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계 마을은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가 급격히 쇠퇴하던 시기에 오히려 남명 사상을 심화, 발전시킨 마을이다. 안계의 남명학은 그 후로 진양 하씨 문중의 가학 형태로 전승되면서 근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홍도는 안계 마을 남명학의 시작이자 중심이었다. 남명 조식의 학문은 하항과 하수일을 거쳐 하홍도에 전수되었고, 하홍도는 소멸될 지경에 빠진 남명학파의 사상을 심도 있게 발전시켜 후학들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홍도가 남긴 『겸재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홍도를 기리는 만사와 제문에서 많은 후학들이 이러한 측면을 인정하는 내용을 볼 수 있고, 그가 직접 쓴 글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특히 그는 인조반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식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의 문집에서 간혹 은미하게 이러한 사상이 드러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겸재집』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까 한다. 안계 마을의 남명학을 주도했던 최초의 인물인 하홍도는, 자신의학문과 사상에 대한 이처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안계 마을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명학이라는 학문과 사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홍도의 역할에 크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본다.
진주의 해주정씨는 17세기 이후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 져 왔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晉州 의 海州鄭民는 農園 鄭文孚(1565-1624)의 후손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1568-1639)의 후손을 말한다. 농포의 두 아들 鄭大榮 (1586-1658)과 鄭大隆(1599-1661)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등 三叔姪이 어떻게 해서 진주에 정착하여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이 되었으며,남명학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진주 지역에서 이들이 가진 학문의 성향은 어떠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진주의 해주정씨는 농포의 아우와 두 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이 처음 진주로 온 것은 避兵이 그 주된 목적이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전대의 혼인관계로 인 해 상속받았던 田莊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도 또한 분명하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다시 서울 생활을 하려고 했었던 것 또한 확인되는 바였다. 그러나 농포가 李适의 난 이후 昌原府使시절에 지은 詠史詩로 인해 遊謀로 처형당하고,遺言 에 의해 그 아우와 아들들이 진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부분은 좀 더 생각하게 하 는 점이 없지 않다. 광해군 시대 창원부사 시절의 詠史詩로 인해 반정 이후 인조 시대에 역모로 처형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증빙하기 곤란하지만,이는 당시의 집권층이 농포가 광해군 시절 북인으로서 내암 정인흥과의 관 련이 적지 않았다고 보았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물론 농포로서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환멸을 느끼고 자손들에게 정치적 은둔을 유언한 것이 아닌가 판단되는 것이다. 해주정씨가 진주에 정착한 초기에는 南冥學派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던 謙齋 河弘度의 지우를 업어 남인으로 입지를 굳히는 듯하였으나,1665년을 전후하여 농포의 신원에 앞장섰던 澤堂 李植의 아들畏齋 李端夏에게 집지하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노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노론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것은 경종때 남인으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은 뒤 영조가 즉위한 이후 이에 대한 보복성 핍박을 남인에게 가함으로부터d였다. 이 일이 일어난 지 20여 년 후에 얼어난 宗川書院 禍變의 주동자가 이 가문에서 나옴으로써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남인과의 관계가 극히 악화되었고,근가 지역의 노론 학자들로부터 학업을 전수함으로써 이 지역의 남명학파에 대해서는 상대 척으로 관심이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진주의 해주정씨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인과의 관계도 대체로 나빴다고 할 수 있고,남명학파에 대한 관심의 정도 또한 보잘것없다고 할 수 있지 만,문집이나 유고 등을 남겼다는 이가 58 인이나 있다는 것은 학문에 대한 관심만큼은 여타 가문에 뒤지지 않으려 하였던 결과로 보인다. 남명학파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해주정씨가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지역의 학문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