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후, 이어진 혼란기에 6․25전쟁을 치루는 등 어려운 기간을 살아 왔다.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때였다. 그런 때 나는 생물학자를 꿈꾸었다. 다행히 서울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하여 생소한 생물학을 배웠다. 세포학, 유전학 혹은 생리학을 배우면서 더욱 더 생물학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새로 나온 항생제인 스트렙토마이신이 생쥐 백혈구 수 혹은 백혈구의 운동능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한 실험결과를 정리한 논문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56년이다. 그 때로는 매우 첨단적 과제였다. 그러나 실험실 연구는 더 이상지속하기 어려워, 종이와 연필로 가능한 생물학을 선택했다. 그것이 우리 한국인의 인구문제, 유전형질 그리고 출생성비연구였다. 차차 실험실 사정이 나아짐에 따라 실험실연구로 복귀하였다. 출생성비연구 과정에서 성분화 혹은 성결정기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64년 미국인구협회 의생물학부 연구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부설생식생물학연구소에서 2년간 보냈다. 이 연구소는 기관배양연구로 독보적인 Biggers 박사가 연구소장이고, Brinster 박사, Whittingham 박사 등이 배양 중인 생쥐배아의 신진대사에 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배양 중인 생쥐난소로부터 배란을 유도하는 실험으로 소일하였다. 배양중인 생쥐난소로부터 눈이 부실 정도의 관택을 내며 배란되어 나오는 난자를 보며 큰 감동을 느꼈다. 귀국할 때 록페재단으로 부터 약 1만5천 달러의 연구비를 얻었고, 이것으로 실험실에 기관배양시설을 꾸몄다. 시설 완비까지는 1 년여가 걸렸다. 그 사이 생쥐의 안전방을 이용한 난자의 성숙, 배아의 발생에 관한 연구로 시간을 보냈다. 생쥐 안전방이 배양액과 같은 성분이어서 배아발생연구에 매우 적절함을 알았다. 기관배양시설이 완비된 뒤 이를 이용하여 난자성숙 기작, 배아발생 및 분화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1971년부터 2년간 WHO의 연구비로 두 번째 유학을 떠났다. 처음 4개월은 죤스 홉킨스 대학에서, 다음 1년 2개월은 하버드 의과대학의 인간생식생물학연구소에서 그리고 나머지 6개월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생리학연구실에서 보냈다. 하버드에 있는 동안 cAMP가 배양중인 난자의 성숙을 가역적으로 억제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는 원거리 수송이 가능한 난자 혹은 배아의 미세관배양법을 창안하였고, 실제로 발생 중인 배아를 장거리 이송하는데 성공하였다. 나의 연구활동은 이 때가 고비가 된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옮긴 뒤 자연과학대학 학장을 맡고, 그 뒤 부총장, 끝내는 총장의 직책에 이른다. 대학의 행정직에 있는 동안 연구실은 그대로 유지되며, 대학원생들이 꾸준히 실험실을 지켰다. 그런 사이 실험결과도 다수 발표할 수 있었다. 교실의 연구 주제도 점차 호르몬과 연관된 분야로 옮겨졌다. 학장 재직동안 AID차관사업을 주관하며 기초과학연구 질을 향상시키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1982년에 유전공학학술협의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우리나라 유전공학 및 생명공학 육성에 공헌하였으며, 그 뒤 바이오산업협회 회장으로서 우리나라 바이오산업 발전에 힘썼다. 1993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제백신연구소 사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최초 유치단계 때 위원장으로, 유치 된 후에는 연구소 이사로, 혹은 소장특별고문의 직책으로 연구소 운영에 직접 관여했고, 그 뒤
한국후원회 이사장으로 그리고 최근 후원회 상임고문의 직책을 맡고 있다. 그 밖에 대통령과학기술 자문회 위원장으로, 과총회장으로, 그리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등으로 과학기술 발전에 헌신하였다. 돌이켜 보면 나의 반생은 발생생물학 분야의 연구에 바쳤고, 나머지 반생은 우리나라 과학 특히 생물학 분야 발전을 위하여 봉사한 기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