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곡 성운이 쓴 「남명선생묘갈」을 중심으로 남명의 삶을 살핀 것 이다. 이 묘갈은 남명 관련 여타 비지문 중에서도 특히 ‘남명의 기상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칭송받았다.
대곡은 남명의 평생 知己였다. 때문에 묘갈에서도 언급하였듯,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남명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상 속 남 명의 모습이었다. 특히 학문하는 자로서의 일상적 모습과 스승으로서의 특징 적 면모를 묘갈에서 집중적으로 표현하였다. 왜 ‘일상 속의 모습’이었을까. 남명과 대곡은 당대의 대표적인 재야지식인이었다. 출사하지 않았기에 兼善天下의 공적은 없었지만, 獨善其身의 처세를 통해 후인에게 출사인 못잖 은 영향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철저한 자기 학문에 근원을 둔 재야지식인으 로서의 삶이었다. 두 사람이 보여준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이러한 삶은 ‘일상 의 모습’을 통해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두 사람이 가장 잘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외형적 처세에서 그 유형을 달리 하였다. 따라서 그동안의 연구가 두 사람을 같은 층위에 놓고서도 서로 상대적인 방향에서 접근하기도 하 였다. 남명은 보다 외향적인 측면에서, 대곡은 남명에 비해 내향적 측면에서 의 접근이었다.
그러나 후학들의 이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생전엔 평생의 지 기였고, 사후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한 벗으로 인식되었다. 그 기저엔 바로 대곡의 이 묘갈이 있었다. 남명에 대한 대곡의 그 허여지점, 곧 삶의 유형이 다소 달랐을 뿐 당대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확립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드러내려고 의도하지 않았 기에 알아주는 이가 드물었지만, 그들만은 서로를 허여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