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母山城출토기와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즉 三國중, 百濟및 新羅기와이다. 기와의 종류는 수막새와 평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는 전체 城과 성벽 및 至近거리에 있는 堡壘성격으로 보는 유적 중, 制限的이고 選別的인 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부모산성의 築城시기나 補築시기, 마지막 存續시기를 모두 말해줄 수 있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父母山城의 주요부인 城壁과 門址, 내부시설 遺蹟과 동 유적에서 출토된 적지 않은 기와등의 유물을 통하여 성벽의 축성시기와 보축 시기, 마지막 존속 시기의 단면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는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백제의 기와 중, 수막새는 아직 발견할 수 없었지만, 백제 평기와의 대부분에 관찰되는 통쪽와통(模骨瓦桶) 흔적 기와, 銘文瓦(印章瓦; 前, 後, 北등)는 적지 않게 출토되었다. 특히 西門址에 접한 城壁內側에 접한 보축 층에서 출토된 평기와는 대부분의 이 통쪽와통에 의한 제작기법을 보여주었다. 백제기와는 제작 기법을 통하여 늦어도 6세기 중반경에는 이곳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신라기와는 수막새와 평기와가 함께 출토되었다. 수막새는 單一한 1종의 문양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그 존속이 짧거나, 성벽의 사용기간이 짧았을 가능성을 말해준다고 판단된다. 그 시기는 古新羅말경에서 신라가 통일한 極初期경을 下限으로 한다. 특히 수막새는 제작기법에서 分離式기법을 이용하였는데, 방법이 稚拙하고 숙달된 솜씨라고 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신라기와의 등장과 존속으로 보면, 부모산성은 신라가 통일이후, 확고한 基盤을 잡은 후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그 존재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았을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이곳 출토 신라기와가 통일이후, 아직 삼국시대의 기와 제작기법과 문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가 통일 이후 신라만이 갖는 기와 (예컨대 경제성과 제작기법에서의 변화 등)제작을 하기 전에 부모산성의 폐쇄와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