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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鄭逑(寒岡, 1543-1620)가 무흘정사를 건립하게 된 이유와 과정, 무흘정사에서의 저술활동, 무흘정사의 연혁 등을 두루 고찰한 것이다. 무흘정 사에는 정구의 유품뿐만 아니라 그가 수집·편찬한 수 천권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영남의 선비들은 이곳에서 책을 열람하고 강학활동을 하는 등 일련 의 ‘무흘 아카데미’를 형성하였다. 최근에는 무흘정사의 書目 일부가 고문서의 형태로 발견되기도 했다. 사정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학계나 지방자치단체에 서는 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한 것이 실정이다. 본고는 여기에 일정한 문 제를 제기하면서 무흘정사를 중심으로 한 무흘의 본격적인 생활문화 연구의 단 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기획된 것이다. 무흘동천에 대한 정구의 관심은 이른 시기부터 있어왔는데, 그가 만년에 무흘 행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避地意識에 기반한 독서양성이었다. 평소 친분이 두텁던 벗의 방문까지 정중히 사양하면서 독서를 통한 養性을 실천하고자 하였 던 것이다. 정구는 安東大都護府使 등의 관직을 맡기도 하지만 7-8년동안 이곳 에서 보내면서 다양한 분야의 저술활동을 전개한다. 성리학 분야의 󰡔염락갱장 록󰡕·󰡔수사언인록󰡕·󰡔곡산동암지󰡕, 역사전기 분야의 󰡔경현속록󰡕·󰡔와룡암지󰡕·󰡔치 란제요󰡕·󰡔고금인물지󰡕·󰡔유선속록󰡕, 지방지 분야의 󰡔복주지󰡕 등이 바로 그것이 다. 이 같은 저술활동을 통해 그는 공자의 仁思想에 근간을 둔 주자학의 연원과 그 조선적 계승을 道脈에 입각하여 명확히 하고자 했다. 무흘정사 건립에는 정구가 직접 공사감독을 할 만큼 많은 정성을 기울인다. 그 위치는 무흘구곡 가운데 와룡암과 만월담 사이에 있었으나 만월담에 더욱 밀착되어 있었다. 1604년 건립 당시에는 초가 3간으로 된 서운암을 중심으로 하여 2간의 산천암, 비설교와 자이헌 등 다양한 부속시설들이 있었다. 정구가 세상을 뜬 후 무흘정사는 위치를 달리하여 36간의 무흘정사와 3동의 장서각으 로 규모가 확대되기도 하였고, 여러 곡절을 거치면서 현재 1922년에 세운 4간 의 정사와 庖舍 약간 동이 남아 있다. 특히 1784년(갑진, 정조8)에는 후손이 중 심이 되어 무흘정사를 새로 짓고 무흘구곡 전체에 대한 정비작업을 하였다. 이 를 기념하기 위하여 「무흘구곡도」를 그리고 다양한 시를 짓기도 한다. 무흘정사는 정구가 활동할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탐방 하면서 무흘 문화를 만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정구 당대에는 사승관계 를 형성하는 제자들이 이곳을 주로 찾았고, 정구가 세상을 뜬 후에는 정구를 추 모하는 많은 선비들이 답사객이 되어 심방하였다. 무엇보다도 무흘에는 정구가 수집하고 저술한 이른바 鄭氏藏書가 장서각 서운암에 보관되어 있어 영남 선비 들의 독서와 강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