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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42

        41.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은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건국 초기부터 고려의 불교식 사회사상을 비판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었고, 고려의 기반이 되었던 불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단으로 지목되었으며, 불교 이단성의 비판은 건국초기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는 근거가 되었다. 16세기 성리학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학문이 유입되었고, 당시 명나라에서 성행하던 양명학도 매우 이른 시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그런데 이 양명학 역시 주자학의 선명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이단성이 지적되었는데, 주된 비판의 내용은 불교와의 유사성이었다. 명나라로 사행을 간 조선인은 명나라 학자와의 논쟁을 통해 양명학의 공부 방식이 참선의 방식과 유사함을 지적하였으며, 양명학은 선학(禪學)이라는 명제는 조선 학자들 사이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17세기 일본의 유학이 아직 맹아 상태일 때, 경전을 논하는 이들은 주로 승려 계층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에게 이들의 이단성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 후 일본의 유학이 성장하여 고학 등이 등장하였을 때 조선인은 양명학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경향을 이해하였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사행에서의 양명학 논쟁 경험이 일본 유학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1764년 일본에 번성하는 고문사학의 경향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서야 일본 유학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고 비판의 논점이 불교 유사성에서 경전 이해의 오류로 옮겨갈 수 있었다.
        42.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明末淸初의 사상과 日本儒學에 대하여’라는 문제 설정은 江戶사상사 연구의 문맥 안에서 11세기 이전 일본 사회의 ‘주자학적 사유의 존재’라는 丸山眞男의 주장에 대한 비판 · 수정의 흐름 속에 자리 매김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가 일본에서 수용된 명말청초의 사상을 무익하게 주자학과 떨어진 곳에서 파악하려는 것도 橋狂過正의 폐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근년 중국 근세 사상 연구에서는 양명학은 주자학적 문제의식을 계승 ·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는 주장이 점차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 동향으로부터 이 논문에서는 中江藤樹의 사상을 ‘주자학’적 전개의 가능성 안에서 재구성해 보려 하였다. 그려고 이에 있어 藤樹의 사상에 대해 종래처럼 일부러 세세하게 시가를 구분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가 구분은 藤樹사상의 ‘ 日新’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진 『藤樹先生年諸』의 기술에 의해 도출된 것으로, 오히려 이 논문에서는 초기에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藤樹學특질의 추출을 기도하 였다. 그 특질은 藤樹의 사상에 합리성 • 질서성에 대한 합리적 신비 事象에 대한 신념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래에 이 문제는 藤樹가 주자 학에서처럼 ‘理’의 자기관철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이해되어왔지만, 이 에서는 오히려 藤樹가 ‘理’블 인간의 可知• 不可知에 미치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관철시켜왔기 때문에 표면상에서 그와 같은 모순이 나타남을 논하였다. 이와 같이 불가지의 영역을 신비적 인것으로 보류하지 않은 태도는 주자의 ‘象 數易’에 대한 태도와 공통된다. 또한 이것은 서구 17세기의 과학자들과도 유사한 점이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藤樹의 사상을 ‘주자학’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藤樹사상의 해명에 기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사상사 전개의 재조명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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