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편찬한 진산세고(晉山世 稿)를 보면 이 집안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들이 문과에 급제하고 문집이 편찬되 었음이 확인된다. 이를 보면 진주강씨 공목공파가 고려말 조선초의 대표적인 문벌임이 확실하다.
공목공파(恭穆公派) 선조 가운데 문장으로 가장 뛰어난 인물이 강희맹인데, 그가 1483년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나자, 성종이 곧바로 그의 문집을 편찬하라 고 명하였다. 『사숙재집(私淑齋集)』을 어명으로 편찬케 한 것만 보아도 조정에 서 그의 문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외교의 근간으로 하였으므로, 과거시험을 통해 사대교린에 필요한 문장가를 선발하였다. 강희맹의 활동과 문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많은 시를 지었고, 문화교류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중국 문인들이나 조선 문인들이 그의 조천시(朝天詩)에 많이 차운하여 문화교류의 전범을 보였다. 더군다나 대를 이어서 중국에 다녀오고 그 체험을 기록으로 많이 남긴 것은 다른 집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진주 강 씨 문중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의 문벌인 공목공파 문인들의 한시가 한 시의 고향인 중국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던 것이다.
진주강씨 문인들이 북경에 갈 때에는 선조의 조천록이나 연행록을 가지고 가서 참조했으며, 선조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선조가 길을 안내하며 함께 시를 주고받는 동반자가 된 셈이다. 강희맹은 형 강희안 덕분에 시를 짓기 전부 터 명나라 문인들에게 인정받았으며, 사행에도 성공하여 상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농사와 원예에 관심이 깊었으므로, 중국에서 연꽃 씨와 버드나무 가지를 들여와 조선에 퍼뜨렸다. 오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조천 활동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이다. 진주강씨 종친회에서 선조들의 조천록과 연행록 10여종을 모두 번역하여 진주강씨 연행록집성을 출판하면 학계의 연구에 도움이 될 뿐만 아 니라, 국제적으로 활동했던 진주강씨 선조들의 문장과 업적이 널리 선양될 것이다.
본 연구는 강희맹의 함양시절 시작활동이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 보는 데 있다. 현전하는 문집에 가운데 17권 4책으로 이루어진 甲辰字본 사숙 재집에 이 시기의 시가 실려 있다. 강희맹은 양부 강순덕의 상을 당해 벼슬에 서 물러난 51세 전후의 2, 3년간 함양에 머물렀다.
짧은 시기였으나 이곳에서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였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당시 함양군수로 부임해 있던 김종직과의 교유이다. 어릴 때 교분이 있었던 이들은, 강희맹이 함양에 있는 동안 자주 오가면서 친분 을 나누었다. 중앙 관계를 떠나있는 문인관료로서의 공감대 위에 창화시가 오 가고 시의 영역은 주변 생활을 읊는 것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들의 창화는 함양 시절을 관통해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둘째는 함양의 경물과 소소한 전원생활의 경험이 시적 영감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번잡한 서울을 떠나 직접 채소를 재배하고 약초를 캐면서 농사를 연구하던 강희맹은, 생활 속에 보 이는 가축과 식물을 시재의 하나로 활용하였고 그림으로도 그려냈다.
강희맹에게 있어 함양은 벼슬살이를 하면서 지냈던 경기지역의 전원과 다른 차원에서 온전히 농사 현장을 향유하면서 시를 창작하는 문학적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