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1

        1.
        200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에서는 한유 시와 불교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한유는 "불도를 배척한다"고 스스로 자임했지만, 그의 행위는 도리어 불교와 깊고 애매하게 유착되어, 자신의 "선언"과 "행동"이 서로 위배되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원도〉를 찬술하고 불골 맞는 일을 간언하는 등 결연히 불도를 반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승려와 밀접하게 왕래하고 시를 수창하며 정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모순적 태도는 후세에 비평을 받았다. 현존하는 한유의 시 사백여수 중 불교와 관련된 시는 겨우 약 20여 수 뿐이지만, 그 영향은 대단하다. 당나라 때 불교는 정치사상면에서 국가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을 뿐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사회를 침식시키는 큰 병폐였다. 당시에 형성된 방대한 무위도식계급 및 그들의 소비경비는 심히 통절한 것이었다. 그는 시에서 이런 불교의 해악을 지적하고 불교를 적극 반대했다. 한유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불교가 백성들의 생산생활에 막대한 파괴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시에다 불교의 허망과 거짓을 풍자하였으며, 혹세우민을 폭로하였다. 시승과 진지하게 교류한 시들은 후세사람들이 한유가 변심하여 불가에 귀의했다고 여겨 질책을 받았다. 한유와 승려의 교류는 경제적 능력 때문이거나, 시문의 재능이 출중한데 불교에 입문한 것이 통탄스러웠기 때문이거나, 심지어는 그들을 유가의 문하로 끌어들여 벼슬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무본스님을 환속시킨 것은 한유의 일대공로였다. 韓愈는 불교비판에 힘을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문학창작방법에서는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 이점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는 불교경전을 익숙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시에다 화용했고, 그가 시도한 "이문위시" 역시 직접 불경과 불경번역과정에서 얻은 것이며, 시 속의 몇몇 조구방법들도 역시 불경게송의 조구방법을 모방했다. 이로 본다면 한유는 비록 불교를 배척했다지만 그는 여전히 불교경전을 열람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온갖 전적을 박람했으니, 불경도 당연한 포함될 것이다.
        8,4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