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금성동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지석묘 5기, 백제시대 주거지 2기·수혈군 1개소, 통일신라시대의 주거지 1기·석렬유구 3기·수혈 2기, 조선시대 수혈 1기, 일제강점기 이후 우물 1기 등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성격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공주 금성동 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는 묘역이라고 특정지을 만한 매장주체부 주위 구획석들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점에서 기존의 묘역 지석묘와 차이를 보이며, 묘역을 표시한다기 보다는 매장주체부 주위와 개석 상부에까지 흡사 봉토분의 분(墳)과 같이 적석을 높게 쌓아 묘를 축조하는 점에서 가장 큰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이 기존의 청동기시대 제 묘제와 어떠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판단된다.
금번 조사에서 확인된 지석묘들은 단독으로 조성된 예도 있지만, 3기 이상의 묘가 서로 연접된 형태를 취한 예도 확인되어서 당시의 묘제 발달과 사회 구조의 변화를 추적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의 구조와 변화과정을 통해 당시 취락사회의 성장과 그 배경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전기의 이른 단계에 소규모 취락단위로 이주해온 집단은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치 않는 화전과 같은 농경방식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안정적으로 취락을 유지하고 자원예측성을 높이기 위해서 농경에 대한 의존도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취락의 규모가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산만지역의 전기 유적에서 확인되는 탄화미 등의 자료로 보아, 당시에 벼재배는일반적 현상으로 생각된다. 천안 백석동 취락의 규모와 구조로 볼 때 수전의 경영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보았다.
당시의 소규모 취락의 경우, 주변의 취락사회와의 관련 없이 단독으로 영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며,주변의 취락사회와의 상호관련성을 유지하기 위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을것이다. 또한 취락사회의 안정을 얻고 생태적·사회적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개별 취락조직의 확대를꾀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형성된 대형취락들은, 일정한 공간적 거리를 두고 분포하는데,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