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동해 표기에 관한 학술 논의의 역사와 내용을 정리하여 평가하고, 새로운 지명 사용의 환경 변화에 비추어 향후 연구가 필요한 주제를 제안하는 목적을 갖는다. 지난 30년의 학술 논의가 가져온 가장 큰 성과는 동해 표기 분쟁을 국제사회에 인식시키고 분쟁의 해결이 필요함을 사회정의, 평화, 인권 등 인류 보편가치의 담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 해법으로서 두 이름을 함께 쓰는 방법의 가능성과 혜택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새로운 환경의 변화로서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분쟁지명 해결에 기여할 잠재력 증진, 문화적 가치 존중과 사회변화에 대한 요구, 영향력 있는 MZ세대의 등장, 지구적 환경에 대한 관심사 증가 등에 주목하였고, 각 변화의 단면을 고려하는 연구 주제가 제안되었다. 향후 연구의 지향점은 모든 세대가 수용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지명 사용의 요소로 정리된다.
1992년 8월 뉴욕에서 개최된 유엔지명표준화총회에서 한국과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일본해 지명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동해 표기의 정당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일본해는 19세기 서구에서 확립된 유일한 명칭이므로 일본해 이외에 다른 명칭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그동안 한일 간에 동해와 일본해를 둘러싼 논쟁과 분쟁은 지속되고 있다. 본 연구는 문제 해결의 일환으로 한일 대학생들의 동해/일본해 지명에 대한 인식을 조사 및 분석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대학생들은 일본해 지명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와 감정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표준 지명으로 한국의 대학생들은 동해를 선호하고, 일본의 대학생들은 동해/일본해를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이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한일 대학생들은 공통적으로 한일 정부의 논의에 가장 많이 응답했다.
이 논문은 19세기 말엽, 동해라는 바다 명칭이 일본해 또는 다른 명칭으로 분지되는 과정과 관련된 한ㆍ일 양국 간의 인식을 통해 식민주의적 권력과 지식체계가 어떻게 상호구성적으로 이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실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연구자는 외교문서ㆍ신문기사ㆍ고지도ㆍ어업협정문서ㆍ연설문 등에 나타나는 식민주의적 담론의 구성과 그 전략의 실천, 영토 및 해양경계에 관한 지역지식 및 가치체계의 전도양상, 명칭의 역사적 근원에 대한 해석방식 등에 대해 포괄적 접근을 하였다.
19세기 말엽은 한ㆍ일 양국에 있어서 해양공간과 관련된 영토성과 역사성이 변화하는 변곡점에 위치한다. 이 시기에 유럽의 식민지 세력이 아프리카에 확대되기도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도 서구의 문명개념이 식민정책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 사회가 식민지상품경제체계로 들어가면서 국가경계를 넘은 식민주의적 상업공간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서구의 문명개념은 식민주의적 영토성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경우, 서구의 진화론적 지식을 수용하면서 이에 기반을 둔 문명관념을 통해 기존의 아시아적 가치체계의 전도와 ‘군국’(軍國)의 새로운 영토적 범주의 창출, 영토화된 공간에 대한 개념화 등을 정립하였다. 이 시기 일본식 식민주의를 창출한 사상가들은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면서 기존의 동아시아 사상에 내재하던 ‘동문(同文)’,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개념을 일본중심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동해보다 과거 서구의 탐험가들이나 외교관들이 제작한 고지도 속에 기록된 일본해라는 바다 명칭을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과 주권선의 설정을 통한 영토성 구축, 후쿠자와 유기치의 문명과 반개(半開)라는 일본식 진화론적 사상의 정립, 참모본부ㆍ흑룡회ㆍ수산업자 등이 일본해 명칭을 사용한 사례들은 바다 이름이 문화 정치적ㆍ군사적 차원에서 상호영향을 주면서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19세기 한국인들의 바다 개념은 연해ㆍ내양ㆍ외양ㆍ원양 등의 범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국제해양법에서 정한 영해와 인접수역을 포괄하는 해역과 어느 정도 유사한 범위를 나타내주었다. 그리고 당시에 동해라는 바다 명칭은 동아시아인들이 하늘과 땅, 해, 달, 별자리, 산악, 바다, 강 등을 분류하고 위계질서를 정하며 그 방위를 주재하는 신을 위치시키는 공간인식방식에서 형성된 개념이었다. 동해란 동ㆍ서ㆍ남ㆍ북의 바다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는 각 바다마다 신이 있다고 믿어 양양에 동해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동해신묘를 두었다. 이 점은 동해에 대해 조선왕조의 왕권이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동해ㆍ조선해ㆍ한국해로, 일부 일본인들 중에는 일본 서해로, 중국의 왕지춘(王之春)은 고려해협 등으로 불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말엽 일본의 명치 정부에서는 동해 대신에 일본해로 표기하거나 불렀다. 영토확장을 지향하는 식민주의자들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과정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공칭화하고자 하였다. 19세기 말엽, 식민주의적 영토지식과 담론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바다공간을 군사적 지배영역으로 전환하면서 동해를 일본화된 해양공간으로 범주화하는 과정과 관련됨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해양공간에 대해 영토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명치 정부의 관료ㆍ군부ㆍ지식인ㆍ사상가ㆍ소기업가 등의 식민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한 영토적 장소만들기와 그 지배권의 제도적 실천 등이 원동력이 되었다.
19세기 말엽, 일본해가 동해 대신에 바다 이름으로 부각되는 과정에는 일본과 한국의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구조 속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 바다 분류체계의 해체, 일본의 식민주의 확대를 통한 동해 지배권 확대, 일본해 명칭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 등이 상호영향을 주었다. 특히 동해를 일본해로 명명함으로써 일본의 영토가 영해로 둘러싸여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문화 정치적 전략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