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메이지시기 오카무라가 집필한 『新撰地誌』⋅『明治地誌』 등은 문부성의 검정을 받아 널리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소학교 지리교과서로 손꼽힌다. 그는 일본영토의 확장과정에 관심을 갖고 지리교과서에 일본영토의 경계와 범주를 정확히 서술하거나 그려놓았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오카무라가 지리교과서에서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분석하였다. 오카무라의 일본영토⋅오키 인식은 난마의 『小學地誌』를 저본으로 『小學地誌字引』을 집필하면서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문부성 발행의 『小學地誌에는 독도가 거론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난마가 『內地誌略』에서 竹島⋅松島를 소개하면서도, 오키의 관할범위를 북위 약 35도 50분여∼36도 30분으로 명기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울릉도⋅독도를 일본영 토로 간주하지 않은 난마의 인식은 오카무라에게 수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카무라는 『新撰地誌』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존재를 알면서도 두 섬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였다. 조선과 중국 등 주변국이 표시된 「日本總圖」에는 일본영토가 채색된 반면 울릉도와 독도로 여겨지는 두 섬은 채색되지 않은 채 해양 영역을 표시한 듯한 빗금이 조선 영역으로 그어져 있다. 일본의 강역을 표시한 「日本全圖」에는 두 섬이 그려지지 않고, 「山陰山陽及南海道之圖」에는 오키까지 표시되었으며, 「亞細亞」에 그어진 일본의 국경선 에는 오키가 포함된 반면 독도가 분명하게 제외되었다. 이러한 「亞細亞」의 일본 국경선 표시는 현재까지 알려진 ‘문부성검정제’를 받은 지리교과서들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것으 로 판단된다. 독도가 조선영토라는 오카무라의 인식은 『新撰地誌 이후에 집필된 『小學校用地誌』⋅ 『尋常科用日本地理』⋅『明治地誌』⋅『高等小學新地理』⋅『日本地理新問答』에도 견지되 었다. 이들 지리교과서의 일본⋅산인도 위치에는 일본 국경의 극단에 있는 섬들과 오키만 열거되었을 뿐 독도는 서술되지 않았다. 일본의 모든 영토가 표시된 「大日本全圖」⋅「府縣 明細圖」⋅「大日本帝國全圖」⋅「日本國全圖」등에는 독도가 빠졌고, 조선 등 주변국의 위치가 표시된 「日本諸島及隣國之地圖」⋅日本全形圖」등에도 일본영토가 채색된 반면 동해 안쪽의 두 섬은 채색되지 않거나 그려있지 않다. 「山陰道及山陽道地圖」등에는 오키까지만 그려져 있다. 『新撰地誌』⋅『明治地誌』 등은 공식적으로 검정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당시 대표적인 지리교과서로 손꼽힌다. 따라서 독도를 조선영토로 간주해 일본영토에서 제외한 오카무라의 지리교과서는 문부성을 비롯한 일본정부의 차원에서도 독도를 일본영토가 아니라 조선 영토로 인정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독도의 옛 이름 송도(松島)가 왜 울릉도의 옛 이름 죽도(竹島)로 부르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 논리에는 무주지 선점 법리가 이용되고 있다. 1876년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을 통해 제출된 ‘송도개척건의(松島開拓之 議)’의 송도(松島)는 ‘일본 땅’ 송도(松島)라는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이를 적용해 해군성은 울릉도를 송도(松島)로 명기하였다. 당시 해군성은 울릉도에 소속 불명확한 1도 2명의 이름을 붙여 조선의 범위에서 제외시키고 군함으로 민간인들을 실어 날랐다. 그리고 1881년 조선정부에 발각되자 일본 외무성은 1880년까지 명칭 혼란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이 침입했다고 변명하였다. 이러한 수법은 일본의 영토 침탈 수법으로 독도의 편입과정도 이와 동일하다. 1900년 러시아가 울릉도를 점거하자 일본은 일본어민이 어로 활동 중 ‘발견’했다고 유포하면서 관 주도하에 계획적으로 ‘발견’한 독도를 선점하였고 민간인을 동원한 영토 편입은 ‘영유 의사의 재확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료 조작과 왜곡을 일삼는 일본은 국제법상의 무주지 선점 법리로 자신들의 침탈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1875년 블라디보스토크 영사 세와키 히사토 「블리디보스토크 견문록」에는 이러한 일본의 영토 침략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