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는 안니발레 카라치와 함께 바로크 양식을 탄생시킨 두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바로크 양식의 특징인 자연주의, 테네브리즘으로 불리는 강렬한 명암법, 극단 적 잔인함을 부각시킨 그림의 탄생, 새로운 권위를 갖게 된 카라바조 풍의 정물화와 풍속화 등은 모두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된 것들이다. 렘브 란트, 베르메르, 루벤스, 주르바란, 라투르 등을 비롯한 17세기 바로크 화가들은 카라바조의 이 같은 그림 특징에서 영향을 받은 거장들이며 카라바지스티라 불린 카라 바조의 그림 풍을 따른 화가들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미술사에서 하나의 현상이 탄생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이처럼 다양한 특징을 동시에 탄생시키고 그것을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잡게 만든 화가는 카라바조 외에는 거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본 논문에서는 카라바조의 이 같은 여러 특징을 탄생시키 주요 원인을 당시 종교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카라바조의 연구의 초기 문헌을 남긴 연구자는 17세기 당시 카라바조의 생애를 집필한 세명의 평론가의 공이 큰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를 남긴 피에트로 벨로 리(Pietro Bellori, 1613~1696)이다. 벨로리는 한편으로는 그의 저서 『근대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생애』에서 카라바조에 대한 연구의 틀을 마련하고 작가 삶의 중요한 행적과 거의 전 작품에 대한 짧지만 정확한 평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와는 반대되는 고전주의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함으로써 19세기 초까지 카라바조가 제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오류도 저질렀다. 카라바조의 가문과 탄생에 관한에 관한 것도 그 중 하나다. 벨로리는 위의 책에서 카라바조를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가 지방 귀족의 아들이었으며 이는 그의 화가로서의 삶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향에서 관계를 맺은 가문 사람들은 당대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콜론나 가문과 보로메오 가문으로서 이들은 카라바조를 후원하였고, 그가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가로 자리잡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살인 이후 여러 도시로 옮겨다니는 피신 과정과 새 도시에서 자리를 잡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그 도움은 죽기전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바조는 인생은 그의 출생지인 고향과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가문 사람들에서 시작되어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배경은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야기된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개혁운동이라고도 불리는 가톨릭개혁운동과 연관이 있다. 당시 가톨릭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이를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신자들을 교화해야할 필요성을 느낀 교회의 입장이 18년에 걸쳐 논의된 트렌트 공의회에서 공포가 되었는데 카라바조의 그림은 바로 이 공의회에서 발표된 조항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그림들이었다. 밀라노의 대주교 페데리코 보로메오의 후원을 받았던 카라바조는 이 인물이 집필한 『성화론』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장식 중심이 아닌 성서 중심의 그 리스도의 가난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개혁정신의 표현이었으며 이를 위해 당시 새롭게 중요성이 부각된 프란치스코 회의 카푸친회의 탄생과 그들의 행동양식을 그림에 반영 한 것들이기도 했다. 본 논문에서는 그 사례를 페데리코 보로메오 밀라노 대주교의 성 화론의 분석을 통해 소개하였다. 본 논문은 이를 통해 카라바조의 작품이 가지는 양식 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그것이 탄생이 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추적함으로써 카라바조 연구에 작은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찰스 쉴러(Charles Sheeler 1883-1965)의 주택실내회화(1926-34)에 나타난 미국적 모더니즘에 대한 연구이다. 쉴러는 1910년대부터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었던 미국의 오래된 건물을 소재로 한 주택실내회화 5점을 제작했다. 본 연구는 당시 쉴러가 현대화·산업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통해 새로운 미국 미술의 선구자로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주택의 실내를 화폭에 담고자 한 까닭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쉴러의 주택실내회화가 지니고 있는 표현적 특성과 독자적인 의미를 밝히고,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그의 예술관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쉴러는 주택실내회화를 통해 일루전과 추상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는 입체주의의 특성을 자신만의 고유한 회화적 정체성으로 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했다. 또한 쉴러는 사진 활동을 하며 습득한 다양한 기법과 구성 방식, 사실 묘사의 기능을 강 화하면서도 카메라 시각으로 보는 추상적 구도와 형태를 회화로 재구성하였다. 그는 주택실내회화를 그릴 때 회화의 비매개적이고 환영주의적인 측면과 추상성을 결합하기 위해서 사진 작업을 활용한 것이다. 사진은 재현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사진기의 각도와 렌즈의 조작에 의해 대상을 추상화할 수 있는 사진의 방법을 회화에 응용함으로써 새로운 효과를 창출해냈다. 쉴러의 주택실내회화에 나타난 일루전과 추상의 결합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가 지속해서 연구한 결과물이자 점차적으로 미국 모더니즘으로 고취시킨 것이다. 쉴러는 기계문명을 찬미하는 이미지와 다른 자신의 주택실내 이미지를 통해 또 다른 미국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승화시켰고 이것은 모더니즘 양식에 기초하여 추상적 가치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독자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논문은 레지날드 마쉬(Reginald Marsh, 1898~1954)의 벌레스크 작품을 중심으로 여성 이미지에 관한 연구이다. 마쉬는 14번가 화파(Fourteenth Street School)의 예술가들과 함께 일하는 남녀, 중산층 쇼핑객, 상인 등 하층민에게 관심을 가졌다. 마쉬는 거리의 실업자, 부랑자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했으나, 하층민들의 세련되지 않은 상점과 유흥 거리를 관찰하여 영화관, 유원지, 백화점, 나이트클럽, 벌레스크 극장들을 주제로 스케치 작업에 집중했다. 마쉬는 벌레스크의 여성들을 전통적인 예술작품에서 찬양의 대상인 미의 여신 이미지로 투영하거나 여성들을 기괴한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마쉬의 벌레스크 이미지에서 보이는 양가적 특성을 1920∼1930년대 사회·문화의 쟁점과 연결하여 살펴보았다. 마쉬가 벌레스크 댄서와 이상적 미의 대상인 비너스와 동일시한 시도는 문화적 평 준화를 추구한 방식이었다. 더불어, 회화 속 신체 표현, 윤곽선, 부드러운 형태, 전체의 화면 구성은 고전주의 형식적 관심을 작품에 실현한 것이다. 한편 마쉬의 벌레스크 이미지에서는 ‘그로테스크한 몸’은 두려움과 불쾌함을 유발할 수 있지만, 이상적이고 완결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고전적 몸(classical body)’과 대조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마쉬에게 하층민의 즐거움을 분출하는 벌레스크는 가장 상업적인 카니발이었다. 이러한 표현에서 마쉬가 그 여성들에게 가졌던 양가적인 감정을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마쉬가 당시 사회를 바라보는 긍정과 비판의 양가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 마쉬는 동시대 사회·문화에 대한 의식과 예술적 신념을 벌레스크 이미지에 적극적으로 표명했으며, 대중문화의 시각적 이미지를 순수 미술의 소재로 사용하여 예술의 지평을 넓히려 한 미술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1980년대와 90년대의 에릭 피슬 자화상에 나타나는 독특한 표현방식에 관심을 두고 시작되었다. ‘미술가의 초상’ 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 3점의 자화상들은 피슬이 자신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화상이 아니다. 시공간의 변화, 젠더의 도치, 광대분장 등을 시도한 다른 방식의 자화상으로서 이 자화상들은 피슬이 작품을 진행 할 당시 뉴욕 미술계의 구상미술에 대한 저평가에 대한 미술가로서의 반응이었다. 피슬이 활동하던 시기의 미술 비평 대부분은 미국 구상 회화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피슬의 자화상에 의도적인 변형과 암시들은 80년대의 구상 미술이 결코 미술의 흐름에 반하는 것이 아니며 추상미술보다 낮은 평가를 갖는 위치가 아님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의 구상 미술을 모더니스트 전통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새로운 문제는 피슬의 작업 방식과 사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화상 들로 피슬은 천재적인 미술가에 대한 기존의 모더니스트 비평 이론에 따른 고정관념을 깨면서, 모더니스트 이론이 아닌 1980년대의 시대와 그 시기에 등장한 구상 미술, 그리고 미술가의 양식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미술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피슬은 미술가로서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양한 주변의 요소들과 접목시켜 ‘미술가의 초상’에 스스로의 발전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미술가로서의 생애와 자신의 태도, 그리고 사유 등을 각각의 ‘미술가’라는 이름이 붙은 초상화를 통해 새로운 미술가의 이미지와 역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피슬은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 구상회화는 단순히 읽기 쉬운 그림이 아니라 미술가의 의도와 사회적인 분위기 및 이슈 등 많은 암시와 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미술가의 사회적 위치와 개인의 주관을 모두 제거한 이 작품을 통해 피슬 자신이 구상미술가임을 당당이 선언한다.
본 연구는 현장에서 실무를 경험하며 겪었던 어려움에서 출발되었다. 전시를 진행 하며 예술가들의 아티스트피 지급기준이 부재했으며 마련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예산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한 고민이었지만, 예술가들에게는 창작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필수적인 제도였고, 수년간 많은 주체들이 치열하게 고민 해오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대체로 예술가의 창작환경 조성을 위한 제도 추진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긴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예술가·기관·화랑 등 주체별로 다양한 찬․반 의견이 오가고 있다. 예술가의 창작활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문화예술 지원정책은 일반 노동과 다른 ‘공공재’로서의 예술 노동의 특수성과 이를 반영할 수 있는 예술가 권리에 관한 법제 에 기반해야 한다. 그중 중요한 제도 중 하나로 ‘미술창작 대가기준’은 기본적인 창작 활동에 대한 존중의 의미, 전시 참여에 대한 보상의 개념이 포함된다.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와 연구, 논의, 토론을 기반으로 발전되어온 ‘미술창작 대가기준’은 10여년간 작가를 포함한 기획자, 평론가까지 지급대상이 확대되면서 제도화 되어졌다. 예술가의 정체성, 사회적 지위와 예술 노동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기반으로 예술 가의 정당한 대가체계 형성을 위해 마련된 ‘미술창작 대가기준’에 대한 시기별 논의점과 구체적인 제도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 성과와 한계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현재 시점 에서 제도의 시행 사례를 통해 보완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