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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양의 문학계에서는 옛날부터 “시는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 통용되 었다. 작가의 사상, 감정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인격까지 그의 작품에 반영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진암 이병헌(1870-1940)은 유교 개혁론이나 공자교 운동으로 널 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600여 수가 넘는 시를 남긴 시인기이 도 하다. 그의 사상과 학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아직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병헌의 종합 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 작품에 대한 연구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 글은 그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그의 시집에 실린 작품의 연구를 통해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이를 위해 그의 시에 나타난 주제 의식의 분석을 통해 작품 전반적인 성격을 규명하였으며, 시의 풍격을 고찰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문예적 성취를 확인하였다. 주제 의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자신이 세상에 받아들 여지지 못하여 느끼는 불운한 감정인 身世之感, 둘째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시기를 살아가면서 견지한 우국 정신, 셋째는 유학자로서 유교 정신을 작품에 구현하는 것이다. 풍격에 드러난 문예미의 특질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암울한 시기를 살아가면서 느낀 幽鬱과 慷慨이고, 둘째는 철 저한 수양을 거친 유학자로서 가지고 있는 平淡과 典雅이다. 유울과 강개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후천적인 풍격이고, 평담과 전아는 서정시 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이는 선천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된다.
        2.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제의 침탈로 동북아 지역이 급변했던 시기 진암 이병헌(1871~1940)은 주변국의 형세를 살피면서 의기소침해있던 당시 시대분위기를 진작시키려고 하였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유학이 폐기되어 더 이상 설자리가 없게 되었고 조선의 상황도 매우 흡사하게 전개 되었다. 진암은 금문경학을 근거로 공교를 부활시켜, 이 땅을 유교의 중심지로 건설하려고 하였다. 본고에서는 공교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지 않았지만, 진암의 고토의식과 민족의식을 중심으로 그의 또 다른 세계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진암은 옛 영토에 대하여 조선 후기 학자들과 유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진암은 한반도의 기원을 중국 북방지역의 민족과 연관지어 웅비했던 고대사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의 논리는 해방이후 학자들에게 실증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진암이 고문헌 기록을 살펴 민족의 기원을 고증하려 했던 점은 독창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문헌 기록이 희박한 시대의 상황을 고문헌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은 민족이 암흑기에 처해 있던 당시 사람들을 진작시켰다는 관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진암은 조국이 長夜로 접어들자 임진왜란 때의 인물인 김덕령과 이순신, 곽재우를 떠올리며 그 당시 당색에 가려 인재가 등요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0년 상해를 방문해서는 그곳 청년들에게 친일 문제로 심문을 받았고 일본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이때 김구를 만났고, 나중에 이시영이나 김택영 같은 분들과 교류를 가지게 된다. 특히 김택영은 진암을 뜻이 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선비로 본 것은 이시기 진암의 모습을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眞庵 李炳憲은 조선말기의 개혁적 유학자다. 본래 俛宇 郭鍾錫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의 개혁을 통한 구국에 뜻을 두고 중국 강유위의 제자가 되어 今文經學을 공부하고 孔子敎운동을 전개했다. 西歐文物이 밀려들어오고 日本의 침략 마수를 뻗기 시작하던 19세기 후반기에 태어나 儒敎가 급속도로 망해가고 우리 傳統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며 성장하였다. 그래서 유교를 復原할 수 있는 방안으로 유교를 종교화 하여 孔敎라 이름하고, 孔子를 敎祖로 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교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今文經學을 공부하였다. 그는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교라고 확신하였는데, 그 유교는 우리 나라에 두루 퍼져 있는 宋學이 아니고 孔子의 가르침을 원래 모습인 孔敎였던 것이다. 유교가 개혁을 통해서만 민족을 이끌 수 있고 전통문화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孔敎運動은, 培山書堂에 文廟를 지어 孔子를 享祀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아 실제로는 크게 확산되지 못 했다. 시대변화에 무관심한 保守儒林들의 악랄한 반발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 했다. 그런데도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한 평생 孔敎運動에 헌신하였다. 비록 그의 孔敎運動은 성공을 거두지 못 했지만, 그는 韓國儒敎史上 가장 독특한 유학자요 사상가요 종교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저서를 남겨 그의 유학사상을 수록했는데, 이는 韓國思想史에 새로운 경지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康有爲의 大同思想을 바탕으로 華夷觀을 극복하고 四海同胞主義를 제창하였고, 變法自疆에 의한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민족의 自矜心을 고취하였다. 그는 孔敎運動을 통해 우리 민족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韓國學述史上 본격적인 今文經學者이다. 또 今文學에 바탕하여 儒敎經典을 재해석하여 『易經今文考』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는 韓國經學史上 독특한 업적이다. 朱子學 일변도의 한국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적 유림들의 극렬한 반발 아니라 해도, 급속하게 변하는 시대조류에 孔敎를 통한 儒敎의 復原과 民族의 自尊의 추구가 실효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튼 眞庵은 많은 儒學者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창적인 학자고, 금문학을 도입한 특이한 학자고, 서양의 학문도 선구적으로 상당히 이해하였으며 당시 중국 사정이나 학계의 동향을 가장 잘 아는 학자였다. 일본과도 무조건적인 투쟁이 아닌 설득을 통하여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