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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현행하는 사십구일재는 대부분 오전 10시에 시작해 약 2시간 남짓 행하는데 시련(侍輦)을 시작으로 대령(對靈)과 관욕(灌浴) 그리고 상단 권공(上壇勸供)과 중단퇴공(中壇退供), 관음시식(觀音施食)과 봉송(奉 送)의 순으로 정례화된 지 오래다. 그러나 현재의 절차가 무엇에 근거 하여 정립되어 이르렀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확인할 수 없 다. 조선 시대로부터 전해진 수많은 재의식 관련 문헌이 있지만, “사십 구일재”ㆍ“사십구재(四十九齋)”란 명칭은 확인되지 않는다. 심지어 근대 활동하는 범패승들이 저본(底本)으로 삼고 있는 『석문의범』(釋門儀範) 에서 조차 사십구일재란 독립된 재의식은 발견되지 않는다. 본고는 불교의 사상과 신앙적 믿음에 기초해 유명(幽冥)을 달리한 망자(亡者)를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설행하는 보편적인 사십구일재의 절차와 구조가 현재처럼 전승하는 게 과연 올바른 것인지 를 자문(自問)하고 문제의식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둔다. 지난 30여 년 동안 불교계의 대표적인 어산(魚山) 스님들과 함께해 온 경험을 토대로 각 절차의 전개와 구성 그리고 내용 전반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개선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행하는 사십구일재는 근대에 이르러 스승의 구전을 바탕으로 재정립된 의식일 수도 있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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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임종과 동시에 칠칠재로 설행되는 사십구재의 성립과정과 재차의 전승양상에 대하여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본 글이다.『삼국 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등에 신라와 고려에서는 팔관회와 연등회를 열어 망자를 위령한 기록도 있고, 고려 태조 23년(940)과 광종 19년(968)에 무차대회를 열었고, 조선은 개국 후 고려 왕씨의 천도, 왕실의 안녕 등을 위해 수륙재를 설행한 많은 기록이 확인된다. 이는 칠칠재로 설행되던 수륙재가 전승되어 현재의 사십구재로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십구재의 성립과정에서 시대별로 간행된 의례문을 통해 재차의 전승과정도 살필 수 있다. 고려 말인 14세기에 간행된 『결수문』, 15세기 『진언권공』, 16세기 『권공제반문』, 17세기 『운수단과 『제반문』, 18세기 『제반문(청문)』, 19세기 『작법구감』, 20세기 『석문의범』을 중심으로 재차의 전승양상을 살펴보았다. 『권공제반문』의 간행은 수륙재 재차로 일관되던 것에서 현재의 사십구재 재차로 나타나는 변곡점이 되었다. 특히 중위는 수륙재의 중하단을 재정립한 시왕청으로, 하위시식은 전시식과 관음시식의 차서를 갖춘 시식문이 확인된다. 이를 바탕으로 『작법구감』과 『석문의범』은 상·중·하의 삼위가 독립된 재차로 나타난다. 상위의식은 삼보통청으로, 중위의식은 시왕청으로, 하위의식은 대령과 전시식으로 확인된다. 이는 『권공제반문』, 『작법구감』, 『석문의범』이 현재 영남지역의 사십구재 재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륙재로 비롯된 칠칠재가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 영남지역의 사십구재 재차로 전승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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