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17세기 중반 소중화의식과 攘夷의 의지를 지니고서 6차 사행의 종사관으로 도일한 南龍翼이 일본을 바라본 시선을 「富士山歌」를 통해 살핀 것이다. 이 작품을 대상으로 한 이유는 이전의 부사산시에서 형상화된 거의 모든 심상들이 한 곳에 집약되어 있고, 그가 인식한 일본을 부사산이란 글감 속에 솔직하게 드러내어 문학적 투영 양상을 엿볼 수 있어서다. 그는 산의 위치, 외형, 정상의 눈, 魁踞를 큰 축으로 삼아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논지를 전개하였다. 산의 위치에서는 서북보다 낮은 동남의 지형을 보충하려고 上帝가 부사산을 일본에 있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부사산을 서북에 종속시킴으로써 일본을 조선의 조력자나 교화의 대상으로 되게 하는 효과를 낸다. 일본이 武를 숭상하는 데 착안하여 시루 모양에 선계적 면모를 띤 산의 외형에서 ‘雄壯’을 읽어내었다. 부사산에 호의적 시선을 보이던 그가 정상의 눈을 대상으로 하자, 부정적 인식을 숨기지 않았다. 한랭한 눈 때문에 수목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산의 부덕으로 인해 인재를 배출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더구나 따스한 햇살에도 녹지 않는 눈이 마치 교화를 거부하는 夷狄의 교만함으로 비추어졌다. 눈에 기인한 부정적 인식은 산의 魁踞함으로부터 교화에 아랑곳 않고 멋대로 천자라 일컬은 尉佗의 僭濫함을 느낀 데서 극에 달한다. 尉佗의 僭濫함은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채 독자의 연호를 쓰고 천황의 존재를 둔 일본의 정치제도를 문제시하여 쓴 표현일 것이다. 부사산의 외형에서 선계로 보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위치, 정상의 눈, 魁踞를 통해 부사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감추지 않았는데, 이를 통해 그가 일본의 문화 속에서 읽어낸 이적의 면모를 세밀하게 들춰내는 대신 부사산이라는 상징물 속에 문학적으로 형상해 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가 부사산에다 부정적인 인식을 투사한 이면에는 소중화의식에 근저한 양이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작품이 일본 문사에게 주려고 지은 것이 아니라 부사산을 본 후 일본을 바라보는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니만큼 일본 문사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기에 솔직할 수 있었다. 그가 부사산의 선계적 면모를 인정한 반면, 속으로는 부사산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진솔하게 드러낸 것은 교린과 조선의 자존이라는 두 개의 가치 중에 조선의 자존을 발현하는 쪽으로 의식이 기울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부사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이전에 한 일본의 행태에 의해 부사산을 부정적으로 도색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혈기 왕성한 28세의 젊은이가 지었기에 그 정도가 심하였기는 하나 이것 역시 17세기 중반 조선 문사들의 부사산 인식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