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로버트 매클레이 감리교선교사가 고종으로부터 의료와 교육 분야의 개신교 선교를 허락받은 이후, 감리교와 장로교의 본격적 인 한국선교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감리교에 비교해 볼 때 장로교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본 논문은 같은 시기에 선교를 시작했음 에도 장로교의 교회성장이 감리교에 비교해 더 많이 이루어진 이유에 관해 고찰하고 있다. 우선 지금까지 언급되던 ‘감리교는 학교와 병원 중심으로, 장로교는 교회중심으로’와 같은 선교방식의 차이와 네비우 스 선교정책 수용 여부의 차이와 같은 내용이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다루고 있다. 대신에 초기 한국선교를 주도했던 감리교의 아펜 젤러와 장로교 언더우드의 차이, 즉 언더우드의 세례에 관한 열정적인 입장과 그의 선교사 동원 활동을 통한 미국 남장로교와 캐나다장로교를 포함한 장로교 선교사의 증가가 결국 장로교회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올해 2015년은 헨리 게어할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한국선교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서 그의 활동은 당시 다른 선교사들과 비교해 볼 때(예를 들어 언더우드의 31년 사역, 1885-1916) 비록 17년(1885-1902)이라는 짧은 기간동안에 이루어졌지만, 아펜젤러는 한국감리교회의 주춧돌을 놓았을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의 발전과 한국 근대화를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이 글에서 필자는 아펜젤러의 삶과 사역을 주로 다루었는데, 그의생애는 두 개의 특성으로, 그리고 그의 사역은 총 일곱 개의 특성들로설명하였다. 우선 아펜젤러는 중생을 경험한 후 감리교인이 되었고,그의 아버지는 아펜젤러가 장로교 목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감리교선교사가 되었다.
한편, 아펜젤러는 초기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 중의 한사람으로서 선교 초기 미국과 한국 정부의 조언을 수용했던 착한 사람이었다.아펜젤러는 쌀(rice) 혹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사역했다. 물론 여전히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교회를 세운 초기 설립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교육의 발전을 위해 공헌했던교육가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을 포함 대부분의 외국인들을 이끌었던 유능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중요한 점은 아펜젤러가 계몽운동가와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의 근대화,민주화, 그리고 독립을 위해 기여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아펜젤러는 영적인 회심을 경험했던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당시 외국인들, 한국인들과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있었던 착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수용과 저항의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즉 그는 한국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만한 준비가 될 때까지 미국과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미국이 일본과 같은 강대국들의 한국 점령을 암묵적으로 허락하거나 고종이 근대민주국가로의 변화에 대해 거부했을 때는 미국과 한국정부에 당당히 저항하였다. 그러므로 아펜젤러의 한국선교 130주년을 기념할 때, 한국의 모든 개신교회들은 반드시 그의 열정적인 영성,따뜻한 사회성, 냉철한 분별력에 관해 반드시 재고해야만 한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을 비롯한 미국 기업가들이 주도하고 미군이 협조하여 일어난 하와이왕국의 전복은 서부지역을 넘어 아시아로 진출하던 미국의 서구식민화과정으로 규정될 수 있다. 1800년대에 설탕산업은 하와이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초기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 원주민, 빈곤한 유럽인, 그리고 남아메리카인들을 농장의 노동력으로 활용하였으나 그들은 열악한 노동조건 등의 이유로 농장에서 이탈하였다. 1800년대 후반에 농장주들은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중국인과 일본인을 끌어들였지만, 그들 역시 노동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심지어 파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95년에 이르러 자조적 일환으로 ‘하와이농장주협회’(HSPA)를 구성한 농장주들은 마침내 한국과 필리핀으로부터 노동력을 수입하여 중국인과 일본인의 부족을 채우거나 그들의 세력을 희석시키기를 희망하였다. 그들의 호소는 재한 미국공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과 미국감리교 선교사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조원시) 등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1902년에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하와이농장주협회 임원들과 만났던 알렌은 그 첫 작업을 주도하였다. 조선에서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 및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던 그는 조선 국왕 고종을 설득하여 유민원을 설치하고, 윌리엄 데쉴러(William Deshler)를 모집책으로 선정하여 하와이농장주협회의 부름에 응답하였던 것이다. 존스는 자신의 교구에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와이로 이주하여 노동하도록 설득하였고 그 결과 1902년 말에 출항한 첫 이민 선박의 절반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을 하와이로 송출하는데 기여하였다. 하와이농장주협회의 순종적 노동력에 대한 요구는 무엇보다도 미국감리교회의 하와이선교부를 이끌어갔던 초기 감리사들, 와드맨(John W. Wadman)과 헨리 프라이(Henry Fry)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응답되었다. 재정이 부족하였던 감리사들은 하와이농장주협회와 농장 주들에게 선교부를 위한 기부금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기부금에 대한 보답으로서, 한인 신자들로 하여금 농장에 협조하도록 격려하거나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농장을 이미 떠난 그들의 동료들이 돌아오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1905년에 와드맨을 돕기 위하여 하와이를 방문한 재한 감리교 선교사 아더 노블(W. Arthur Noble)은 한인 신자들이 하와이 농장의 지속적 번영을 담보하도록 ‘모범적 소수민족’(Model Minority) 담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결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감리교 선교부와 한인교회들은 번성하였던 반면에 한인 노동자 자신들은 선교부로부터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도움을 받지 못했고, 낮은 임금, 인종 및 국적별 업종의 차별, 잔인한 대우 등으로 인하여 빈곤과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미국이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립주의를 버리고 서부를 넘어 태평양과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소위 ‘백인의 짐’ (the White Man’s Burden)을 짊어지 기를 자처할 때에, 하와이선교부는 주한 미국 공사와 선교사들의 강하고 지속적인 도움과 더불어 하와이농장주협회의 요청에 적극 응답하였으며, 이것은 결국 서구식민주의에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