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宗元(773~819)은 唐代의 정치계・사상계・문학계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당송팔 대가 중의 한 분으로서 중국의 산문사(散文史)를 대표할만한 문장가이다. 왕숙문(王 叔文)이 이끄는 혁신집단에 참가하여 정치개혁을 추진하지만 실패하여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영주(永州)와 유주(柳州) 두 폄적지(貶謫地)에서 보내게 된다. 죄인의 신분 으로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없게 되자 “시대에 도움을 주고 만물에 영향을 주는 道 를 지금 펼칠 수 없다면 마땅히 후세에 남겨야 할 것이다. (輔時及物之道, 不可陳於 今, 則宜垂於後)”라는 신념으로 국가・사회・백성들을 위한 우언을 창작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柳宗元의 우언에서 보여주는 “보시급물(輔時及物)”과 “이안원원(利安元 元)”사상에 주안점을 두고 두 사상의 정의와 창작배경을 정리하고 또 이 두 사상이 내포된 우언 작품을 문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해 보았다.
중당(中唐) 시기를 대표하는 문학가 가운데 한 명인 유종원은 사상가 이자 개혁을 지향했던 정치가였다. 805년 영정혁신이 실패한 후 좌천 되어 뜻을 펴지 못하고 지방을 떠돌다 득의와 실의가 교차된 생을 마쳤 다. 그러나 그로 인해 후대의 높은 평가를 받는 문장가이자 사상가로 다시금 태어날 수 있었다. 당송팔대가의 일인(一人)이자 탄탄한 문학이 론을 갖췄던 그는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주도했고, 여러 문학형식을 활용 해 주옥같은 시와 산문을 남겼다.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불교를 믿었던 유종원은 천태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천태종 제12세로 기록될 만큼 천태사상 이해에 대단한 경지를 구축했다. 선사상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계율을 지키지 않는 몇몇 선사(禪師)들의 방종과 일탈, 선문(禪門)의 분파와 분쟁 등이 주된 원인이었다. “불교 수행에선 선이 가장 오묘하다.”고 그가 인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선종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선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치국(治國)의 도리로 유학을 가까이했고, 자신을 다스리고자 불교를 멀리하지 않았으며, 고문운동을 주도했고, 불교와 유교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창했던 유종원은 당나라를 대표하는 사대부 가운데 한 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