed aphid parasitoids in these two islands. We collected aphids and their mummies then identified emerged wasps in both morphological and molecular ways. We found 6 species of aphid parasitoids belongs to Aphelinidae and Braconidae. Two species of the genus Aphelinus belongs to Aphelinidae were emerged from Aphis nasturtii and Macrosiphoniella formosatemisiae. Three species of the genus Aphidius belongs to Braconidae were emerged from Ahpis rumicis, M. formosatemisiae and Capitophorus elaeagni. One species of the genus Lysiphlebia belongs to Braconidae was emerged from Aphis gossypii, Molecular analysis provided genetic informations for species diagnosis of parasitoids. We also analyzed genetic and ecological informations of identified parasitoids to evaluate potential source of natural enemies.
조선 후기 들어와 울릉도․ 독도에 대해 수토정책이 취해져 그 관리가 강화되었 다. 이 수토정책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문헌자료에 의해 이루어졌고 고고학적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필자는 이 점에 착안하여 수토 관련 유적․ 유물을 찾기 시작 하였으며, 이 글에서는 그동안 찾아낸 울진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들을 소개․분석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고자료들이 울진지역에서 나타나는 연유를 울릉도의 행정 체계에서 찾아보았다.
특히 대풍헌에 남아 있는 수토 관련 7점의 현판과 「완문」․「수토절목」의 고문서는 울릉도․ 독도 수토 시 수토사들이 항구에서 바람을 기다렸다는 『조선왕조실록』 의 편린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또 삼척영장과 월송만호의 윤회수토 담당부대로서 그 유적지인 월송포진성이 울진에서 확인되어 그 실체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평해군수 심의완 영세불망비 또한 울릉도 연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이 꾸준히 울릉도․ 독도를 관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적 자료이면서 조선 정부가 평해군수에게 울릉도 첨사를 겸직하게 하는 『고종실록』의 행정체제 변화 기사를 입증하는 금석문으로써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조선이 울릉도․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정기적으로 섬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수군을 보냈던 문헌기록을 입증해주는 고고학적 자료들로 울릉도․ 독도 수토연구에 귀중 한 1차 사료들이라 하겠다.
본 연구에서는 강풍에 의한 연안 용승 및 섬효과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춘계 강한 저기압 통과 전후를 대상으로 위성자료, 해양환경 및 물리적인 수직 구조와 함께 식물플랑크톤의 군집구조를 파악하였다. 5월 3일 강한 저기압이 통과하면서 남풍계열의 바람이 우점하였고, 10일 정도의 시간차를 둔 5월 12일에는 동한난류가 이동한 경로주 변해역에서 높은 엽록소값이 관찰되었다. 식물플랑크톤 수평적 군집조성은 동한난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울진 연안과 울릉도 사이의 정점에서는 규조류가 극히 높은 밀도로 우점하였고, 상대적으로 외양인 울릉도와 독도 섬주변에서는 섬효과에 의하여 침편조류 H. akashiwo가 높은 개체수를 유지하였다. 엽록소의 수직적 분포는 울진에서 울릉도로 이어지는 정점에서 엽록소 아표층극대 (Sub-surface Chl-a Maximum)가 20 m 층에서 관찰되었고, 울릉도와 독도 섬주 변의 대부분 정점에서는 30~40 m 층까지 전 수층에 걸쳐 균일하게 높은 엽록소 형광값이 관찰되었다. 이는 섬효과에 의하여, 강한 수층혼합이 일어난 것을 의미하고, 그 결과 유광층 상부에 공급된 영양염류에 의하여 식물플랑톤이 대발생하였다. 결과적으로 춘계 한반도 남동해역 (울진-울릉도-독도) 에서는 남풍계열의 바람이 우점하면, 연안 용승이 발생할 수 있고, 이는 식물플랑크톤의 대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으로 관찰되었다. 아울러, 동해 연안해역에서 기인된 식물플 랑크톤은 동해 중앙 및 남서해역으로 공간이동하면서 울릉도-독도의 섬효과와 함께 동한난류의 사행, 소용돌이의 발달 등에 따라서 종조성이 다르게 나타날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지리학자들이 울릉도 및 독도 연구, 정착 및 영유권 연구에 주로 사용하는 세 가지 수단에 집중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리학에서 중요한 세 가지 전환점을 선정해 보았는데, 이 전환점들을 계기로 지리학이 설명적인 학문에서 분 석적인 학문으로 변모되었다. 지리학의 세 가지 전환점은 다음과 같다. 1) 지리학 에서의 탐사(exploration), 2) 지도제작과 크로노미터의 발전, 3) 21세기 영토 문제 에 있어 공간정보 기술의 중요성이다. 사람이 최초로 울릉도와 독도에 도착한 정확한 날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고학적 증거 및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6세기에는 한국 선조들이 울릉도에 살고 있었다. 한국 어민들이 독도에 자주 갔지만 정착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부터였다. 지리학적 연구는 울릉도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도 연구 대상으로 한다. 고대 유물을 보면 삼국시대 말과 통일신라 시대에 정기적인 무역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물이 나중에 발굴되게 되면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울릉도에 정착했었음을 드러낼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 간의 긴밀한 관계가 수세기 동안 이어졌음을 증명하는 수백 개의 지도와 해도가 증거 서류에 포함되었다. 두 섬간의 연관성과 동해에서의 인간 활동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 증거의 양은 방대하고 이는 영유권 차원에서 독도와 감정적 그리고 문화적 유대가 없는 사람에게 곤란하다.
동해안의 암반조간대 무척추동물상의 분포 특성을 연구하기 위하여 독도를 비롯한 울릉도, 경상북도의 경주, 포항, 영덕, 울진 그리고 강원도 등 총 19개 정점의 암반조간대무척추동물상을 조사하여 출현종의 유사도를 공통종의 출현비율 (%)과 Bray-Curtis similarity matrix를 이용한 집괴분석과 MDS를 이용하여 분석하였으며 SIMPER를 이용하여 독도와 그 외의 동해안 암반저서 무척추동물의 특징종을 선출하였다. 공통종의 출현비와 집괴분석결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울릉도를 제외하면, 경상북도의 영덕이 가장 높은 유사도를 보였으나, 전체적으로 독도 암반저서생태계는 다른 동해안 연안과 차이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필자는 삼척 관련 지리지와 고지도에 기록된 울릉도ㆍ우산도 관련 기록을 통해 삼척을 비롯한 삼척 주변 지역과 울릉도ㆍ독도와의 친연성과 그 관련 기록을 찾고 정리하여 분석한다면 일본의 주장에 더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울릉도ㆍ독도 지역이 진정 우리의 영토이고, 우리와 함께하는 터전임을 좀 더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삼척지역에서는 15세기 기록에 이미 울진현을 비롯한 삼척지역을 중심으로 울릉도ㆍ독도를 삼척 관할로 여겨 각종 地理誌의 古蹟條와 姓氏條ㆍ島嶼條ㆍ人物 條, 古地圖에 표기하고, 이를 언급하여 이 지역 주민들 삶의 터전이었음을 기록으로 남겼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와 같은 기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정책 변화와 관리 파견, 그리고 다양한 변동 사항을 그 이후에 만들어진 각종 지리지나 고지도에 반영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삼척지역에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하여 신라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를 복속한 이래 지금까지 큰 관심과 애착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신라 이래 울릉도와 독도가 삼척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Weather is an important variable to form the characteristic natural ecosystem of the region along with topography and soil. Since the ecosystem change is expected by the global warming, the preparation for the change has to be made to accumulate the investigative data for the relationship on local weather and ecosystem. As the study method, the measurement data and sea surface temperature data were analyzed and the atmospheric model was performed. As the result, the weather characteristics, changing patterns and the causes of the weather change in Ulreungdo and Dokdo regions could be analyzed. For the last 67 years since the weather measurement was started in Ulreungdo, annual temperature elevation rate was 0.013oC and 0.88oC was elevated for 68 years, and the temperature elevation rate during the winter season recorded the highest elevation rate of 0.024oC/year. The amount of rainfall in Ulreungdo has been significantly increased recently. The strength of a typhoon that had affects on the peninsula and the increase of rainfall was mainly attributable to the increase of sea surface temperature alleviation at the East Sea. Sea surface temperature near Ulreungdo and the weather of the Ulreungdo weather station has high correlation each other. The acute sea surface temperature elevation could be assumed to cause the temperature elevation in Ulreungdo. According to the weather model of MM5, the simulated effect of sea surface temperature elevation on the atmospheric temperature resulted the average 1.3oC temperature increase in Ulreungdo as the sea surface temperature was increased 2oC. Therefore, it was able to confirm that the major reason of temperature elevation at the Ulreungdo weather station was attributable to sea surface temperature elevation.
본 논문은 독도와 울릉도 그리고 일본 오키섬과의 관속식물상을 비교·분석하였다. 대양 섬인 독도의 독특한 생물학적 진화양상과 종분화 과정을 연구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축적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독도의 관속식물상은 29과 49속 54종 1아종 2변종 57분류 군으로 확인되며, 한국의 독도와 울릉도와 그리고 일본 오키섬에서 공통으로 자생하는식물이 9분류군(15.8%), 독도에서만 자생하는 식물 9분류군(15.8%), 독도와 울릉도에 서 자생하는 식물 37분류군(64.9%), 독도와 일본 오키섬에서 공통적으로 자생하는 식물 2분류군(3.5%)으로 조사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 보호종인 고유종, 식물구계학적 등급 식물, 귀화식물 등을 상호 비교·연구하였다. 독도와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식물 고유종은 3분류군, 식물구계학적 등급식물은 15분류군, 귀화식물은 8분류군이 확인되었으며, 독도 와 일본 오키섬에서 공통으로 자생하는 식물구계학적 등급식물은 5분류군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보고된 연구 결과, 독도의 식물상은 울릉도와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지만, 좀 더 확대된 지역(한국, 일본)의 식물상을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결과 는 독도식물의 기원을 밝히는 기초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의 인증과 그 역사적 유래, 그리고 국가지질공원의 보존 및 활용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2012년 울릉도·독도는 제주도와 함께 국내 처음으로 국가지질공원(國家地質公園.National Geopark)이 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울릉도⋅독도는 우수한 지형 및 지질유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의 울릉군 전 지역을 환경부가 국가 지질 공원으로 인증한 것은 그만큼 의미 있고 주요한 지역으로 재인식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울릉도·독도 의 지형 및 지질유산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전・이용하며, 아울러 어떻게 교육하고 관광자 원으로 활용할 것인가가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으로는 잘 이용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잘 보전도 해야 하는 과제를 울릉군은 떠안고 있다. 울릉도・독도가 관광자원으로 활용 될 경우, 천연의 지질 자원을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여 관광객을 유치하는 ‘지질 관광’ 즉 지오 투어리즘(Geotourism)에 대한 안목을 갖출 필요가 있다. 우선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의 보존・활용 방안을 논하는 경우 여타의 국가지질공원과 달리 특수한 법적인 ‘제한사항’이 있다는 점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독도는 「독도의 지속가능한 이용에 관한 법률」 외에도 다른 법률에 따라 소관기관이 추진하는 관리제도의 적용을 받는다. 그 외에도 독도는 「자연공원법」에 따라 지질공원으로 인증되어 학술조사 및 연구, 정보보급, 교육 및 홍보, 체험 등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독도에 대해서는 법률적으로 생태계 보전이라는 측면이 강화되어 있어, 기존의 체험활동을 통한 활용 이외의 새로운 활용방안을 도출해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의 보존・활용 방안에 대한 것이다: 첫째, 이미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에서는 탐방과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오고 있으나, 지역사회 주민들의 소득증대와 연계성이 부족하였다고 판단된다. 둘째,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의 인위적인 훼손을 막고, 자연재해 등에 대비하며, 풍부한 지형 및 지질유산을 지혜롭게 보전해야한다. 세째, 지오투어리즘의 흐름 속에서 보전과 활용이라는 두 측면을 원만히 조화해 가야 한다. 넷째, 지오투어리즘 정책의 입안자와 현지 주민들의 대화, 소통을 위한 프로그램 마련이 필요하다. 다섯째, 풍부한 지형 및 지질유산을 보전하며 지오투어리즘, 지오파크 건설을 성공적으로 지속해 가는 데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이 필요하다. 여섯째, 울릉도·독도의 환경보전은 국가지질공원 유지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대한민국의 영유권 수호라는 정치・외교・국제법적 측면과 맞물려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곱째, 국제적 수준의 생태관광자원화를 위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받기 위해 지속적인 추진 노력이 필요하다.
이 연구는 거문도·초도 사람들의 울릉도·독도 도항과 활동 관련 지역민들의 구술증언을 토대로 이들이 울릉도·독도로 건너간 이유와 도항 방법, 생업활동 등을 밝힘으로써, 결과적으로 독도를 실질적으로 이용·관리해왔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19세기 말 이전 울릉도·독도를 왕래하며 어렵이나 미역채취, 선박건조 활동을 해 온 거문도·초도 사람들은 이미 수백 년 동안 그 곳 울릉도·독도를 기반으로 생업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거문도·초도를 비롯한 전라도 남해 연안민들의 울릉도·독도 관련 도항과 생활상은 비록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거문도 뱃노래」와 같은 노동요나 구전자료로, 가옥이나 건축물 등 유형·무형의 생활자료로 전승되어 왔다. 이것은 이들이 수백 년 동안 울릉도·독도 어장을 경영해온 살아 있는 증거이며, 독도를 삶의 터전으로 이용해왔음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자료로 활용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19세기말 이전에 이미 동남해 연안민들, 특히 거문도·초도 사람들이 울릉도·독도 어장을 관리하며 수백 년간 영속적·실질적으로 경영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이러한 활동이 있었기에 1882년 울릉도개척령과 1900년 대한제국칙령 41호로 이어지는 조선정부의 울릉 도·독도에 대한 행정적 관리가 가능할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독도영 유권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선행연구의 성과를 통하여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강제 편입시키기 이전, 일본의 지도와 역사지리교육에서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지하지 않았다는 점이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시대적인 특성상, 위와 같은 관점의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시기에 따라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연속성 하에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법제적으로 일본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영토화했다고 해도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인식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울릉도와 독도 관련의 일본어 자료 속에 독도 인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상 자료는 2017년에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김남훈 독도 관련 기증자료 중,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역사지리부도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저술된 울릉도와 독도 관련 연구논문, 시마네 현 마쓰에 시 죽도연구소에서 필자가 직접 수집한 「죽도편입에 관하여」라는 문서군을 주목하고자 한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시바 가즈모리(芝葛盛) 의 『일본역사지도』(1922)에는 죽도(=독도)를 조선의 것으로 적어,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독도를 인지했음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地名의 巨人’으로 불린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의 『대일본지명사서』의 영향이 컸으며, 요시다 도고가 펴낸 『신편 일본독사지도』에 소개된 「한국병합 전후 일본영역도」 의 인식과도 일치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나아가 시바 가즈모리의 관점은 연구 동료인 후지타 아키라(藤田明)의 저술에도 반영되었다. 그런 점에서 시바 가즈모리의 『일본역사지도』 의 독도 관련 기술이 시바 가즈모리의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인식하는 사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의 저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이마무라 도모(今村鞆) 등의 연구에서는 울릉도를 竹島, 독도를 松島에 비정함으로써 자연히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간주하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히바타 셋코(樋畑雪湖)는 직접적으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이 라고 단정했다. 한편 일제강점기 울릉도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뚜렷이 보인다고 증언한 점, 독도가 竹島라는 이름으로 시마네 현에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인은 량코도로, 조선인은 獨島라고 했다는 점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정 지역의 소속과 명칭을 바꾸어도 일상생활 속에서 체감하는 공간 인식은 이전의 방식 과 습관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23년 발간된『島根縣誌』나 1945년 일본 마쓰에 재무부 국유지대장에 ‘獨島’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은,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의 독도의 존재감이 일본 측에도 인지되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정작 독도를 영토 편제한 시마네 현에서는 1926년에 행정구역 개정으로 오키 도사가 폐지되고 오키지청이 수립된 후 독도 관련 행정 조치도 취해야 했지만 1953년까지 방치한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점은 현재 일본 측에서는 은폐하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독도에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는 지표이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한국병합조약에 의해 ‘영원히’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고 인식되었기에, 일본 측은 굳이 독도를 따로 떼어 내어 일본의 영토로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도는 그 행정적인 소속 관계와 상관없이 지리적인 특성에 의해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펴낸 저술에도 표출되었으며, 일본 측 공식 자료에도 ‘獨島’라는 명칭이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이글은 조선시대 대일사행기록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 관련 기록을 살펴본 논문이다. 울릉도 독도 관련 기록은 1617년 회답겸쇄환사 종사관 이경직의『扶桑錄』과 1719년 통신사 필담창화집『桑韓星槎餘響』, 그리고 계미통신사행을 통해 저술된 성대중의『日本錄』과 원중거의『和國志』, 마지막으로 1882년 수신사행을 기록한 박영효의『使和記略』에서 확인된다. 비록 소략하지만, 울릉도 독도에 대한 대일사행의 인식과 대일사행이 오간 시대의 양국의 인식을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먼저 이경직의『부상록』에 보이는 기록은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의 이중적 행태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전후 공식적으로는 두 나라의 국교재개를 위해 가교역할을 하면서도, 선초부터 드러낸바 있는 울릉도를 점거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있는 대마도를 분명히 인식케하는 기록이다. 둘째로 필담창화집『상한성사여향』에 보이는 조선지도는 울릉도 우산도를 명칭과 함께 분명하게 표기해둔 기록이다. 이는 당시에도시대 막부와 긴밀히 관계 맺고 있는 이들이 간행한 책이라는 점에서 당시 일본의 영토인식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다음, 계미통신사 사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성대중과 원중 거의 기록에 나오는 울릉도ㆍ독도 기록은 안용복, 대마도 관련 내용과 얽혀 전한다. 사행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대마도의 농간을 고발하는 과정에서 과거 안용복의 울릉도 도해 사건이 다시 호명된 것인데, 곧 두 사람은 조선이 앞으로 일본과 대마도를 구별해서 봐야 하며 특히 대마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대마도가 울릉도를 점거하려는 야욕을 안용복이 꺾었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하였다. 마지막으로 박영효의『사화기략』에 전하는 기록은 에도막부의 울릉도 도해금지령이 메이지유신이후 해이해져 울릉도ㆍ독도로 도해하는 일본인이 빈번히 발생하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 이 시기는 메이지 정권이 울릉도ㆍ독도에 관해 에도막부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는 시기임을 반영하지만, 머지않아 독도 점거를 감행하는 메이지정권의 조치를 예견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오늘날 독도와 관련하여 한⋅일간의 갈등이 지속되는 시점에서 근원적 해법을 모색하는데 의미 있는 지혜를 제공하는 자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 연구는 제국주의 일본이 불법적으로 독도편입을 시도한 1905년 전후 일본 사료에 나타난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검토하고, 이를 통하여 일본의 왜곡된 독도영유 권 주장의 실태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1905년 일본의 불법적 독도편입 조치와 함께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본질은 그 출발점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침탈 야욕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즉 1904년 발발한 제국주의 국가인 러.일 양국 간의 전쟁 수행과정에서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편입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근 세.근대기 일본 고문서에 나타나는 혼란된 지리적 인식은 1905년을 전후한 시기에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미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을 앞서 수용한 일본은 근대적 측량법 덕택으로 경위도나 거리를 큰 오차 없이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위도 위치나 거리 측정은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보다 정확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지리적 인식의 정확도보다 울릉도·독도의 명칭을 어떻게 확정할지가 더 큰 관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일전쟁은 이러한 명칭혼란을 종식시키고 독도를 죽도(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것은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전략적 필요성에 의해 독도를 불법 편입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독도는 제국주의 일본의 영토팽창 정책 속에 ‘죽도(다케시마)’라는 원치 않는 이름으로 불법적으로 편입된 일제강점기의 첫 번째 희생물이 된 것이다.
이 연구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 관찬사료인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 『죽도고증』, 『태정관 지령』에 나타난 울릉도·독도 인식에 관한 연구이다. 19세기 후반 일본정부에서 발행한 이 사료들은 울릉도⋅독도가 역사적⋅지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17세기말 안용복사건에 의해 촉발된 울릉도쟁계(죽도일건)를 통해 확인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사료들이다. 먼저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13항 ‘죽도와 송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경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일본 외무성이 “울릉도(죽도)는 물론이고 독도(송도)에 관해서도 기록된 서류가 없다”고 인정함으로써, 울 릉도와 독도가 하나의 세트로 인식되었으며, 역사적·지리적으로도 조선의 영토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죽도고증』에서 기타자와 마사나리는 울릉도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독도에 대해서는 일본의 영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1860년대 이후로 당시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과 지리적 인식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지리적 인식이 매우 부족했 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정관 지령』에 대한 검토에서는 “죽도 외일도는 본방 과 관계없음”을 확언한 태정관지령과 첨부지도 ‘기죽도약도’를 통해 독도가 역사적·지리적 으로 한국의 고유한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죽도약도에서 표기된 조선동해-울릉도-독도-오키섬 간의 지리적 거리도 현재의 거리와 수치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으므로 ‘외일도 =송도(독도)’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결국 근대 일본의 대표적 관찬사료인 『조선 국 교제 시말 내탐서』, 『죽도고증』, 『태정관 지령』을 검토해 봐도 울릉도⋅독도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국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17세기 중반 이래 독도에 대해 실효적 지배를 해왔다는 일본의 ‘고유영토론’은 조작된, 허구적 주장이라는 사실이 한층 더 명백해 졌다.
본고의 목적은 울릉도쟁계의 결과 일본인이 더 이상 울릉도와 독도로의 도해를 금지당한 것에 대한 일본 측의 인식을 정리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다. 그를 위해서 (1) 17세기에 일본의 산인지방민들이 울릉도 근해에서 실행했던 어업활동의 성격과 그 주체였던 요나고의 오야 가문과 무라카와 가문의 성격을 정립하고, (2) ‘죽도 도해 면허’가 발급된 맥락을 17세기 초 일본의 정치적·사회적 배경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3) 1696년에 막부가 지시한 ‘죽도도해금지령’이후에 오야와 무라카와 가문이 울릉도와 독도 도해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통해 현재 일본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도해를 금지당한 당사자인 오야와 무라카와 가문도 울릉도에 대한 도해는 금지 당했지만 독도에 대한 도해는 금지당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기존 연구는 팔라다호 소속 장교의 인명, 팔라다호의 출발과 도착의 항해과정, 곤차로프의 출발 이유 등에 대해서 초보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이유는 선행 연구가 대체로 조선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팔라다호의 이동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탐사 과정을 주목하였다. 그 과정에서 독도와 울릉도의 발견 과정을 추적하였다.
러시아황제 니꼴라이 1세(НиколайⅠ)는 1852년 청국과 일본과의 개항을 추진하기 위해서 러시아 제독 뿌쨔찐(Е.В. Путятин)을 특사로 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1852년 10월 7일 끄론쉬따트(Кронштат)를 출항했고,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에 도착하였다.
제독 뿌쨔찐은 전함 팔라다호(Фрегат Паллада), 캄차카 함대 소속 코르벳함(군함) 올리부차호(корвет Олибуца), 스쿠너 범선 보스톡호(шкуны Восток), 수송선 공작 멘쉬꼬프호 (транспорт Князь Меньшиков)으로 함대를 구성하였다. 뿌쨔찐은 소령 꼬르사꼬프(Корсаков)를 추천하여 스쿠너 범선 보스톡호의 함장으로 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함장 소령 운꼽스키(Унковский)를 비롯하여 장교 22명과 승무원 439명으로 구성 되었다. 이 중에서 보스톡호에 승선할 장교 6명과 수병 37명도 포함되었다. 알렉산드르 넵스끼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아바꿈(Аввакум) 신부는 중국어통역을 맡았다.
뿌쨔찐은 1855년 1월 26일 일본정부와 시모다조약(Treaty of Shimoda, 下田条約)을 체결하였다. 팔라다호는 일본과의 외교 수립, 해군부의 탐사 지시에 따른 실행 등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팔라다호는 1854년 3월 발발한 크림전쟁의 여파로 서방 국가들과 관계가 단절되어, 미국에 있는 러시아 식민지를 방문하지 못했고, 오호츠크해 해안을 조사하지 못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일부터 4월 7일까지 거문도에 정박했고 1854년 4월 20일 조선 연안에 도착해서 5월 11일까지 동해안 조사를 시작하였다. 곤차로프는 거문도를 직접 답사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양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명명한 국가는 러시아였다. 팔라 다호 소속 올리부차호는 독도를 발견하면서 서도를 올리부차(Оливуца), 동도를 메넬라이 (Менелай)라고 명명하면서, 실측에 기초하여 최초로 정확하게 좌표에 기입하였다.
그 후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동해에서 울릉도를 경유하며 해상훈련을 실시하였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알렉셰예프는 동해에서 전략적인 거점으로 울릉도를 주목하였다. 이것은 러시아가 1896년 9월 두만강·압록강·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획득하여 한국에 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을 실행한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근세 일본의 사료에 나타난 울릉도 · 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중심으로 그들이 말하는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 우산도, 자산도)가 한국의 영유임을 재확인해보는 것이다. 일본이 17세기 고유영토설의 근거 사료로 삼고 있는 『죽도기사』의 곳곳에서 이미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의 역사지리서에 기술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때, 일본은 이미 17세기 이전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이 영유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죽도고』에서도 역시 오야와 무라카와 집안이 80년간 울릉도에서 불법적인 어로활동을 한 사실만을 가지고 자신들이 되찾아야 할 섬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지적할 수 있다. 왜구의 노략질로 고통 받던 울릉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섬을 비워둔 것을 사람이 살지 않는 폐도라고 하면서, 잠시 동안 그곳에서 어로활동 한 것을 핑계로 자신들이 되찾아야할 섬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의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 중 <포인트 3>의 ‘17세기 고유영토확립설’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록각서(元祿覺書)』에서 안용복 일행이 타고 온 배에 걸린 「조울양도감세장 신 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 臣 安同知騎)」라고 쓰여진 깃발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안용복이 울릉도 · 독도가 조선의 영유임을 일본 측에 선포하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울릉도와 우산도(자산도) 양도의 감세장을 칭하며 죽도(울릉도)의 조선영유를 당당히 확인하기 위해 도일한 것임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세 울릉도 · 독도 관련 일본사료에 나타난 지리적 인식의 특징을 보면, 조선에서 울릉도 · 독도까지 거리를 실제보다 훨씬 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원록각서』와 『죽도기사』에서 안용복의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죽도고』를 편찬한 오카지마는 오히려 조선에서 울릉도 · 독도까지의 거리가 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울릉도 · 독도가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공간적 거리보다 인식적 거리가 훨씬 가까웠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근세 일본의 사료에 대한 검토, 특히 ‘울릉도 · 독도의 지리적 인식’에 대한 검토는 일본 측의 ‘17세기 다케시마 고유영토설 주장’을 비판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