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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이의 대표적인 저술인 󰡔聖學輯要󰡕는 일각에서 帝王이 학문하는 교범으로 높이 평가되었으나 그가 초년에 出家했다는 혐의로 인해 정계의 관심 대상이 되지는 못하였다. 󰡔성학집요󰡕는 庚申換局에 이어 숙종 7년에 이이의 문묘 종사 가 실현된 것을 계기로 吳道一과 朴世采 등은 이이의 학문을 선양하며 󰡔성학집 요󰡕의 진강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였으나 서인 집권 당시라는 상황을 감안하면 정계 일반의 논의는 활발한 편은 아니었으며, 진강 또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이는 己巳換局으로 그에 비판적인 남인이 집권한 뒤 문묘에서 黜享되었으 나 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뒤 復享되었다. 당시 숙종은 유생들의 상소 나 대신들의 논의를 거치지 않고 특명으로 복향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처 분을 거듭 뒤집는 데 따르는 명분적 부담을 피하는 한편 公論이 당론에 따라 움 직이는 것을 인식하고 이에 대응한 국왕의 정책 주도권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이이의 학문적 성과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여 이이의 위상을 처음 종 향보다 한 차원 높임으로써 從祀의 당위를 확증하기 위하는 조치가 수반되었는 데, 그 산물이 바로 󰡔聖學輯要󰡕의 進講이었다. 기사환국 이후 󰡔성학집요󰡕의 가 치를 주장하며 이이의 복향을 청하다 옥사한 延最績이 갑술환국 후 복권된 것 은 󰡔성학집요󰡕에 주목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성학집요󰡕는 숙종 23년부터 27년까지 진강되었는데, 이 작업은 宣祖에 대 한 繼述로 평가되었으며, 숙종은 이이의 학설을 聖賢의 謨訓으로 평가하여 그 의 위상을 확증하였다. 한편 현전하는 󰡔성학집요󰡕 중 숙종 22년 9월에 進善 權 尙夏와 侍講院에 내린 內賜記가 적힌 것이 있다. 이것은 숙종 자신이 󰡔성학집 요󰡕 진강을 통해 경연관들과 군신의 관계를 확인하고 있다면, 시강원 관원들에 게 󰡔성학집요󰡕를 내려줌으로써 어린 세자에 대해 동일한 의미를 표상하고자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