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아감벤의 『빌라도와 예수』는 탈진실 시대에 ‘사실’과 ‘진실’과 ‘진리’ 의 문제를 화두로 던지는 책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진리를 실체적으로 현현한 신비의 사건으로 유대인에 의한 예수의 고소 사실에 의해 촉발된다. 사실은 실체적 진실을 담보할 때 비로소 확률적 진실이 되거나 진리가 될 수 있다. 유대인이 예수를 고소한 이유는 그가 진리로서 하늘의 왕임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제국의 주권을 대표하는 빌라도는 두 번의 예수 재판을 통해 고소 사실의 실체적 진실 부재를 확인하지만, 예수의 무죄를 확증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과 나약함을 보여준다. 그는 진리 앞에서 ‘예외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주권자’이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는 예수를 유대인에게 넘겨 준 장본인으로서 예수의 십자가형에 책임이 있는 인물로 비난을 받는다. 아감벤은 빌라도의 관점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성찰한다. 그는 카이로스의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 종교의 대사건으로서 진리의 현현임을 인지하고 논증한다. 그러나 그는 『빌라도와 예수』에서 십자가의 진리에 관한 개인의 직접적 고백을 회피함으로써 빌라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본 연구는 정찬의 장편소설 『빌라도의 예수』에 나타난 기독교적 사유를 분석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정찬은 이 소설에서 예수와 빌라도를 비롯하여 유대 역사에 전승되는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켜 역사성에 바탕을 둔 허구적 서사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를 통해 예수의 신성에 대한 도전적 해석을 시도했다. 예를 들면 예수의 탄생과 부활에 관련된 주류 기독교의 전승에 의심을 시선을 던지거나 또 다른 해석을 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한편 정찬은 이 소설에서 고난과 악의 문제에 대한 고전적 신정론의 입장을 통해 ‘잃어버린 신성을 욕망하는 글쓰기’라는 주제의식을 지속하고 있다. 그는 다수의 소설에서 인간이 당하는 고난과 악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문제인식이 이 소설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음을 통해 기독교적 사유에 바탕을 둔 작가의식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정찬은 『빌라도의 예수』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에 의해 갇혀버린 신성을 재해석하고 있으며, 나아가 성전 이데올로기로 훼손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