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980년대와 90년대의 에릭 피슬 자화상에 나타나는 독특한 표현방식에 관심을 두고 시작되었다. ‘미술가의 초상’ 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 3점의 자화상들은 피슬이 자신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화상이 아니다. 시공간의 변화, 젠더의 도치, 광대분장 등을 시도한 다른 방식의 자화상으로서 이 자화상들은 피슬이 작품을 진행 할 당시 뉴욕 미술계의 구상미술에 대한 저평가에 대한 미술가로서의 반응이었다. 피슬이 활동하던 시기의 미술 비평 대부분은 미국 구상 회화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피슬의 자화상에 의도적인 변형과 암시들은 80년대의 구상 미술이 결코 미술의 흐름에 반하는 것이 아니며 추상미술보다 낮은 평가를 갖는 위치가 아님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의 구상 미술을 모더니스트 전통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새로운 문제는 피슬의 작업 방식과 사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화상 들로 피슬은 천재적인 미술가에 대한 기존의 모더니스트 비평 이론에 따른 고정관념을 깨면서, 모더니스트 이론이 아닌 1980년대의 시대와 그 시기에 등장한 구상 미술, 그리고 미술가의 양식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미술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피슬은 미술가로서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양한 주변의 요소들과 접목시켜 ‘미술가의 초상’에 스스로의 발전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미술가로서의 생애와 자신의 태도, 그리고 사유 등을 각각의 ‘미술가’라는 이름이 붙은 초상화를 통해 새로운 미술가의 이미지와 역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피슬은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 구상회화는 단순히 읽기 쉬운 그림이 아니라 미술가의 의도와 사회적인 분위기 및 이슈 등 많은 암시와 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미술가의 사회적 위치와 개인의 주관을 모두 제거한 이 작품을 통해 피슬 자신이 구상미술가임을 당당이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