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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 중·후기 介坪里의 역사 변천을 일두 정여창과 사회·경제적 변화 에 초점을 맞추어 구명한 것이다. 먼저 개평리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인 정 여창의 증조부 정지의, 조부 정복주, 아버지 정육을의 행력을 고증하여 가전 자 료의 오류나 윤색 부분을 구명하였다. 정여창의 행력은 조카 정희삼이 행장으 로 정리하였으나 1550년의 시점에서도 그에 대한 자세한 행적이 널리 알려지 지 않았음을 구명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1552년에 개암 강익이 주도한 사우 창 건은 의미가 크다. 그리고 1570년 5월에 이르러 정여창에 대한 국가의 포증은 대체로 마무리 되었다. 이와 함께 정수민이 수집하여 정구를 통해 찬집한 󰡔文獻 實紀󰡕는 사림세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정여창의 위상 정립과 제고의 근거였다는 점에서 개평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다. 다음으로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으로 시행되고, 山郡인 함양도 1662년(현종 3)에 그 대상이 되었다. 이로써 개평리의 상민들은 호세로서 대동세를 포목으로 납부하였다. 개평리의 사족과 상민들은 17세기 중 엽의 庚辛大飢饉과 전염병의 유행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악화, 1728년 정 희량 사건에 의한 정치적 혼란 등으로 불안정한 형편에 처하였다. 더구나 18세 기 중엽 이후 환곡의 폐단은 개평리를 비롯한 함양지역 상민들의 삶을 매우 열 악한 상태로 밀어 넣었다. 대체로 1790년대를 기점으로 극심한 환곡의 폐단에 서 벗어났으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나치게 높게 책정한 田稅木價로 인한 농 민의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개평리에 위치하였던 北倉, 場市, 介坪店 등 은 조선 후기 개평리의 사회·경제적 변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며, 육 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지역 내 거점의 증거이다. 이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사 설의 介坪店이 생겨나고 운영되었다. 개평 장시는 조선 후기 5·10일장으로 개 평리가 주변 마을과의 관계에서 사회·경제·문화의 구심점의 역할을 했으며, 개 평리 사족과 상민들의 다양한 삶의 조건들을 상징하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