后山許愈(1833-1904)가 살았던 조선말기는 李震相․朴致馥․趙性家․金麟 燮․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등이 진주 인근에 포진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학문적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후산은 李滉․金誠一․李玄逸․李 象靖․柳致明의 학맥을 이은 李震相의 문인이므로 외견상 퇴계학맥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10대조는 南冥曺植(1501-1572)의 門人이고 9대조와 8 대조는 모두 남명 私淑人이어서, 후산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 을 이미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남명학파는 사라지고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학문이 강우 지역에 깊이 젖어든 이때, 후산이 남긴 神明舍圖銘或問이란 글을 중심으로, 남명학파의 후 예로서 그가 추구하였던 남명학 계승 정신과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후산이 1889년에 신명사도명혹문 이란 글을 지은 것은 남명 학문의 핵심을 闡 發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비록 이진상의 문인으로 서 퇴계학맥에 해당하면서도, 자신의 선조가 대대로 남명학파였기 때문에 자신이 당대의 남명학파 중진 학자들의 견해를 집대성하여 이 글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후산은 이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 려 노력하였고, 이를 수용하거나 수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간에 이를 오직 논리에 따라 해결하려 하였다. 특히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는 神明舍銘註說의 刪削문제이다. 둘째는 神明舍圖교정 문제이다. 셋째는 신명사명 ‘動微勇克' 아래에 있는 自註‘閑邪'의 해석 문제이다. 넷째는 신명사도 의 ‘國君死社稷'의 의미 해석 문제이다. 다섯째는 신명사도 하단 止圈좌우의 ‘必至․不遷'의 위치 문제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학자들 사이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견해가 있기도 하여 매우 번 다하고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후산은 발표한 지 1년이 지난 1890년 무렵 에 이를 거의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후산은 남명의 노장적 면모보다 는 성리학적 면모를 드러내려 하였고, 이는 자신이 퇴계학맥을 이은 학자이면서 남명학파이기도 하다는 데서 학문적 절충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 후산의 이러한 노력이 가져다 준 부수적 효과는 남인 학자들과 노론 학자들 사이에 남명 학파적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대 단성 지역에서 진행 되었던 남인과 노론 학자들 사이의 年例討論모임이 이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 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한말의 위기 상황에서 경상우도의 사림집단이 어떻게 그들의 사상을 定位를 확보해 나아갔는가를 후산 허유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后山을 포함한 寒洲學派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한주학파 는 한말의 위기상황에서 퇴계와 남명의 사상적인 융합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정신 을 이끌어 내고자 치열하게 고민한 지식인 집단이다. 후산은 그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이다. 그는 남명사상과 퇴계사상을 그의 고유한 심즉리설을 통하여 통합해 보 고자 하였다. 그의 신명사도혹문 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명의 신명사도를 주리론적 형식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아 세계에 대한 심의 主宰的권능을 확인하 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는 퇴계의 理發說을 더욱 밀고 나가 分殊속에서 작동하 는 기의 의미를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이미 상당 부분 양명학 적 요소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사회정치적 함의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