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3

        1.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중국 명청시대 동아시아의 해역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교류활동이 활발했다. 그 가운데 중국과 조선, 일본, 유구(琉球) 등 나라들의 공식적인 교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폭풍을 맞은 동아시아 표류민들도 볼 수 있었다. 현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정기적인 관주도의 교류들이 빈번하게 진행되었으며, 이 사신(史臣)들이 동아시아 바다를 통하여 자주 왕래한 덕분에 해양인식과 해상위기 대책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해상의 민간인들의 활동은 돌발적 사태로 표류하였으며, 특히 조선의 백성들이 갖는 해양관은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은 서로 인접해 있다. 이에 따라 공식적인 교류는 안전하면서 편리한 길을 이용하였으며, 민간인들 또한 해상교류를 하였다. 최부(崔溥)와 최두천(崔斗燦) 두 사람은 조선사대부로서 폭풍을 만나 중국 절강으로 들어 갔다. 비슷한 경로로 제주도를 출발하여 영파(寧波) 연안에 상륙한다. 이 논문에서는 그들의 해상활동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과 중국 명청 간의 특색 있는 해상활동이나 해양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현대 중국의 체제 전환에 대한 전망의 한 단서로서, 근대 일본에서 서구에서 말하는 liberty나 freedom를 번역한 ‘自由’라는 개념이 근대기 중국에 어 떻게 유입되어 현재까지 전개되어왔는가를 다루는데 목적이 있다. 다만, 그 전반적 인 내용을 한꺼번에 다 다루지 않고 근대기 번역어 ‘자유’ 개념의 성립과 그 중국 유입에 이르는 간략한 과정만을 우선 살피게 될 것이다. ‘자유’ 개념이 중국에 유 입되어 근대 지식인 사이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졌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 기서 다루지 않는다. 논문에서 논의된 내용은 첫째, 중국에서 ‘自由’ 개념 이해의 의의. 둘째, liberty, freedom, 동양 고전 속의 自由, 그리고 ‘自由’라는 飜譯語. 셋째, 중국 사상사적 맥락에서 본 ‘自由’ 및 自然개념. 넷째, 일본에서의 ‘自由’ 개념 번역 사정. 다섯 째, 번역어 ‘自由’의 중국 流入과 그 이후에 대한 전망이다.
        3.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My aim in this paper is to argue that the concept of Kyum(謙) of Ha Hongdo(河弘度, a pen name: Gyunjae(謙齋). 1593 - 1666)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history of Neo-Confucianism in East Asia. To do this, first, I shall argue that Gyumjae, followed and sticked to, the concept of Gyungyi(敬義) of Chosik(曺稙, a pen name: Nammyung(南冥), 1501-1572), and he, on the basis of this concept, established his unique concept of Gyungyi. This new concept is well shown in his Gyumgoedo(謙卦圖, Diagrams of a Trigram) that is grounded in Chu(the Book of Changes): He had this Gyumgoedo completed at the age of 48, which he had sincerly followed the Chosik's concept, In so doing, I will also argue that Hongdo Ha regarded Gyumgoedo, among other Trigrams, as the most important virtue that Gunja ought to obey: It seems that the reason why he was not engaged in politics naming his pen mane, Gyumjae, is based on this sort of his value. Second, I will strongly argue that from the New-Confucian historical point of view, Hongdo Ha, like Chosik, must be considered as a typical Chu Hsi's student: In this respect, Gyumjae, throughout his life, did the same as his mentor, Chosik, did, such as not engaging in politics, living in retirement from actively liberal life, focusing on cultivation his internal virtues. On the basis of Kyumjae's philosophical thinking that holds that people should suppress their desires and pursue Kyum as quite and internal value, it is possible to say that we are in need of reinterpreting and reevaluation intellectuals of Chosun, who sought silent and internal value. Finally, I will conclude that Kyum that needs to be reevaluated and illuminated is unique in the history of modern thought in East Asia. Although our interest and discussion about Kyunjae's thinking that was covered as simple local study just started this movement to try to restore the intellectual history of Chosun is to provide invaluabl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