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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어계 조려가 살았던 1420년(세종 2년)부터 1489년(성종 20)까지의 기간은 조선이 유교이념에 따라 각종 정치,제도, 문물이 갖추어져 가던 시기였다. 동시 에 세조가 정권을 찬탈한 이후에는 막강해진 훈구세력에 맞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고 지방에서 유교 교육에 힘쓴 사림세력이 성장한 기간이었다. 함안 조씨의 조려 가문도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절의를 중시하고 유교 교육 에 힘썼던 조려에 의해 그 성장의 기틀이 형성되었다. 조려는 함안의 원북동에 터를 잡은 이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상경하여 유교경전과 문장을 익혔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에는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요순 시대의 이상적 인 정치를 희구하였으며,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많은 유교적 지식인들과 사 귀었다. 그러나 그는 세조에 의해 단종이 강제로 쫓겨나자 자신의 유교 정치에 대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에 내려와 끝내 출사하지 않았으 며, 어계처사(漁溪處士)를 자처하며 단종에 대한 절의를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함안 일대에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사림파 지식인들 과 교제하였으며, 향촌사회에서 유교적 예속의 보급과 가문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유교적 예속의 보급을 위해 주자가례에 규정된 상제례의 실천에 솔선수범하였고, 지방 교화를 위해서 향교에 나아갔으며, 지방 수령들에 게 어진 정사를 펼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자녀 교육에도 힘써 자신의 아들들이 매사에 뜻을 크게 갖고 조심 하여 호랑이처럼 이름을 떨칠 것을 기대하고, 자신의 종제(從弟) 조욱(趙昱)과 함께 훈도하였다. 이에 조려의 큰 아들 조동호와 그 소생에서 문과 합격자 3명 을 비롯한 여러 명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조동호가 안동의 이증과 같은 사림가문의 인물과 혼인한 것이 큰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아들 금호와 그 소생 역시 주로 무관으로 진출하였는데, 금호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훈척가문 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 조려의 절의와 훈도로 인해 더욱 번창하였으며, 왜 란 때에 다수의 인물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려의 후손들 은 조려의 절의를 추숭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조려의 5대손 조임도는 조려의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의 내용에서 조려의 절의를 표상할 수 있음을 알았으며, 조려의 절의를 표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려의 현손 조감의 사위인 성문준의 「어계선생전(漁溪先生傳)」과 성문준 의 생질인 윤선거의 『노릉지(魯陵志)』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에 다시 조려의 절의사실이 기록되어지 고, 사림 사이에서 널리 공론화되었다. 특히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사육신과 단 종이 복권된 것을 계기로 조려의 절의가 조야에서 재조명되고, 생육신으로 받 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