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인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께랄라(Kerala)주와 동남부에 위치한 안드라프라데쉬(AndhraPradesh) 주에 분포하는 지석묘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및 분석결과이다. 인도와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외 부의 선진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이점과 함께 외세의 문화와 사회적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반도지역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면적, 기후, 생활양식 등은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인도 지석묘를 중심으로 지석묘의 분포, 입지, 형태, 구조 등에 대한 기초적인 고고자료를 확보하고 이를 검토·분석하여 그 특징을 파악하는데 목적이 있다. 또한 한국 지석묘와의 상이한 점을 살펴봄으로서 세계사적인 거석문화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한다. 인도의 지석묘는 주로 남부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입지적인 특징은 대부분 구릉 정상부와 완사면에 분포하며, 열상 및 소군집을 이룬다. 형식은 대부분 탁자식 지석묘 이며, 일부 개석식도 확인된다. 축조방식은 암반 위에 축조되기 때문에 암반에 홈을 내거나 석축형태의 장방형 묘역시설을 설치하여 벽석을 고정시킨다. 경우에 따라서 상석 아래까지 묘역을 높게 쌓아올 린 형태도 확인된다. 소군집은 하나의 묘역내에 3-6기 정도가 배치된다. 장축방향은 대부분 같지만 일부 다른 것도 있다. 남인도 탁자식지석묘의 특징은 석실의 평면형태를 ‘卍자형’으로 조립한 점, 한쪽 벽석에 원형의 ‘혼구멍(Port-hole)’을 설치한 점, 주변으로 대형의 판석을 기대어 놓거나 세워 묘역을 설치한 점 등이다. 이는 지석묘의 기본적인 기능인 무덤의 역할은 같지만 축조과정이나 장송의례, 지 석묘의 기능적 의미, 내세관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각 지역의 지석묘 형태나 구조, 출토유물, 분포 등을 비교한다면 대지석묘 분포권을 설정할 수 있으며, 또한 각 지역의 독특한 지석묘문화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의 지석묘문화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양 지역 간 거석문화의 비교연구는 매우 중요 하다고 할 것이다.
본고는 영조대의 하동 안계 마을의 학자 하대관의 가문계승의식과 향촌사회활동을 알아 본 것이다. 시기는 1748년부터 1758년까지 10년에 걸친 기간이다. 하대관의 글이 오로지 이 시기에 걸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활동이 1759년 가을부터 전개되는 종천서원 시비의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문집의 분석을 통해 볼 때, 하대관은 부친으로부터의 가학을 통해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업적을 알게 되어, 그의 학문은 선조들의 전통과 남명학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그의 학문은 향당에서 충절과 효행, 경의를 중시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는 영남남인 외에도 기호 남인과의 교류를 강화하여 자신의 가문과 진주 사족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겸재집』 간행, 족보편찬, 교육과 교화활동, 부당한 조세징수 반대, 『진양지』 간행 등은 모두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南冥 曹植은 退溪 李滉과 더불어 朝鮮時代 학계의 양대산맥이다. 그는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독서와 講學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실천위주의 선비였고, 이런 학풍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南冥의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義兵을 일으켜 나라 를 위해 싸워 나라를 구출해 내었다. 이런 공훈으로 인하여 宣祖의 신임을 받아 조정에 발탁되게 되었고, 光海朝에는 大北政權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너 무 자신들 위주로 정치를 해 나가고 반대당을 철저하게 배척한 관계로 1623년 仁祖反正을 맞게 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大北派는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 당 하였고, 南冥學派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仁祖反正 이후 새로 결성된 南人들은, 본래의 南人에다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몰락한 北人일부가 새로 편입한 것이다. 이들 남인은, 서울 경기지역에 기반을 두고서 西人들과 연합정권을 형성하여 官職에도 나갔으므로 嶺南南人을 포함 한 전체 南人을 주도하였고, 많은 학자 문인들이 나왔다. 이들을 특별히 近畿南 人學派라 일컫는다. 이들은 退溪學派의 한 갈래로서 寒岡 鄭逑의 제자인 眉叟 許穆을 통해서 近畿 地域에 退溪學脈을 전파시켰다. 이들은 줄곧 嶺南에 근거를 둔 南人들과 활발 하게 교류를 했다. 이 近畿南人學者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龍洲 趙絅, 眉叟 許穆, 星湖 李瀷, 順 菴 安鼎福, 樊巖 蔡濟恭, 性齋 許傳 등이 近畿南人學派의 學統을 이어왔다. 이들 은 退溪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實學과 접목시켜 독특한 학문을 형성하였다. 이들 近畿南人학자들은, 仁祖反正 이후, 西人들의 의도적인 집요한 南冥 貶下 의 상황에서, 南冥을 옹호하고 南冥의 位相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왔 다. 그들은 비록 南冥을 尊崇하는 정도가 退溪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南冥學 이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英祖朝의 星 湖 李瀷, 正祖朝의 樊巖 蔡濟恭과 朝鮮末期의 性齋 許傳 등은 南冥의 位相을 提 高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오늘날 南冥學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세 분의 학자가 노력한 것에 힘입은 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