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영조대의 하동 안계 마을의 학자 하대관의 가문계승의식과 향촌사회활동을 알아 본 것이다. 시기는 1748년부터 1758년까지 10년에 걸친 기간이다. 하대관의 글이 오로지 이 시기에 걸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활동이 1759년 가을부터 전개되는 종천서원 시비의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문집의 분석을 통해 볼 때, 하대관은 부친으로부터의 가학을 통해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업적을 알게 되어, 그의 학문은 선조들의 전통과 남명학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그의 학문은 향당에서 충절과 효행, 경의를 중시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는 영남남인 외에도 기호 남인과의 교류를 강화하여 자신의 가문과 진주 사족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겸재집』 간행, 족보편찬, 교육과 교화활동, 부당한 조세징수 반대, 『진양지』 간행 등은 모두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남명학파와 관련된 각 가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이번에 남명 조식의 문인인 文益成 및 그의 후손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합천에 거주하던 문익성은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의 아들 문 려도 마찬가지로 문과를 거쳐 중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할도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 두 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형제간의 우 애도 돈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그들의 가 문은 경상 우도에서 손색없는 사대부 가문으로 자리잡게 된다. 진주로 이거한 문할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이런 사족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면 서 진주에서 명망가문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그들은 선조의 가학을 잇는 입장 에서 남명학파의 맥을 이어갔고, 또 조선 후기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남인 입장 을 견지하였다. 다른 사대부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中華문화를 굳건하게 이어 간다는 입장에서 존주의식을 꾸준히 계승해 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그들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던 大明花의 보호・전승을 통해 이를 실천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