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우(金麟雨)의 생몰년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삼척(三陟) 사람이며, 조선 초기 안무사(安撫使)로 우산무릉등처(于山武陵等妻)에 세 차례나 다녀온 인물이다. 김인우는 고려말 삼척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남은(南誾)의 휘하에서 왜구 격퇴의 군공을 세웠던 삼척의 토착군인이었다고 보여지며, 이후 안인포만호, 판장기현사를 역임하였다. 왜구 격퇴와 수군 운영과 방어의 경험, 우산무릉과 가까운 삼척 사람이 라는 점이 김인우가 안무사로 발탁되어 우산무릉등처에 다녀오게 된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인우의 우산무릉등처 파견은 1416년(태종 16), 1417년(태종 17), 1425년(세종 7)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그의 역할과 관련하여 구분이 필요하다. 1차인 1416년의 파견은 직접적인 안무(按撫) 활동으로, 그 목적은 무릉도의 두목(頭目)을 깨우쳐서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릉등처 안무의 필요성이 김인우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제기되었으며, 그 안무를 실행한 최초의 실무책임자가 김인우였다. 김인우를 무릉등처안무사로 삼은 1차 파견은 조선의 구체적인 무릉도 안무를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였다. 1417년과 1425년에 이루어진 2 · 3차 파견의 목적은 ‘거민쇄출(居民刷出)’이었다. 김인우는 1차 파견에서 거주민 3명을 데리고 오고, 호구와 인구수를 조사하였는데, 이것이 ‘거민쇄출’의 배경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재차 김인우를 안무사로 삼아 다시 우산무릉등처에 들어가 그곳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하였다(2차 파견). 그런데 다시 무릉도에 남녀 28명이 도망하여 들어가자, 8년 뒤인 1425년에 김인우를 안무사로 삼아 그들을 다시 쇄환하게 하였다(3차 파견). 김인우는 안무사로 조선의 ‘거민쇄출’ 정책을 두 차례에 걸쳐 수행한 실무책임자였다. 김인우의 3차 파견은 ‘거민쇄출’을 목적으로 했지만, 이미 태종 때 주민들을 육지로 나오게 한 이후 세종 때에 다시 각종의 역을 피하기 위해 우산무릉도에 숨어 들어간 사람들을 찾아내서 잡아오는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김인우의 마지막 안무사로서의 활동, 즉 3차 파견의 복명 기록은 ‘수포(搜捕)’라는 용어를 쓰 로 있다. 따라서 김인우의 우산무릉등처의 안무사로의 활동은 ‘안무(按撫) → 거민 쇄출(居民刷出) → 수포(搜捕)’로 이어졌고, 이것은 조선 후기 ‘안용복 사건’ 이후 조 선의 우산무릉등처에 대한 수토(搜討) 정책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420년대 강원도 관아는 일본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고,그때까 지 왜구들과의 접촉은 평화적인 교역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인과의 교류방식 변화는 조선전기 강원도의 우산도와 울릉도 섬에 대한 정책으로 조선조정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경상도 의 제포,부산포,그리고 염포 3개의 항구에서 접촉이 주로 이루어진 교역은 수군영의 보호된 지역에서 일본과의 교역통로로 집중되었다. 조선조정은 경상도 삼포에서 성공적으로 일본인 교역을 허용하는 정책을 수행함에 따라 모든 강원도 지역을 일본인들의 출현을 금지하였다. 강원도 지역에는 일본인들이 문인을 가지고 도항할 곳이 없었다. 즉 조선조정은 일본 배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해안 수역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 강원도 해안에는 섬이 적은 관계로 일본인들이 강원도로 내왕하기 어려웠다. 조선시대 우산도와 울릉도 역사는 일본인 접촉과 교류로 연관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