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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11집 (2020년 12월) 5

❚ 논 문 ❚

1.
202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9세기 전반 동안 일본의 우키요에에 독립된 풍경이란 주제가 등장하여 대표적 유형으로 정착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우키요에의 본격적 출발은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의 《후지산 36경》(1830-1832)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호쿠 사이가 고안한 우키요에의 특징들은 안도 히로시게로 계승되어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우키요에로 발전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에서 나타나는 서양화의 기법들은 물론, 일본화 특유의 특징들과 서양화 기법들을 조화시키는 특유의 수법들이 18세기 말부터 어떤 방식과 과정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이로써 네덜란드 상인과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과 나가사키 데지마의 상관을 통해 일본에 소개된 서적 속의 삽화들과 동판화를 통해 알게 된 서양화의 기법들을 모사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일본의 회화적 전통과 어우러지게 혼합시켜가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풍경 우키요에의 차이와 특징들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복합적인 시점과 독특한 구도,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자연 묘사로 19세기 후반 서구 미술가들에게 광범한 영향을 미쳤던 풍경 우키요에 양식이 일본화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고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비롯된 토착화의 결과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6,000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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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폴리-베르제르의 바 A Bar at the Folies-Bergère> (1882)에 나타나는 이원성들에 관한 연구이다. 마네가 죽기 일 년 전에 남긴 마지막 걸작인 <폴리-베르제르의 바>는 뒤틀린 원근법과 같은, 화면 구성 상의 문제에 있어 현재까지 수많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는 작품이다. 본 연구는 그 수수께끼들을 풀기 위한 열쇠로써, 마네가 살았던 시대에 시대의 복잡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프랑스의 1860-70년대는 왕정복고 시대의 잔재들과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 부르주아의 개념들의 혼재로 인해 정치적인 갈등과 분열이 고조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대적 자화상이 마네의 작품들, 특히 <폴리-베르제르의 바>에 내재된 모순 점들에 영향을 줬으리라는 기대 하에 시작되었다. 첫째로, 본 연구는 <폴리-베르제르의 바>에 나타나는 여급 쉬종(Suzon)의 포드에 주목하였다. 정확한 대칭적 구도로 인하여 영원성을 상징하는 쉬종의 포즈는 ‘이 마고 피에타티스(imago pietatis)’를 의미하는 마네의 다른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포즈와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쉬종은 전통성(traditionality)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거울 속 이미지로 나타나는 쉬종의 포즈는 거울 밖의 그녀의 포즈와 다르게 보인다. 거울 이미지의 그녀는 거울 밖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손님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 포즈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녀의 이미지는 일시적이고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일시적인 것, 흔들리는 모습은 또한 근대성 (modernity)의 특징이기도 하다. 둘째로, 본 연구는 쉬종이 그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이미지의 두 축인 처녀와 매춘부를 모두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거울 밖에서 꽃과 과일 그리고 술과 함께 있는 쉬종은 앵그르(Ingres)의 <성체와 함께 있는 마리아 Virgin with the Host>(1854)와 동일한 구성을 가지며, 그녀의 포즈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Marcantonio Raimondi)의 판화들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성모마리아의 포즈를 재현한다. 그와 반대로, 거울 속의 쉬종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쓴 남성 앞에서 구부정하게 서있으며, 이는 그 시대에 만연했던 매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쉬종은 처녀와 매춘부라는 양극을 모두 상징한다. 이와 같이, 이원적인 전통성과 근대성, 그리고 처녀와 매춘부가 하나의 작품 안에 공존함으로써,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는 하나의 해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미스테리한 작품이 되었다.
5,200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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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미드타운 5번가의 록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는 존 D. 록펠러 2세(John D. Rockefeller Jr, 1874-1960)의 사유 재산으로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이루어진 대규모 재개발 도시 프로젝트이다. 총 13채의 건축물과 도로와 광장, 정원, 예술작품으로 이루어진 록펠러 센터는 뉴욕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은 ‘도시 안의 작은 도시’이다. 이러한 록펠러 센터는 도시 계획과 공공 미술의 표본으로 20세기 의미 있는 건축적 업적을 인정받아, 1988년에 미국 역사 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선정되었다. 특히 록펠러 센터 프로젝트에 ‘새로운 라디오 매체’는 강력한 상징이 되어 1930년대 초반까지 ‘라디오 시티(Radio City)’로 불린다. 록펠러 센터의 중심 마천루에는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마천루 와 라디오 시티 뮤직 홀(Radio City Music Hall)이 있다. RCA 마천루는 70층의 폭이 좁은 슬라브(slab) 양식으로, 당시 뉴욕의 종합지역제(Zoning Law)로 인한 ‘웨딩 케이크’와는 다른 독창적인 아르데코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마천루는 폭이 좁고 긴 장방형으로 건물의 양 사이드의 셋백(setbacks)으로 인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무게감을 더는 듯하다. 로어 프라자인 선큰 광장에서 바라 본 RCA 빌딩은 더 높아 보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RCA 빌딩 북쪽의 라디오 시티 뮤직 홀은 6300석 규모의 극장이다. 록시가 디자인 한 무대 디자인은 자연의 숭고함을 담은 ‘석양’을 표현한 아 르데코 양식이며, 실내디자인은 아르데코 가구 디자이너 도날드 데스키(Donald Deskey, 1894-1989)가 창조하였다. 센터에는 100여 점의 작품들이 있지만, 예술 프로그램(Art Program)에서 지향 한 ‘새로운 영역들(New frontiers)’과 ‘문명의 행진(The March of Civilization)’ 이라는 주제는 라디오를 표현한 작품에서 독자성이 두드러진다. RCA 빌딩은 라디오 가 매체가 인류에게 선사하는 긍정적인 메시지인 지성과 지혜의 힘을 ‘인류 문명의 진보’와 연결하여 건축적 조각이나 모자이크로 표현하였다. <지혜>, <뉴스>는 대표적인 아르 데코 작품으로 유리, 스테인레스 스틸 등 다양한 재료와 금박이 사용되었다. 록펠러 센터는 라디오의 도움으로 건전하고 인간다운 미래도시를 향한 꿈이 구체화 되었다. 이곳은 문화와 예술, 상업이 하나의 복합체(complex)로서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이자 변화하는 사회의 부산물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더불어 아르데 코 양식의 건축물과 작품들은 센터의 독자적인 특징이다.
6,700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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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문화정치의 시대였다. 군사정부는 문화정책을 통해, 민간에서는 문화운동을 통해 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치열하게 대립했다. 문화는 정신을 지배하는 근간이 된다. 제5공화국 군사정부와 민중문화운동 모두 전통민족문화를 통한 역사의 주체성 확립과 민족적 자긍심을 정립하고자 하는 공통의 목표를 가졌다. 그러 나 군사정권이 충효사상을 근본으로 둔 사대부 전통문화를 통해 국가주의를 확립하고자 했다면, 민중문화운동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규정하며 민중중심주의를 실현 하고자 했다. 이렇듯 양자는 역사를 바라보는 방향이 서로 달랐다. 1980년대는 민중문화운동의 시대였다. 일반적으로 민중문화는 문화 안에 속하는 소범위이지만 1980년대는 군사정권이라는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민중문화운동이 문화운동보다 우위에 있는 특수한 구조가 형성되었다. 민중문화운동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우고 궁극적으로 군사정권의 타도를 목표로 한 문화투쟁, 문화정치였다. 민중문화운동은 사회학, 미학, 철학, 종교 등의 인문학이 중심이 되어 이념을 계발했고, 시위나 집회에서의 현장실천에 있어서는 예술분야가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념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가 중심이 되었고, 실천적 방안에는 전통연행예술 이 대표성을 가졌다. 또한 민중미술, 포스터, 판화 등의 시각예술분야의 활동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 열망이 전 국민적 지지를 받고 시위가 대규모로 펼쳐지면서 예술분야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따라서 민중문화운동 용어도 민중문 화예술운동, 민중문예운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민중문화운동의 확산에 있어 대학생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민중문화운동에 참여한 반체제 지식인들은 친북적 성향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대학생들의 활동은 민주화에 대한 순수한 열망으로 받아들여져 국민적 공감을 샀다. 반체제적인 운동은 대학가의 문화로 자리 잡아 사회주의 이념을 공부하는 소모임이 만들어지고 특히 연극반, 탈춤반, 농악반 등 전통연행예술 동아리는 이 같은 대학문화를 선두에서 이끌었다. 특히 매년 대학축제로 열리는 대동제는 군사정부에 대한 정치적 집회와 시위를 주도했다. 대학대동제는 역사 속에서 민중혁명으로 무참히 죽어간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현실에서의 민주화 실현에 대한 결연한 의지, 현실 치유의 희망을 증폭시켰다. 민중의 희생을 환기하는 목적은 민중중심의 세상을 건설 해야한다는 당위성과 필연성을 공고하게하기 위함이다. 민중문화운동은 문화예술이 경제와 정치 분야의 투쟁을 보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사회의 이념적 방향을 바꾸게 하는 정신적 가치라는 것을 증명했다. 결국 군사정권은 종식되었다.
6,400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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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크리스타 좀머러(Christa Sommerer, 1964-)와 로랑 미뇨노(Laurent Mignonneau,1967-)의 공동 작품인 인공생명 이론을 접목한 인터랙티브 예술 작품을 분석한다. 좀머러와 미뇨노가 미술계에 주목 받게 된 계기는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식물 성장Interactive Plan Growing>(1992)를 발표 하면서부터이다. 이 계기로 좀머러와 미뇨노는 인공생명 개념을 예술분야에 적용하기 위한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후 인터랙티브 아트의 예술적 가능성을 한 차원 더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은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동시에 스스로 자생하는 인공생명을 작품으로 보여주며 뉴미디어 아트의 한 지평을 넓혔다. 본 글에서는 우선 작품 제작에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인공생명의 정의와 함께 인공생명 개념이 예술과 접목될 수 있던 계기를 살펴본다. 다음으로 좀머러와 미뇨노가 인공생명 예술 개념에 관심 갖게 된 계기와 더불어 이들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상호작용성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또한 인공생명이라는 존재가 인터랙티브 아트로서 갖는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성을 알아본다.
5,700원