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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晉陽河氏 滄洲家는 남명과 내암을 淵源으로 하는 가문으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가문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창주가는 인조반정 이후 내암 정인홍과의 인척관계로 인해 집권 세력이 견지했던 태도와 경상우도 지역 남명학파가 퇴계학파의 남인으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 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滄洲 河.이 주도하여 간 행한 ..남명집.. 판본에 대해 1651년 정인홍 관련 문자를 훼손한 사건이 일어났 고, 뒤이어 1665년 진주 유생 崔栢年의 ‘大北餘孼’ 誣告 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하여 창주가는 가문이 멸할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창주가는 당색을 老論으로 전환하게 된다. 河.은 창주의 손자로서 창주가가 老論으로 전향하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하명은 내암을 비롯한 大北 관련 문자 및 퇴계 비판의 흔적들을 제거하여 남명의 문집을 淨化하고 퇴계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겸재 하홍도 의 의도에 따라 그의 문인들에 의해 훼판되자, ..남명집.. 釐正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고 인조반정 이후의 경상우도 지역 남명학파의 동향은 하홍도의 입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하홍도를 중심으로 남명학 파의 주류가 퇴계학파의 남인 쪽으로 흡수되어 갔다. 최백년 무고 사건은 개인의 감정 문제로 인해 발생하였지만, 당시 창주가로서 는 河晉寶와 내암과의 인척 관계가 가문의 흥망을 가늠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 였다. 그래서 하명은 최백년의 무고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인홍 집안과 통혼 한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여 대북잔당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결 국 서인의 종사였던 송시열과 송준길 문하를 찾음으로써 창주가의 보존을 추구 하였고, 결국 당색을 노론 기호학파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명은 기호 노 론학파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世誼를 다졌고, 그의 행적은 후손들이 진주지역 노론세력의 구심점으로 자리하고 지속적으로 기호학파 명사들과 사우문인관계 를 맺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62.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滄洲 河憕(1563-1624)은 晉州 丹牧 사람으로 南冥 曺植의 문인 河魏寶의 다 섯째 아들로 태어나 삼촌인 河國寶의 아들로 입계한 인물이다. 하위보의 아우 河晉寶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역임했으며 역시 南冥 曺植의 문인이 다. 하위보의 아들 河恒도 曺植의 문인이었고, 그 아들 河仁尙은 광해군 때 南 冥 曺植을 문묘에 종사해 달라는 상소를 주도한 인물이다. 게다가 河晉寶의 딸 이 鄭仁弘의 아들과 혼인하였으니 집안 전체가 남명학파라 이를 만하다. 河憕이 태어나 활동한 시기는 曺植의 영향을 직접 받은 그의 문인들이 왕성하 게 활동하던 시기와 겹친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曺植 문인들의 뜻을 받들 어 曺植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정에서 받은 영향 을 제외하면 그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이는 來庵 鄭仁弘과 寒岡 鄭逑 및 崔 永慶·河沆·成汝信 등이며, 가깝게 지냈던 벗 李屹·吳長·鄭蘊·趙㻩 등과의 교제 를 통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입었을 것이다. 河憕은 1602년 이후 1611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덕천서원의 여 러 건물을 중건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또한 1614년부터 1623년까지 덕천서원 원장을 하는 동안 1617년에 曺植의 󰡔학기유편󰡕을 덕천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622년에는 󰡔남명집󰡕 임술본을 간행하였으며, 1615년에는 고령에서 曺植을 문묘에 종사해 주기를 요청하는 소회를 주도하는 등의 일들을 하였다. 이는 그 가 1600년대 초기부터 1624년까지 진주 지역 남명학파를 사실상 주도하였음 을 알게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정인 홍을 만났다거나 의논했다거나 그의 의견을 들었다는 등의 일은 그의 문집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정인홍이 인조반정 때 적신으로 처형당한 뒤 약 300년 동안 신원되지 못하였던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쌍계창수의 출현도 정인홍 문인의 후예들이 정인홍의 흔적을 부정하려는 의 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래서 결국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집안의 후예들이 모여서 세강계를 조직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쌍계창수」와 「신안어록」 등은 曺植에 대한 추숭 사업을 가장 충실히 해낸 河憕의 일생을 잘 드러내려 한 것임 에도, 河憕의 스승으로서 끝까지 같은 시대를 살면서 曺植을 추숭하려다 죽음 에까지 이른 정인홍을 철저히 숨기려 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할 것이 다. 이것이 남명학파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떳떳이 이를 드러내어 사실 을 바로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河憕은 내암 정인홍의 문인으로서 그를 대신하여 진주 지역에서 曺植을 추숭하는 일을 주도했으며, 이 가계의 노론화 도 기실 여기서 비롯하였던 것이다.
        63.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My aim in this paper is to argue that the concept of Kyum(謙) of Ha Hongdo(河弘度, a pen name: Gyunjae(謙齋). 1593 - 1666)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history of Neo-Confucianism in East Asia. To do this, first, I shall argue that Gyumjae, followed and sticked to, the concept of Gyungyi(敬義) of Chosik(曺稙, a pen name: Nammyung(南冥), 1501-1572), and he, on the basis of this concept, established his unique concept of Gyungyi. This new concept is well shown in his Gyumgoedo(謙卦圖, Diagrams of a Trigram) that is grounded in Chu(the Book of Changes): He had this Gyumgoedo completed at the age of 48, which he had sincerly followed the Chosik's concept, In so doing, I will also argue that Hongdo Ha regarded Gyumgoedo, among other Trigrams, as the most important virtue that Gunja ought to obey: It seems that the reason why he was not engaged in politics naming his pen mane, Gyumjae, is based on this sort of his value. Second, I will strongly argue that from the New-Confucian historical point of view, Hongdo Ha, like Chosik, must be considered as a typical Chu Hsi's student: In this respect, Gyumjae, throughout his life, did the same as his mentor, Chosik, did, such as not engaging in politics, living in retirement from actively liberal life, focusing on cultivation his internal virtues. On the basis of Kyumjae's philosophical thinking that holds that people should suppress their desires and pursue Kyum as quite and internal value, it is possible to say that we are in need of reinterpreting and reevaluation intellectuals of Chosun, who sought silent and internal value. Finally, I will conclude that Kyum that needs to be reevaluated and illuminated is unique in the history of modern thought in East Asia. Although our interest and discussion about Kyunjae's thinking that was covered as simple local study just started this movement to try to restore the intellectual history of Chosun is to provide invaluable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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